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3화
-속임수 아닐까요?
-속임수 같지는 않아. 인원도 그렇고.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고민해 봤지만, 길드 동맹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태현을 방해하려면 길드 동맹은 일단 정체를 숨기고 최대한 들키지 않게 치고 빠져야 했다.
태현이 이끄는 원정대는 지금 거의 어지간한 대형 길드들 뺨 때리는 수준으로 올라온 상태.
그에 비해 길드 동맹은 평원에서의 패배 이후로 반쯤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간부들 절반 넘게 로그아웃 당하고 스미스 쪽으로 붙은 이상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에 태현이 했던 것처럼 치고 빠지면서 게릴라식으로 싸워야 했는데 그냥 합류해 버리면 게릴라고 뭐고 없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긴 했다.
“그냥 따로 하면 되지 왜 굳이 김태현 선수에게 합류하려는 거지?”
“맞아. 수상한데.”
“퀘스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대체 뭘로 보는 거냐?”
슬슬 억울해진 길드 동맹 간부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솔직히 태현한테 얻어맞은 건 그들인데, 먼저 나서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칭찬이나 해줄 것이지 의심을 해?
“유성 게임단. 의심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로 퀘스트를 위해서 합류하는 거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제카스가 앞에 나섰다.
제카스의 얼굴을 아는 선수 몇 명이 놀라워했다.
“제카스잖아?”
“저 자식이 길드 동맹 놈들하고?”
“잘 생각해 보세요. 김태현하고 사이 안 좋으니까 뭉쳤을 듯.”
“으응. 보면 볼수록 수상한 놈들인데.”
‘아차.’
제카스는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본인이 나선다고 딱히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
간부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뭐지? 로그아웃하게?”
“…아니다! 이걸 봐라!”
간부는 다급하게 관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 있었다.
“누구더라 저게?”
“도동수! 도동수다. 김태현의 최대 원수이자 라이벌! 숙적이나 마찬가지인 놈! 그놈을 우리가 잡아 온 거다. 어때, 우리가 진심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겠냐?”
“???”
“라… 라이벌? 숙적?”
“그 정도였나?”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라이벌이면 최소한 이쪽에서 1승은 해야 라이벌이지, 도동수는 딱히 1승은 커녕 도망만 다녔던 거 같은데….
“판온 리그 한정해서인가?”
“판온 리그에서 도동수는 김태현 선수 만나지도 못했을걸? 후보 아니었나?”
“뭐지? 어느 부분에서 라이벌이란 거지?”
“도동수 저놈 중국 게임단 갔잖아. 거기서 자기가 김태현 라이벌이라고 하고 다닌 거 아니야?”
“야… 이거 지적했다가 쪽팔려서 도동수 게임 접는 거 아니냐?”
선수들이 수군거리자 간부는 더 절박해져서 이세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이세연 선수! 이세연 선수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예전에! 도동수가 그렇게 방해를 했는데!”
“…라이벌은 아니지.”
이세연은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도동수 같은 놈을 김태현 라이벌이라고 쳐주는 건 매우, 매우 불쾌했던 것이다.
이세연이 살짝 화가 난 걸 여전히 눈치 못 챈 길드 동맹 간부는 말을 이었다.
“라… 라이벌이 꼭 능력이 비슷해서 라이벌이 되는 건 아니죠! 서로 쌓인 앙금이 많고 관계가 있으면 라이벌 아니겠습니까!”
“…혹시 저게 진짜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세연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만약에 사람들이 ‘김태현 라이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을 했는데 이세연 대신 도동수가 나오면 좀 많이 화가 날 것 같았다.
스미스가 나와도 빡칠 텐데 도동수는 뭔….
“아니요.”
“미친놈이 아니면 그런 생각을 안 하죠.”
“도동수네 부모님도 그런 망상은 안 하실 듯.”
“…….”
“진짜 믿어달라니까요!”
이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알겠다. 믿어주면 되잖아.”
“!”
“어차피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게 뭐죠?”
이세연은 손가락으로 도동수를 가리켰다. 그걸 본 간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역시 도동수를 보고 믿어주신….”
“다들 관에 들어가. 헛짓거리 못 하게 포로 상태로 데리고 가야겠어.”
“…….”
“…….”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생각해 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세연도 한 성질 하는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 * *
“이다비 님! 명령을 어기고 이탈해서 도둑질하던 파티를 붙잡아왔습니다!”
“이다비 님! 지금 북쪽에 소형 요새를 짓는데 물자와 대장장이들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대장장이들을 내주면 공사가 늦어진다고 파티장들이 항의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다비 님! NPC들이 새로 찾아왔….”
마계 대회의를 진행시키려는 태현도 태현이지만, 다시 대륙으로 돌아와서 거대 원정대를 관리해야 하는 이다비 앞에도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다비는 산더미 같은 일이 몰려온다고 케인처럼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진 않았다.
“추방형에 처한 다음 한 번 더 잡히면 아키서스형에 처해.”
“서쪽에 폭탄 만들고 있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있을 거야. 무슨 소리를 하든 무시하고 붙잡아서 북쪽으로 데리고 가.”
“NPC들은 따로 편성해서 주변 순찰부터 맡겨!”
솔직히 파워 워리어 관리하던 것에 비하면 원정대 관리는 오히려 달달한 수준이었다.
물자도 인재도 없는 파워 워리어 vs 물자도 인재도 넘쳐나는 원정대!
‘빠르게 정리하고 관문 파괴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다비가 일처리를 잘한다고 해서 초조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번 퀘스트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굶주린 혼돈을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둘수록, 더욱더 대륙에서 강대해질 게 분명했다.
가능한 빠르게 관문들을 파괴하고 힘을 억제시켜야 한다!
‘이번 일들만 다 정리하고, 파티장들 모아서 무조건 관문 파괴부터 해야겠어. 더 끌었다가는 위험할지도 몰라.’
이다비가 그렇게 결심하는 사이, 원정대에는 새 얼굴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거대 오크 군세가.
동쪽에서는 거대 언데드 군세가.
둘 다 이다비가 예상하지 못한 지원군들이었다.
* * *
“솔직히 이 정도 끌고 왔으면 김태현 선수도 무릎 꿇고 고마워해야죠.”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둘 다 굶주린 혼돈 퀘스트 깨는 입장이니까.”
친한 동생인 김현아가 신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이세연은 품위 있게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이세연의 말이 맞았다.
서로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깨기 위해 협력하는 상황인데 누가 누구한테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였고, 사람의 마음은 원래 이성적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솔직히 이세연은 궁금했다.
이 언데드 대군세를 끌고 왔을 때 김태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전의 판온 1 때였다면 ‘이 정도 언데드 군세를 보면 김태현도 패배감을 느끼고 내 길드에 들어오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이세연은 이제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냥 김태현이 놀라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
옆에 있던 김현아가 그 속마음을 들었다면 ‘언니 뭔 초등학생이에요?’라고 했을 테지만, 다행히 이세연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은 채 표정을 냉정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흑마법사 그 자체였다.
‘그래도 생색은 조금 낼까… 아니… 생색을 내면 조금 없어 보일 것 같은데… 그래도 생색은 내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깊은 고민을 하는 사이,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어느새 원정대의 영역에 도착했다.
“!”
이세연은 멀리서 달려오는 이다비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했다.
팀 KL에서 가장 친한 선수가 있다면 바로 이다비였다.
같은 한국대표팀을 한 인연도 인연이지만, 원래 사람은 그런 것만으로는 빠르게 친해지지 않는 법.
그 이후로도 이세연은 이다비와 종종 따로 연락하면서 더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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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마운데… 그냥 알려줘도 괜찮은데…?
판온 정보를 공유하거나.
-김태현이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라고 보냈는데 혹시 팀 KL에 무슨 일 있어??
-저번에 방송에 안 나와서 보낸 거야.
-현아가 문자에 숨겨진 뜻이 있다는데, 정말 그런 게 있어?
-?_?
판온 말고 다른 정보를 공유하거나.
이다비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플레이 스타일 자체도 안정적이고 단단했지만, 그 외적인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솔직히 이세연은 이다비가 김태현 대신 각종 관리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너 저번에 CF 나간다고 했던 거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어떻게 됐었지… 이다비. 혹시 기억해?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었잖아요.
-참. 그랬지.
-…?
원래 팀에 저렇게 도맡아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잘 굴러갔다.
케인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팀이 금세 공중분해 되기 마련.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어… 와. 근데 저건 대체…?”
이세연이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한 이다비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판온 랭커라면 이세연이 끌고 온 언데드 군세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하물며 이다비라면야 더더욱.
“굶주린 혼돈을 깨기 위해 준비해 온 언데드 대군세지. 이제 걱정 안 해도 괜찮아. 그런데 김태현은 어디 있어?”
“응? 마계에 있는데….”
“…….”
당당하게 말하던 이세연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 * *
“아. 이거 너무 고마워하면 어쩌지? 엎드려서 절 받는 건 또 내 취향이 아닌데.”
김태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과대평가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전력은 정말 대단한 전력이 맞았으니까.
우르크 지역에 있는 오크들이란 오크들은 박박 긁어서 갖고 온 데다가, 미다스 길드의 랭커들도 (강제로) 합류시켜서 같이 오고 있었다.
솔직히 태현이 아무리 냉정한 불효자더라도 이런 지원을 보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리라.
“태현이 그 녀석도 형님의 깊은 애정을 느끼고 아주 감격할 겁니다.”
“한 십 년은 우려먹으시죠.”
“십 년이 뭡니까? 이십 년은 우려먹어야죠. 칠순 잔치 때도 써먹으세요.”
“나중에 효도 안 하면 이번 일을 언급하시면 효과가 제대로일 겁니다.”
오크 아저씨들은 그렇게 떠들며 원정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생각보다 전력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숫… 숫자가 그사이 늘었나?”
“몇 배도 아니라 몇십 배로 늘어난 거 같은데??”
뒤에 있는 언데드 대군세 때문에 정확한 규모 파악 자체가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인원이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제각각 분주하게 방향을 정해서 움직이고 있는 파티들!
김태산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 이번에 굶주린 혼돈을 도우러 온 최강지존무쌍 소속 길마네만….”
“아! 죄송합니다! 지금 진격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진격이라니?”
“굶주린 혼돈의 관문을 파괴하려고 전력을 나눠서 전진을 시작했거든요. 길마님께서도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야 물론이지.”
김태산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파워 워리어 길드원은 다행이라는 듯이 외쳤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금 전력이 제일 부족한 곳이… 서쪽이네요! 서쪽 관문들을 맡아주세요!”
[지도가 추가됩니다!]
“어… 알, 알겠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드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달려나갔다.
워낙 정신이 없고 주변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김태산 뒤에 어마어마한 오크 대군세가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
김태산도 살짝 시무룩해졌다.
엄청나게 추앙받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눈치채주지 못하는 건 그것대로 좀 서운했던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우리 길드 자랑 좀 할까요?”
“남의 방송 들어가서 우리 길드가 뭐하고 있다고 리플이라도 다는 건?”
“…부끄러우니까 절대 그러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