§ 나는 될놈이다 1627화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에슬라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지금 마계 대회의 이후로 몇 명의 악마 공작이 죽었는가?
일단 계략공 모스락이 마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굶주린 혼돈에게 넘어간 레비아탄이 모스락을 집어삼키고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검공 에다오르도 죽었다.
정확히 아직 죽은 건 아니었지만 굶주린 혼돈의 의식에 잡혀간 이상, 놈의 하수인이 되거나 파괴될 테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포악공 아다드도 죽었지.
“…그건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그리고 다른 두 악마 공작도 내가 죽인 게 아니고.”
-사주하지 않았나?
“…….”
[카르바노그가 할 말이 없긴 하다고 침묵합니다.]
확실히 골라돈한테 ‘야 너도 악마 공작 할 수 있어!’ 하고 포악공을 찔러보라고 꼬드긴 건 태현이 맞았다.
정말로 성공할 줄은 몰라서 그렇지!
“…어쨌든 다른 두 악마 공작은 내가 죽인 게 아니지.”
-하하. ‘우연’이란 거군.
에슬라는 눈을 찡긋거렸다. 그 찡긋거림이 매우 태현을 억울하게 만들었다.
진짜 아니라고…!
-아키서스는 언제나 ‘우연’이 함께하지. 암. 나도 안다.
“아니라니까…!”
-그래그래. 알겠다. 어쨌든 앞으로도 계속 ‘우연’이 따라주면 좋겠군.
“…….”
태현이 아무리 말해도 에슬라는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태현이라도 안 믿을 것 같긴 했다.
악마 공작들이 이렇게 픽픽 죽어 나가는데 그걸 믿으면….
“에슬라. 우연이고 뭐고 지금은 일단 저 의식을 막아야 한다. 무슨 방법 없나?”
-음. 글쎄. 난 악마 공작들을 어떻게 담글지만 생각했는데.
에슬라는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
태현은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에슬라의 도움이 무엇보다 필요했으니까.
여러 악마 공작들 중 가장 나이 많고 현명한 데다가, 태현과 사이가 좋은 악마 공작은 흔치 않았다.
자꾸 심심하면 아군을 쑤시려고 하는 점이 문제긴 했지만….
고민하던 에슬라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키서스. 다른 악마 공작들이 비열하게 날 배신하고 미궁에 가둬놨을 때, 넌 날 구해줬었지. 그때부터 네게는 감사하고 있다.
‘배신이 아니지 않나?’
정확히 따지면 에슬라가 미쳐가지고 ‘크하하 다른 악마 공작들을 다 죽여 버리면 내가 악마왕이다!’ 하고 날뛰었던 게 원인 아니야?
-저 의식을 막을 방법이 있긴 하다. 내가 가진 권능을 사용하면, 아무리 굶주린 혼돈이 사악한 의식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식을 막고 구해낼 수 있지.
“…그러면 지금 왜 안 쓰고 있냐??”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야 인마!
-끝까지 들어봐라. 내 권능은 무한하지 않다. 아키서스 네 권능 또한 마음껏 쓸 수 있지는 않을 터.
“그건 그렇긴 하지.”
-이 권능을 지금 쓴다면, 맹세를 하나 받고 싶다.
“뭐지?”
-다른 악마 공작을 하나 죽일 때 날 도와다오.
“…….”
아오 이 미친 새끼…!
태현은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에슬라라도 없으면 이 악마 공작 원정대가 어떻게 될지 뻔했던 것이다.
[광기공, 에슬라가 당신에게 제안을 해옵니다!]
[맹세를 주의하십시오! 악마 공작과 한 맹세는 파괴할 경우 막대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
[……]
“…대신 멋대로 찌르지 말고 때와 상황에 따라 나하고 최소한 상담은 해라.”
-물론이지. 아키서스. 악마 공작을 ‘우연’히 쓰러뜨리는 건 네 전문 아닌가. 당연히 네 조언을 듣겠다.
“…고맙다 이 새끼야….”
* * *
-비켜라! 공작들이여.
약속이 끝난 광기공, 에슬라가 앞으로 나섰다.
-나의 권능을 사용해 굶주린 혼돈의 힘을 무효화시키겠다.
-!
-!!!
그 말에 악마 공작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정도 힘을 보여주려면 에슬라도 만만찮은 각오를 해야 할 터.
그러나 악마 공작들은 희생이란 단어와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무슨 속셈으로 저런 짓을?
-혹시 굶주린 혼돈하고 붙어 먹은 거 아닌가?
-말이 너무 심하군. 공작들. 나는 스스로의 권능을 희생해서 굶주린 혼돈을 막으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그런 희생을 하고 있는가?
-닥쳐라. 희생 같은 소리를… 네놈의 사악한 꿍꿍이를 누가 모를 줄 알고!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 에슬라! 그걸 잊지 마라.
-아키서스! 에슬라 놈을 믿지 마라. 에슬라 놈을 감시해야 해!
악마 공작들은 자기들끼리 외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태현을 불렀다.
그만큼 에슬라는 위험했던 것이다.
솔직히 광기만 보면 아키서스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지는 게 에슬라였다.
에슬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다 죽일 놈들인 만큼 이 정도 연기는 기본이었던 것이다.
-믿음을 받지 못하니 슬프군. 나는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렀건만….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악마 공작들은 기가 막혔다.
영원히 봉인되어 있어야 할 놈이 풀려나더니 지껄이는 거 봐!
[광기공, 에슬라가 <권능 무효화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에슬라의 힘이 <굶주린 혼돈의 의식>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의식>이 점점 사라집니다!]
-대단하다…!
-에슬라, 이놈…!
알고는 있었지만 악마 공작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굶주린 혼돈의 의식을 멈출 정도의 권능이라니.
실로 대단한 권능이었다.
-더더욱 위험하게 느껴지는군.
-지금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악마 공작으로서 마계 대회의에 참석해서 맹세한 걸 어길 수는 없지. 게다가 굶주린 혼돈을 앞에 두고 그런 짓을 어떻게 한다고? 에슬라 놈도 그러지는 않을 테지.
-으음. 그렇긴 하군.
“…….”
태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에슬라는 그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쓰고 악마 공작들 죽이려고 하고 있는데….
-크… 크윽.
-에다오르!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붙잡힐 게 없어서 한낱 마법사 따위한테 붙잡힌단 말이냐!
의식에서 풀려난 에다오르를 향해, 악마 공작들이 일갈을 내뱉었다.
-나는… 나는….
-그래!
-나는… 굶주린 혼돈을 모시고… 모든 악마 공작들을 죽인다!
서걱!
에다오르는 들고 있던 대검을 휘둘러 가까이 있던 악마들을 다 썰어버렸다.
그 모습에 에슬라는 감탄하며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것도 ‘우연’….
“작작하고 막아라!! 에다오르를 제압해!”
[대검공, 에다오르는 굶주린 혼돈의 의식으로 인해 타락하고 강화됐습니다!]
[비록 그 의식이 도중에 중지되었다지만, 이미 변해버린 에다오르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에다오르를 처치하십시오!]
-대검공 놈…! 구해주려고 했건만 어쩔 수 없게 됐군. 죽여 버려라!
-놈의 힘이 만만치 않다! 절대 근접전으로 가지 마!
부하들이 파죽지세로 썰려나가는 걸 보자 악마 공작들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대검공 에다오르는 원래부터 근접전에 능했던 악마 공작.
하물며 지금은 굶주린 혼돈의 의식을 받아서 몇 배로 강화된 상태였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크르르… 빙결공 놈… 죽인다!
-!!!
평소 푸르네우스가 재수 없었는지 에다오르는 푸르네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르네우스는 깜짝 놀라서 아이스 드래곤을 타고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푸르네우스의 부하들은 그렇게 빨리 피하지 못했다.
[대검공, 에다오르가 <붉은 표식의 공격>을 시전합니다!]
[붉은 표식이 자리 잡습니다!]
콰직-!
푸르네우스의 부하들에게 붉은 표식이 차례대로 생겨나더니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
푸르네우스의 부하들을 말 그대로 도륙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악마 공작의 부하들을 일순간에 해치워버리다니.
-…….
푸르네우스는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폭발했다.
-놈!!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진설(眞雪)의 네 번째 조각>을 사용합니다!]
[냉기의 진정한 주인이 찾아옵니다!]
[냉기의 핵이 더욱더 깨어납니다!]
‘!’
태현은 예상 밖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깜짝 놀랐다.
굶주린 혼돈이 아니라 같은 악마 공작들하고 싸우느라 네 번째 조각이 열릴 줄이야!
‘고맙다, 에다오르!’
[푸르네우스가 <네 번째 진설의 봉인>을 시전합니다!]
[사나운 냉기가 폭풍처럼 에다오르를 감싸기 시작합니다!]
휘이이익!
귀를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냉기가 에다오르를 두꺼운 천처럼 칭칭 감기 시작했다.
그 상태 그대로 에다오르는 얼어붙었다.
-됐다! 놈을 해치워!
-…멈춰라! 공격을 했다가는 봉인이 풀릴 거다! 지금 놈과 싸워서 힘을 낭비할 필요 없다. 굶주린 혼돈에게 놀아나는 꼴이 될 테니.
푸르네우스가 달려들려던 악마 공작들을 말렸다.
에다오르를 봉인시켰지만 서투르게 공격을 했다가는 이 봉인이 풀릴 수가 있었다.
-놈을 저 지하에 영원히 가둬버려라!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음악공, 구시렉이 미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미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포악공, 골라돈이 미궁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
한때 광기공 에슬라를 봉인했듯이, 악마 공작들을 각자 자신의 권능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미궁을 만들기 시작했다.
태현은 그걸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얼어붙은 에다오르에게 다가갔다.
철컥!
[<악마를 충성하게 만드는 기계개조갑옷>을 착용시킵니다!]
[악마 공작에게 착용시켰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뭘 한 거냐?
“혹시라도 놈이 깨어날 때를 대비해서 기계공학으로 만든 봉인 장치를 착용시켜놨다.”
-잘 했다. 아키서스.
악마 공작들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마무리 작업을 마쳤다.
그들은 설마 태현이 이런 와중에 장난질을 쳤으리라고는 꿈에도 의심치 못했다.
‘나중에 미래로 돌아가게 되면 몰래 빼내봐야겠다.’
태현은 기계개조갑옷이 효과가 있기를 기대했다.
이대로 버려두기에는 에다오르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카르바노그가 에다오르를 구해달라고 말합니다.]
‘걱정 마. 카르바노그.’
[미궁이 완성되었습니다!]
[악마 공작들이 힘을 모아 만든 이 던전은 어떤 침입자들도 쉽게 공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궁 제작에 참가했습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신도들은 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에슬라 놈처럼 빠져나가는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영원히 봉인시켜라!
태현은 에슬라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 * *
[굶주린 혼돈의 추격대가 나타납니다!]
“!”
이세연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싸움이 길어지자 왕국 전역에 퍼져 있던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하나씩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칫하면 불리한 상황에서 포위당할 수도 있었다.
“타락자들은 내버려 두고 추격대를 포위해! 괜히 빠져나가게 두면 귀찮아질 수도 있다!”
“네!”
고대 제국 타락자들은 아직까지도 서로 싸우고 있었다.
‘빨리 끝내지 못하면 위험할 수도….’
이세연은 언데드 전력을 총동원해 타락자들을 쓰러뜨릴 각오를 했다.
싸움이 길어지면 변수가 생기는 것이다.
[고대 제국 타락자가 쓰러집니다!]
[고대 제국 타락자가 쓰러집니다!]
[……]
그 순간 잘 싸우던 고대 제국 타락자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키서스 검법을 시전하는 고대 제국 타락자들은 사납게 포효하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덕분에 남은 플레이어들도 추격대 상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추격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굶주린 혼돈의 세력이 약화됩니다!]
[오스턴 왕가의 궁전이 무너져 내립니다!]
“어, 어, 어??”
길드 동맹 간부들은 메시지창을 보고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잠시 스미스한테 뺏겼다지만 길드 동맹 간부들이 수도로 쓰던 도시.
그 도시의 자랑인 오스턴 왕가의 궁전이….
무너져 내렸다고??
‘아무리 봐도 김태현이 한 것 같은데… 말해주지 말아야겠다.’
이세연은 속으로 든 생각을 삼켰다.
길드 동맹이 들었다가는 원한이 몇 배로 늘어날지도 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