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7화
구시렉은 참다못해 일갈을 터뜨렸다. 음악공답게 구시렉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도 뚜렷하게 울렸다.
-뭐야?
-음악공이 왜 저러는 거지?
싸우던 악마들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자 구시렉은 수치스러움에 시선을 피했다.
악마 공작 정도나 되었는데, 자기 자식이 아키서스의 천사로 전직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계 역사에 아주 영원히 남을 수치였다.
-아버지, 드디어 진실된 힘에 눈을 뜨신 겁니까! 눈을 뜨십시오!
-입 닥쳐라, 머저리 놈아! 눈을 못 뜨고 있는 건 네놈이다!
-아버지! 지금 이 상황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키서스의 신도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그건 굶주린 혼돈이 악마 공작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對) 악마 스킬을 준비해서 그런 거다! 이 머저리 놈아!!
아무리 안 싸우려고 해도 아키서스의 천사로 갈아탄 구시온은 구시렉의 혈압을 팍팍 올리는 존재였다.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못 참겠다!
[곰 수인 부족 전사 백부장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합니다!]
[……]
[……]
-아키서스의 이간질!
[아키서스의 힘을 빌려 적들 사이에 잠든 불화를 깨웁니다.]
[일정 확률로 적들의 사이가 틀어집니다!]
[……]
[……]
태현은 곳곳에서 날뛰고 있던 거대 괴수들은 물론이고 몇몇 수인족 장교들까지 끌어들이면서 상황을 뒤흔들어 놨다.
단순히 언령 마법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온갖 퀘스트를 화술로 깨고 권능 스킬을 쌓아 놓은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수인족들끼리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태현의 화술 스킬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친놈들처럼 서로 치고 받지는 않았을 터.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내 하수인들아. 내 명령을 듣고 적을 죽여라!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금하겠다!
[아키서스의 이간질로 인해 굶주린 혼돈의 명령이 실패합니다!]
[수인족 전사들이 더더욱 흉폭하게 서로를 공격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뭐 이런….
굶주린 혼돈도 기가 막혔는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멍청한 야만족 놈들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자기 명령도 어기고 싸울 줄이야.
새삼 아키서스가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위협적인지 느껴졌다.
대규모 싸움일수록 가장 먼저 죽여야 하는 놈!
네놈은 삼키지도 않겠다. 그냥 갈아서 대륙 곳곳에 흩뿌려놓겠다. 영원히 부활하지 못하도록.
태현은 대꾸할 시간도 없었다.
상황을 잠시 틀어막았다지만 여전히 숨 돌릴 틈도 없이 다급했던 것이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적들이 몰려 들어온다!
[공포의 화신 스킬이 끝납니다!]
[화술의 근원 스킬이 끝납니다!]
-!!
-!
태현을 수호하고 있던 토끼 부족 전사들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언령 마법의 힘이 사라진 걸 느낀 것이다.
-카르바노그의 전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카르바노그의 전인을 수호해라! 전인을 모시고 전장을 빠져나가라! 얼마가 죽든 저분은 지켜야 한다!
토끼 부족 전사들은 중후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자기들의 목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철저한 충성심!
…이 태현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아키서스 교단이랑은 거의 정반대 수준인데….’
어쨌든 토끼 부족 전사들의 걱정과는 달리, 태현은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공포의 화신>+<화술의 근원>만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아키서스의 영혼관!”
[<아키서스의 영혼관>을 시전합니다!]
[아키서스는 자신의 왕국에 쓰러뜨린 적들의 영혼을 가둬놨습니다. 진정한 화신이라면 이 영혼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라, 모스락! 너의 힘이 필요하다!”
-????
다른 쪽에서 멀쩡히 잘 싸우고 있던 계략공 모스락이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뭔 개소리를…?
그러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변을 후려갈기는 듯한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계략공 모스락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악마 공작들이 그걸 보고 ‘저건 계략공 모스락이 맞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
-저, 저, 저, 저, 파렴치한 새끼가!?!?
모스락은 기겁을 해서 외쳤다.
아키서스가 변장과 개짓거리에 능한 잡신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마 공작의 힘을 그대로 훔칠 정도로 쓰레기일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대체 저 새끼는 어디까지??
-계략공! 이게 무슨 일인가?! 힘을 빌려준 적이 있는 건가?
-설마 악마왕의 지팡이를 받으려고 자기 힘을 빌려준 건 아니겠지? 그런 양심 없는 짓을?
-…주둥이 다물지 못하겠나 이 같잖은 놈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다른 공작들의 의심에 모스락은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지금 뺏겨서 어이가 없는데 저딴 의심까지 받으니 굶주린 혼돈이고 뭐고 같은 공작 놈들부터 죽이고 싶어질 정도였다.
-설마 대륙에 갔을 때…! 대륙에서 날 쓰러뜨렸을 때 내 힘을 훔친 것이냐!?!?
모스락은 계략공답게 상황을 냉정하게 추리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현이 자신의 힘을 일부 훔칠 수 있었던 건 그때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륙에 소환된 모스락을 태현이 쓰러뜨렸을 때!
물론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라! 아키서스 놈아!! 대답하란 말이다!
-진정하게, 계략공! 지금 상황이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맞다! 앞을 봐라!
-저놈이 방금 이쪽을 힐끗 쳐다봤단 말이다! 네놈들은 눈이 없느냐!
-잘못 본 거겠지! 정신 차려라!
악마 공작들은 모스락을 말렸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갑자기 기분이 찜찜해졌다.
‘잠깐, 설마 아키서스 놈이 내 힘도 훔친 건 아니겠지…?’
* * *
[계략공 모스락의 힘이 당신에게…]
[……]
[……]
[……]
‘대단하다!’
태현은 솟구치는 스탯과 힘, 추가되는 스킬에 감탄했다.
그리고 새삼 악마 공작들의 힘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레벨과 스탯을 쫙 깎아먹고 대륙에 나타나도 판온을 뒤흔드는 괴물들다운 힘.
물론 지금은 도움이 거의 안 되고 있었지만….
‘상황을 완전히 뒤흔들어서 굶주린 혼돈의 정신을 팔리게 만들어야 한다.’
굶주린 혼돈이 불러낸 표식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붙어야 했다.
하지만 굶주린 혼돈이 그걸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을 터.
태현은 갖고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굶주린 혼돈을 패닉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계략공 모스락의 스킬들 중 지금 쓸 수 있는 건….’
모스락은 마법사, 그것도 저주와 혼란 계열의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타입이었다.
물론 마법사라고 해도 일반적인 플레이어들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영혼을 갉아먹는 계략, 파멸의 맹세, 기어 나오는 혼란의 저주!
[영혼을 갉아먹는 계략이 시전됩니다!]
[수인족 전사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파멸의 맹세를 시전합니다!]
[수인족 전사들이 자기 자신의 미래에 존재하는 파멸에…]
[……]
[……]
마치 넓은 파도가 펼쳐지는 것처럼, 태현을 중심으로 강력한 광역 디버프 마법들이 썰물처럼 퍼져나갔다.
기세 좋게 날뛰던 수인족 전사들이 머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에 구시온은 검을 들고 외쳤다.
-보아라! 아키서스 님께서는 저 굶주린 혼돈의 얕은 수작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모든 악마들은 아키서스 님에게 힘을 바쳐라! 그렇게 한다면 저 굶주린 혼돈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뭐라는 거야 저 미친 천사 놈은?
-저놈은 대체 어디서 나온 놈이지?
물론 구시온의 외침은 대부분의 악마들한테서 무시당했다.
[쥐 수인족 부족이 일시적으로 후퇴합니다!]
[다른 수인족 부족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
한 방울씩 차오르던 물컵의 물이 넘치는 것처럼, 계속 쌓이던 피해가 수인족 부족 하나를 결국 도망치게 만들었다.
태현은 멈추지 않고 연속해서 스킬을 사용했다.
-사디크의 화염 환영 분신, 사디크의 화염 파도!
악마들이 싫어하는 것처럼 굶주린 혼돈도 신들을 싫어했다.
아무리 뛰어난 악마 공작도 절대 쓸 수 없는 마법.
그건 바로 신성 마법이었다.
사디크의 화염이 넘실거리듯 주변을 불태우며 앞으로 거대한 해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지혜 스탯이 매우 높습니다!]
[현재 마법 스킬이…]
[……]
[……]
[……]
[사디크의 화염 마법에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화염이 모든 것을 녹여 버립니다!]
태현은 오랜만에 대마법사가 된 기분을 맛보았다.
지팡이 한 번에 전방이 싹 쓸려나가는 쾌감.
그건 대마법사만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대검공, 에다오르의 악마들이 화염에 휩쓸려 사망합니다!]
-아키서스!!!
“아. 거 미안하게 됐다!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아키서스의 고대 냉기 마법을 시전합니다!]
[<아키서스의 냉기 폭풍>이…]
[드워프의 금속 마법을 시전합니다!]
[폭탄들에 추가적인 마법이 각인됩니다!]
[이데르고의 역병 마법을 시전합니다!]
[사방에 역병 안개가…]
[느부캇네살의 흑마법이…]
[고대 제국의 언데드 자폭특공대가…]
태현은 정말 미친놈처럼 마력을 사용해댔다.
로브 착용에 모스락의 힘까지 빌린 지금, MP 무료이용권을 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 풀리기 전까지 써야 한다!
태현을 중심으로 온갖 신성 마법들이 튀어나오고 그 서슬에 야만족 전사들이 혼란에 빠져서 발이 묶이자, 굶주린 혼돈은 이를 갈았다.
아키서스 놈부터 먼저 집어삼켰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놈을 잡아와라!
카아아아아악!
굶주린 혼돈을 모시고 있던 레비아탄은 괴성을 지르며 태현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바다에서 움직이던 괴수가 땅 위에서 움직이는데도 전혀 움직임에 지장이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빠르다!’
그 서슬에 태현은 움찔했다.
야만족 전사들까지 날려 버리면서 올 정도로 레비아탄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세가 오히려 좋았다.
‘놈이 날뛸수록, 전장은 혼란스러워진다.’
태현은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따라와라!”
-예!
태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략공 모스락의 진영 쪽으로.
-????
-??????
각자 진영에서 싸우고 있던 악마 공작들은 당황했다.
원래 이런 포위전에서는 진영의 균형이 중요했다.
둥글게 포위해야 서로 때리는 공격이 잘 들어가고, 상대의 공격은 분산되지 않겠는가.
그걸 감안해서 진영을 짜놨는데 갑자기 아키서스 놈이 모스락 쪽으로 달려가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키서스! 뭐냐?! 왜 움직이는 거냐! 포위망이 뚫린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거냐!
악마 공작들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작들도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탓에 막거나 방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태현은 각종 마법으로 소환해 낸 분신들을 데리고 모스락의 진영 쪽으로 다가갔다.
화염 분신부터 슬라임 분신까지 가능한 분신들은 모두 데리고 와서, 마치 모스락이 열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에슬라는 깨달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과연…!
-??
크오오오오오오오오!
레비아탄은 마계를 뒤흔드는 울음소리를 내뿜으며 태현의 뒤를 쫓았다.
굶주린 혼돈이 뒤에서 명령을 내렸다.
누가 진짜인지 구분할 필요 없다. 분신이고 뭐고 다 죽여 버려라!
-…?!
계략공 모스락은 두 번째로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아키서스 놈이 자신의 힘을 훔쳐서 변신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미끼로 써버렸단 말인가??
-아키서스!!! 돌아버렸나?!?!
[계략공, 모스락이 극도로 분노합니다!]
[모스락은 더 이상 당신의 지휘를 듣지 않습니다!]
[……]
‘알 게 뭐냐.’
태현은 메시지창을 무시했다.
레비아탄을 모스락의 진영으로 끌고 온 다음, 태현은 바로 영혼관을 풀었다. 그리고 은신 스킬 써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표식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라면 악마 공작 하나 정도는 희생할 수 있었다.
‘다른 악마 공작들도 동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