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8화
편견과 달리 악마 공작들도 의외로 희생을 좋아했다.
자기가 하기 싫어해서 그렇지.
[행운의 은신 스킬을 사용합니다!]
[고급 은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페널티를 받습니다.]
[은신 스킬이 오릅니다!]
[신의 예지를 사용합니다!]
[아키서스의 기도를 사용합니다!]
[행운 스탯이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합니다!]
[막대한 행운으로 인해 은신에 추가 보너스가…]
[……]
‘장난 아니군.’
태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각종 보너스를 받았는데도 은신하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신의 예지>가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
아니, <신의 예지>가 있어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야만족 전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난동을 부리는 전장 한복판을 조심해서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느다란 길 위로.
가다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은신 풀리고, 날아오는 무기에 맞기라도 하면 은신 풀리고, 숨 크게 쉬어도 은신 풀리고….
하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태현은 온 신경을 앞으로 집중한 채 달려 나갔다.
뒤에서 모스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 * *
‘이런.’
가느다란 밧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은신 돌파를 하던 태현은 멈칫했다.
<신의 예지>가 가리키는 길이 결국 막혀버린 것이다.
이제까지는 어떻게든 잘 피하고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야만족 전사들을 뚫고 가야 했다.
-저 멍청한 사자 부족 놈들! 무식하게 들이박을 줄밖에 모르는 놈들이다.
-맞다. 맞아. 우리한테 맡겼다면 벌써 악마 공작들은 죽었겠지!
-그나저나 토끼 부족 놈들은 왜 저기 붙은 거지?
-자기들이 모시던 신을 위해서라는군.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망한 신 때문에 부족의 목숨을 바치다니!
[카르바노그가 발끈합니다!]
‘카르바노그. 지금 그거 고민할 때가 아니다.’
태현은 무슨 스킬을 사용해야 저 야만족 놈들을 치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마법?
‘아니. 괜히 마법 썼다가는 놈들을 자극할 수 있어. 명백히 수상하지 그건.’
이 근처에 마법이 아직 안 날아왔는데, 갑자기 마법이 날아오면 바보라도 침입자 의심을 할 것이다.
상대를 치울 수 있으면서도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은….
[계략공, 모스락이 크게 다칩니다!]
[모스락이 숨겨놓았던 계략들이 사라지고, 악마 공작의 힘이 약해집니다!]
[……]
-크아아악! 아키서스! 개자식아! 네놈을 저주하겠다! 듣고 있냐!? 내가 살아나가면 마계대회의고 뭐고 네놈의 심장부터 뽑아버리겠단 말이다!!
-저것도 분신인가??
-분신 같군. 정말 실감나는데? 악마 공작 놈, 분신술이 보통이 아니야!
‘아.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태현은 모스락에게 속으로 짜증을 냈다.
물론 모스락도 힘든 건 알겠지만, 지금 모스락만 힘든 게 아니지 않은가!
다 같이 힘든데 혼자 짜증을….
-그래도 토끼 부족 놈들은 만나기 싫군.
-맞아. 나도 토끼 부족 놈들은 만나기 싫어. 그놈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
대화를 듣고 생각하던 태현은 문득 계획 하나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먹힐지 모르겠는데.’
태현은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은 뭐라도 해봐야 했다.
-토끼 지배, 언데드 토끼 소환, 토끼 조종!
마법보다는 덜 수상하지만, 야만족 전사들에게는 조금 수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고 귀여운 동물.
그건 바로 토끼였다.
이 주변에 토끼들이 우르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야만족 전사들은 토끼 부족 전사들이 이 근처에 왔나 싶어서 움직일 게 분명했다.
‘움직여라!’
-토… 토끼다!!
-토끼 떼잖아?!
태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기다렸다.
이제 야만족 전사들이 찾겠다고 사방으로 흩어지기만 하면….
-후퇴해라!!
-후퇴해! 토끼 부족 놈들이 근처에 있다!!
-어, 어디에?! 어디에 있는데?!
-그건 모른다!
-그러면 아직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아, 더럽게 말 많은 새끼! 그럼 넌 혼자 남아서 상대해라!
-아니야! 아니야! 나도 같이 후퇴하겠어!
“…???”
태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
주변에 토끼 부족 전사들 찾아서 움직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그냥 후퇴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뭐, 길 만들어졌으니 괜찮겠지.’
* * *
[<야만의 요새>에 접근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지금 저 요새에는 굶주린 혼돈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요새 안에 곰 부족의 대전사, 갈랄타가 힘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갈랄타가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쓰러뜨려야 합니다!]
[……]
[……]
[……]
‘…미치겠군.’
태현은 오랜만에 막막함을 느꼈다.
지금 굶주린 혼돈 하나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에 갈랄타 놈까지 회복하고 있다고 하니….
‘표식을 바로 파괴할 수 있을까?’
적당히 튼튼하다면 모를까, 굶주린 혼돈이 직접 만들어서 새긴 강력한 표식이 그렇게 약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요새에 잠입해서 굶주린 혼돈과 갈랄타와 곰 부족 전사들의 눈을 피한 다음 표식을 파괴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건데.’
[은신 스킬이 오릅니다!]
[고급 은신 스킬이 최고급 은신 스킬로 변합니다!]
‘!’
고민하던 태현에게 보상이라도 내려주듯, 드디어 은신 스킬이 최고급을 찍었다.
나름 은신 스킬을 많이 써왔던 태현인 만큼 오히려 늦은 감이 있을 정도였다.
이번 은신 돌파가 그만큼 난이도가 높았던 것이다.
‘쓸 만한 거 나와라.’
태현은 간절한 마음으로 스킬을 확인했다.
다른 때면 모를까 지금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어떤 스킬이든 간에 최고급 스킬을 찍으면 보상 같은 스킬이 하나씩 나오곤 했으니, 은신 스킬도 분명….
[<아키서스의 은신>을 얻습니다!]
<아키서스의 은신>
아키서스가 필멸자에게 은신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
태현은 눈을 깜박였다.
아키서스의 권능 스킬들이 가면 갈수록 난해해지고 헷갈려서 직접 써보기 전에는 파악하기 힘들어지고 있긴 한다지만 이건 좀 심했던 것이다.
‘뭘 보여준다는 거야? 길을 보여주는 건가?’
아무리 태현이라도 이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럴 때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써보는 수밖에.
‘다행히 은신 계열 스킬이니, 이상한 스킬이더라도 역효과 같은 건 나지 않겠지.’
이게 무슨 검술 스킬이나 마법 스킬이면 지금 시험하려고 써볼 수도 없었다.
잘못 쓰는 순간 요새 안에 있던 야만족 전사들이 ‘침입자가 자기 왔다고 광고한다!’ 하면서 뛰쳐 나올 테니까.
하지만 은신 계열 스킬은 조용하고 은밀한 법.
좀 허무하거나 황당할 수는 있어도 역효과는 나지 않을 것이다.
-아키서스의 은신!
[<아키서스의 은신>을 시전합니다.]
[아키서스가 필멸자에게 은신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태현은 <신의 예지>처럼 주변에 길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업그레이드판 <신의 예지> 같은 스킬?
좀 더 강력한 은신의 버프가 걸리면 가능한 길도 더 많이 생길 테니, 그런 스킬이 아닐까.
-침입자다!!!
-침입자다!!!!!
“?!?!?!”
태현은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은신을 들켰다는 메시지창도 없었는데 요새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동쪽에 침입자다!
-북쪽에도 있다! 북쪽에도!
-아니다! 남쪽에도!!
-서쪽에도 침입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
진흙과 나무, 뼈로 벽을 채운 요새 위에서 야만족 전사들이 허겁지겁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제야 태현은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요새 주변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환영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키서스가 부리는 천사 놈들이다!!
익숙한 머리 셋 팔 여섯의 천사들.
태현에게는 진짜가 아니라는 듯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야만족 전사들에게는 진짜 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굶주린 혼돈도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야만족 전사들에게 빨리 가서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가. 소란을 만들어서 은신을 편하게 해주는 스킬인가!’
태현은 이제야 <아키서스의 은신>이 무슨 스킬인지 알 것 같았다.
<신의 예지>가 최적의 상황을 찾아준다면 <아키서스의 은신>은 아예 최적의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주는 스킬!
이 정도면 쿨타임이 긴 것도 이해가 갔다.
-으아악! 요새에 불이 났다!!
-어떤 놈이 불을 지른 거야!?
“??”
그러나 <아키서스의 은신>은 아직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요새 안에서 갑자기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콰르르!
-동쪽 요새 벽이 무너져내렸다!
-말도 안 돼! 어떤 놈이 요새 벽을!?
-식량 창고에 독이 퍼졌어!
-너… 너 이 자식. 토끼 귀는 왜 달고 있는 거냐! 너, 토끼 부족의 첩자였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냐! 정신 차려라!
“…….”
태현은 경악했다.
뭔….
뭔 종합선물세트야???
‘이 정도면 아키서스의 은신이 아니라 아키서스의 재해 아닌가…?’
* * *
[만신전의 표식을 발견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빼앗은 신들의 권능이 담겨 있는 이 표식은, 강력한 힘으로 마계를 위협합니다!]
[사악한 힘을 가진 자는 이 표식에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명성이 악명보다 높습니다!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신성력이 매우 높습니다! 접근할 수 있습니다!]
‘와. 착하게 살아서 다행이군 정말.’
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사악하게 살았거나 악마 쪽이었다면 정말 여기까지 와놓고 접근도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굶주린 혼돈도, 다른 놈들도 태현의 접근을 아직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일어난 소란도 소란이지만 앞의 전장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레비아탄! 모스락 놈을 꼭꼭 씹어서 삼켜버려라!
태현은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검을….’
태현이 검을 휘두르려고 하자, 바로 <신의 예지>가 경고를 날렸다.
검 한 번 휘두르는 순간 무조건 들킨다!
‘…그러면 마법은… 안 되고. 갖고 튀는 것도 안 되는군.’
태현은 갖고 있는 공격 수단을 빠르게 정리해 봤다.
태현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 <화신의 일격>.
…솔깃하긴 했지만, 이걸 표식 하나 파괴하자고 쓸 수는 없었다. 어떻게 간신히 쿨타임이 돌아왔는데.
그 다음은 이번에 아키서스 룰렛 스킬로 얻은, 1회용 전설 검술 스킬 사용권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아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스미스 상대할 때 쓰려고 했는데.’
[카르바노그가 그만 좀 아끼라고 안달이 나서 외칩니다!]
카르바노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카르바노그가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언제라도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 스킬 아끼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보는 신이 더 괴로웠다.
제발 그만 아껴!
“<살아 움직이는 폭탄>.”
태현은 정말, 무의식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기보다는 스킬을 준비했는데 <신의 예지>가 딱히 경고를 하지 않아서 그대로 사용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까지 봤던 것들 중 가장 긴 메시지창이 태현에게 달려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폭탄>을 사용합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무사히 폭발할 경우, 기계공학 스킬이 더욱 더 크게 오를 것입니다!]
[여러 신들의 신성력이 담겨 있는 표식을 터뜨리는 것은 매우 신성모독적인 행동입니다! 악명이 크게 오릅니다!]
[성과 왕궁을 무너뜨린 기계공학자들도 이런 것들을 터뜨려 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추가로 크게 오릅니다!]
[칭호를 얻습니다!]
[……]
[……]
[레벨 업 하셨습니다!]
‘…잠깐만.’
태현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스킬 한 번 썼다고 바로 레벨 업을 했다고?
아직 폭탄 완성도 안 됐고,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거….
‘이거 뭔가 불길한데….’
[만신전의 표식에 담긴 신성한 힘들은 서로 얽히고설켜서 더욱더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 힘을 주의하십시오! 한 번 터져나가면 어떤 힘으로도 이 힘을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
[……]
[……]
‘…권능이나 행운 스탯으로도 못 막는다!!’
태현은 그 순간 <만신전의 표식>에서 손을 뗐다.
폭탄으로 완성된 <만신전의 표식>이 불길한 존재감을 흩뿌리며 주변의 모든 NPC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현은 미친놈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바노그가 달리라고 비명을 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