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6화
-굶주린 혼돈이 저기에 있다!
음악공 구시렉도 눈치를 챘는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다른 악마 공작들도 충격에 빠졌다.
굶주린 혼돈이 여기에 있다고?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놈을 상대하는 것과, 굶주린 혼돈을 직접 상대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어쩐지 레비아탄 놈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다 싶었더니….
놀랍다…. 놀라워! 악마 공작 놈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니!
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깊고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굶주린 혼돈의 화신을 직접 대면합니다!]
[공포에 빠집니다!]
[공포 저항에 성공합니다!]
[……]
[……]
[대륙의 가장 사악한 존재, 굶주린 혼돈을 직접 대면했습니다. 비록 분신 같은 존재라고 하나 굶주린 혼돈의 화신은 결코 상대하기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살아남으십시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
-…….
자리에 있던 악마 공작들도 긴장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르바이트생한테 행패를 부리던 사람도 사장님이 직접 나오게 되면 일단 멈칫하게 마련.
하물며 굶주린 혼돈은 악마 공작들에게 아키서스보다 더 두려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아키서스는 최소한의 상도덕이나 있지 굶주린 혼돈은 그냥 그런 것 없이 물어뜯고 집어삼키는 것이다.
-굶주린 혼돈. 마계에 직접 이렇게 강림할 줄이야. 어지간히도 한가한가 보군.
악마 공작 중 한 명이 지지 않겠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러나 굶주린 혼돈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가냘프게만 들렸다.
악마 공작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를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가! 흐흐흐… 오늘 내가 포식을 할 수 있겠군.
-보자 보자 하니 아주 건방지게 지껄이는구나!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폭발해서 공격을 다시 개시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단점이지만, 가끔 이렇게 장점도 있는 법.
푸르네우스는 굶주린 혼돈의 오만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덤벼들었다.
[푸르네우스가 설원의 강림을 시전합니다.]
[마계의 냉기가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진설의 조각을 해방한 게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지, 푸르네우스의 기세는 악마 공작들 중 가장 날카롭고 사나웠다.
주변에 모여든 냉기가 푸르네우스 근처에서 사납게 군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못 본 사이 강해졌구나!
그러나 굶주린 혼돈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넘쳐났다.
마치 재롱을 더 부려보라는 것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굶주린 혼돈이 움직였다.
[굶주린 혼돈이 만신전의 표식을 시전합니다.]
[카르바노그가 표식을 보고 비명을 지릅니다!]
카르바노그가 비명을 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이 불러온 만신전의 표식.
그 표식에는 여러 신들의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에게 붙잡힌 신들이 빼앗긴 권능.
그 권능들의 총집합체가 저 불길한 표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남의 권능 여러 개 뺏고 다녔는데.’
카르바노그에 비해 태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야 굶주린 혼돈은 이것저것 꿀꺽 삼키는 놈인데 남의 권능도 몇 개 쓸 수야 있겠지.
[카르바노그가 그것과 그게 같냐고 화를 냅니다!]
[만신전의 표식이 발동합니다.]
[모든 마계의 악마들이 약화됩니다.]
[모든 마계의 악마들의 마력이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
[……]
“…!”
이제 태현도 놀랐다.
만신전의 표식은 그야말로 대(對) 악마 카운터였던 것이다.
예전부터 신들이 갖고 있는 신성력은 악마들에게 치명적이게 마련.
그 신성력을 모아놓은 저 표식은 악마들에게 지독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각종 능력치를 저하시키고, 이동속도, 공격속도, 회복속도를 꺾어버리고, 판단력과 시야를 좁히고, 마력을 흡수시키고….
마치 모기향 앞의 모기들처럼 악마 공작들의 발이 멈추기 시작했다.
‘저거… 내가 이기면 나중에 챙길 수 있나?’
태현은 이 와중에도 저 표식이 탐이 났다.
아키서스는 뭐 유물에 저런 거 안 남겨놨나?
-굶주린 혼돈 만세!
-하찮은 악마 놈들아. 굴복해라. 그리고 굴종해라! 너희 놈들에게 남은 운명은 파멸뿐이다!
요새 안에서 벌벌 떨며 버티고 있던 야만족 전사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급히 쌓아 올린 제단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고 기뻐했다.
그 강력한 악마 공작들을 저렇게 갖고 놀듯이 상대하는 굶주린 혼돈.
이 얼마나 압도적인 광경이란 말인가!
‘준비 수준이 다르군.’
태현은 혀를 찼다.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 예전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해 온 굶주린 혼돈.
그에 비해 굶주린 혼돈이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주도하느니 네가 주도하느니 다투던 악마 공작들.
전투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달랐다.
‘이러니까 저번에도 아키서스한테 당했겠지. 멍청한 놈들.’
-아… 아키서스.
에슬라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태현은 혹시 에슬라가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나 싶어서 반색했다.
“뭐냐, 에슬라? 방법이 있나?”
-아니… 지금 놈들이 약해졌을 때… 뒤를 공격하는 게 계획인가? 맞는가?
“…미친놈아 이게 계획으로 보이냐?!”
태현은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이 와중에도 에슬라는 이게 모두 다 태현이 그린 큰 그림인 줄 알고 있었다.
도화지 찢어지겠다!
-아니었나…? 아쉽군.
* * *
놈들을 쓰러뜨려라!
굶주린 혼돈의 외침과 함께 요새 안에서 야만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악마 공작들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하나하나가 언제라도 악마 공작의 목을 노릴 수 있는 위협적인 사냥꾼들로 보였다.
위험하다!
-놈들을… 막아라! 물러서서 거리를 벌려라!
-내 충성스러운 부하들아. 목숨을 다해서 저놈들을 막아라!
악마 공작들은 이를 갈며 거리를 벌렸다.
지금 저 만신전의 표식에서 거리를 벌리지 않는 한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악마 공작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추정 레벨이 1,000은 넘는 괴물들이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희귀한 모습.
태현도 어이가 없었다.
마계 대회의 괜히 했나?
-성스러운 카르바노그의 전인이시여!
“!”
-저희는 언제라도 당신을 모시고 마계의 가장 위험한 곳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토끼 수인 부족들이 당신의 지휘를 기다립니다!]
[토끼 수인 부족들이 당신에게 검을 바칩니다. 검술 스킬이 일시적으로 크게 향상합니다!]
[토끼 수인 부족들이 <카르바노그의 검진>을 시전합니다. 딱히 카르바노그와는 상관이 없는 이 검진은, 뛰어난 검술의 달인들인 토끼 수인 부족들이 카르바노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검진입니다.]
[……]
[……]
지금 지평선을 꽉 채우고 달려오는 야만족 전사들.
그 뒤에 있는 거대 마수와 굶주린 혼돈.
당장이라도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토끼 수인 부족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뒤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멋지다!
‘토끼 수인 부족들 너무 하드보일드한 거 아닌가?’
다른 야만족들은 우가우가 수준이었는데 토끼 수인 부족들은 무슨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덕분에 태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결국 저 표식은 내가 훔쳐… 아니, 부숴야 한다.’
[카르바노그가 방금 뭐라고…?]
‘다른 악마 공작들은 저기 가까이 다가가면 그대로 말라 죽을 테니 절대 움직이지 않을 터. 차라리 내가 훔… 아니, 부수고 나서 공적치 포인트를 챙기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태현은 빠르게 전황을 계산했다.
사방에서 각 수인 야만족 전사들이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서 어마어마한 함성을 터뜨리고 오러를 날려가며 악마들을 썰어대는 중이었다.
표식 때문에 약해진 악마 공작들은 도와주기는커녕 힘을 회복하고 버티는 데에 전념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긴 했지만, 모든 것이 최악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작 굶주린 혼돈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원래라면 굶주린 혼돈이 레비아탄을 끌고 돌진하면 악마 공작들 중 두셋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굶주린 혼돈은 그러지 않았다.
왜?
표식을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반격할 시간이 있다!’
“움직인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토끼 수인 전사들은 호승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 카르바노그의 전인 또한 뛰어난 검사.
같이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적진에 뛰어들어서 목을 베어나간다면 아쉬움 하나 없으리라.
“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나를 보호해라!”
-…네?
토끼 수인 전사들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 * *
[<광기의 마력 회복 로브>를 착용합니다.]
[공격력이…]
[……]
[<아키서스 화신의 지팡이>를 착용합니다.]
[조련술 스킬이…]
[……]
태현은 마법 스킬이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마법사 랭커들이 비교하면 ‘지금 마법 스킬 이거 갖고서 마법사라고 하는 건 아니죠?’라고 황당해하겠지만, 최고급 마법 스킬을 찍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부족한 스킬셋과 MP를 보완하기 위해, 마법을 쓰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각종 장비는 물론이고 태현을 호위해 줄 전력들까지.
물론 토끼 수인 전사들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냥 근접전 하자고 애원하고 있었지만, 태현은 못 본 척했다.
‘지금 바로 근접전은 위험해.’
사방에서 야만족 전사 놈들이 미쳐 날뛰는데 맨몸으로 저걸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가는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다.
아무리 초조하고 급하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한 번 흔들고 들어가야 했다.
[MP 회복 속도가 미친 듯이 증가합니다!]
[……]
[……]
-공포의 화신, 화술의 근원!
[공포의 화신이 됩니다. 모든 화술 스킬들의 쿨타임이 사라집니다!]
[화술의 근원을 시전했습니다. 모든 화술 스킬들의 MP 소모가 사라집니다.]
이제까지 아껴뒀단 스킬들과 아이템의 총동원.
태현도 아예 작정하고 쏟아붓고 있었다.
“<신성한>, <빛>!”
언령 마법을 시작으로, 기관총 같은 폭격이 시작되었다.
소나기처럼 쏟아붓기 시작한 빛의 줄기!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팍!
태현이 마법 스킬들은 적어도, 이제까지 올린 마법 스킬 레벨과 쌓은 칭호는 어딜 가지 않았다.
게다가 화술 스킬은 태현의 주력 스킬 중 하나 아닌가.
“<신성한>, <빛>, <몰아쳐라>!”
미쳐 날뛰던 야만족 전사들이 두들겨 맞고 나뒹굴었다.
공격을 개시한 태현은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길들여져라>!”
야만족 전사들이 끌고 온 괴수를 노린 공격!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 몇 배로 거대해지고 흉포해진 몬스터들은 전력 중 하나였다.
태현은 그 괴수들을 끌어들여서 상황을 흔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무모한… 어억??
악마 공작들은 괴수가 홀린 듯 언령에 당하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무리 언령 마법이 강력한 마법이라지만, 굶주린 혼돈이 불러낸 괴수들을 저렇게 길들인다고??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
[……]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아키서스 화신의 지팡이가 추가 보너스를 부여합니다!]
곳곳에서 넘어가기 시작한 괴수들이 난동을 부리며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야만족 전사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거대 괴수의 다리를 찍어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길들여져라>!”
[카르바노그가 괴수 없는데 어디에다가 하냐고 의아해합…]
[늑대 수인 부족 전사 백부장을 길들이는 데에 성공합니다!]
“<길들여져라>, <길들여져라>!!”
지팡이를 휘두르며 굶주린 혼돈에게 타락한 전사들을 다시 끌어오는 태현.
그 모습에 구시온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역시 아키서스 님이시다!
-지랄 말고 싸우기나 하지 못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