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0화
어지간하면 트집을 잡을 생각이었던 구시렉도 태현의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여기 있다고 말하라니.
만약 구시렉 본인이었어도 그 소식을 들었으면 무조건 달려왔을 것이다.
‘아키서스 후계자 놈 뒤지는 꼴을 살면서 또 언제 보겠냐!’ 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군.
“?”
-도착한 악마 공작들이 속았다고 따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생각이냐? 마계 대회의에 앞서서 공작들을 속여서 좋을 게 없다.
“난 속인 적이 없는데.”
-방금 말한 게 속인 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거냐?
구시렉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태현은 진지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있다고 했지 붙잡혀서 처형한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잖아.”
-….
구시렉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태현을 욕했다.
저 아키서스 새끼 진짜…!
* * *
-공작이! 공작이 온다!
-악마들이여! 두려워하라!
-살려줘! 공작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음악공 구시렉의 영지를 돌보고 있던 악마들은 비명을 지르며 두려워했다.
마력으로 불타는 차원문이 진동하며 열리고 있었다.
악마 공작이 온다!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주인들 중 하나인 만큼, 일개 악마들에게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구시렉의 명령으로 손님을 제대로 맞이해야 했던 것이다.
파앗!
[차원문 사이에서, 대검공 에다오르가 등장합니다!]
-대검공이 오셨다!
-만세! 대검공 만세! 미천한 악마들이 대검공을 뵙습니다!
악마들은 준비했던 해골들을 던지고 귀한 피들도 바닥에 뿌려가며 악마 공작을 환영했다.
대검공 에다오르라면 마계에서도 유명한 무투파.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가는 들고 있던 대검에 맞아 비명횡사할 수 있었다.
-…??
-????
넙죽 엎드려 있던 악마들은 당황했다.
차원문에서 나온 악마 공작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핼쑥했던 것이다.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중병에 걸려서 오래 앓은 것 같은 비쩍 마른 모습!
-…악마 공작 맞지?
-무… 무슨 일이야?
수근거리는 악마들.
원래라면 남의 영지였어도 에다오르는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대검을 빼앗기고 대륙에서 쫓겨난 에다오르는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져 있었다.
악마들이 수군거리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아키서스 놈… 아키서스 놈을 찾아야 해…. 내 대검을… 내 대검을 돌려받겠다…!
-….
-…이,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악마들은 당황했지만 일단 명령받은 대로 에다오르를 안내했다.
-대검공 전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있습니다!
-그래. 그래! 아키서스의 후계자를 내게 갖고 와라!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던 에다오르였지만, 아키서스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제정신이 든 것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키서스의 후계자를 아직 죽이진 않았겠지??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게 있다!
-예! 아주 쌩쌩하십니다!
-쌩쌩할 것까지는 없는데….
에다오르는 그렇게 말하며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리고는 멈췄다.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저기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쌩쌩하게!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나?
에다오르는 여기에 오고 나서부터 점점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왜 묶여 있지 않지? 풀려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 저기 있는 건 다른 교단 놈들 같은데? 같이 잡힌 건가? 아니. 같이 잡혀 있는데 왜 저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거지? 모험가 놈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고?
아까까지만 해도 광인 같았던 에다오르.
하지만 태현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지능이 올라가서 합리적인 지적을 하고 있었다.
그 질문을 받은 악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단체로 줄행랑쳤다.
-????
“에다오르! 오랜만이다!”
-…구시레에에에에에에엑!!!!
에다오르는 방금까지 중병 걸린 환자처럼 비실거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분노의 외침을 내질렀다.
-나를 속인 것이냐!! 아키서스 놈에게 넘어가서!!!!
활활 타오르는 에다오르의 눈빛을 마주한 구시렉은 놀랐다.
대륙에 갔다가 대검을 뺏기고 다 죽어가는 폐인이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언제 속였다는 거지?
-아키서스의 후계자 놈을 붙잡아서 마계에서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을 한다고 했지 않았나!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모두 황당해했다.
그런 말은 진짜 안 했어 새끼야!
-안 했다. 잘 생각해 봐라.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여기에 있다고만 했지.
-….
그제야 속았다는 걸 알게 된 에다오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구시렉. 말장난으로 날 불러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내 영역에서 감히 내게 덤비겠다는 거냐? 무기도 잃어버리고 힘도 약해진 네놈이?
구시렉이 피식 비웃었다. 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작들 비위 맞춰줘야 한다며….’
아까 ‘악마 공작들을 설득할 수 있겠냐?’라고 말해놓고서 자기 성질 못 이기고 저렇게 조롱 던지는 걸 보면, 구시렉도 괜히 악마 공작이 아니었다.
종족 자체가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종족!
-내가 무기도 잃어버렸고! 힘도 약해졌지만! 네놈 같은 거짓말쟁이의 혓바닥을 뽑을 힘은 남아 있다! 어디 한번 해보자!!
에다오르가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주먹을 들었다.
그 서슬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교단의 NPC들도 바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역시 사악한 악마 놈답게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잘됐다! 악마 공작 하나를 줄이면 그만큼 공기가 깨끗해질 테니!
마계 대회의도 대회의지만, 교단 소속의 주교들은 악마 공작을 잡을 기회가 있다면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좋다!
“에다오르.”
-?
“회의에 참석해서 나한테 협조한다면 네 대검을 돌려주겠다.”
-…!!
에다오르는 주먹을 들어 올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 * *
-굶주린 혼돈이 마계를 점령하려고 한다고? 그걸 막으려고 하고 있고?
-그렇다, 이 어리석은 놈아. 다른 공작들이 하지 않는 일을 이 내가 하고 있는 거다.
구시렉은 으스댔다. 에다오르는 구시렉은 무시하고 태현을 보며 수상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네놈이 막으려고 하지?
-….
그 질문에는 구시렉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라?
그러게…?
태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이상한 의심을 하는 거냐. 안 그래도 지금 대륙이 굶주린 혼돈한테 신음하고 있는데. 만약에 거기에 마계까지 들어간다면? 그걸 막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냐?”
태현의 속셈은 물론 악마들을 끌어들여서 전력을 늘리려는 거였지만, 그걸 굳이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말한다 하더라도 악마들이 ‘예! 아키서스 밑에서 일치단결해서 싸우겠습니다!’라고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지금 그런 대의를 위해서 소중한 보물까지 돌려주겠다고 한 건데, 그렇게 말하니 매우 마음이 아프군. 없던 일로 할까?”
-아… 아니다! 아니다. 진정해라, 아키서스. 생각해 보니, 이런 커다란 위기에서 나서는 게 실로 아키서스 같다.
에다오르는 마음이 급해서 없는 말까지 했다.
태현을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대검을 회수하는 일이었다.
대검이 없다면 에다오르는 대검공도 아니었다. 그냥 공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악마 공작들을 설득하는 걸 도와라, 에다오르.”
-흐음!
에다오르는 태현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굶주린 혼돈도 그렇고, 이번 일에 협조하는 건 해볼 만한 일이었다.
-좋다. 구시렉의 체면도 있으니, 이번만은 도와주도록 하지.
[카르바노그가 다 저런 식으로 발을 디뎠다가 늪에 빠지는 거라고 혀를 찹니다.]
모든 악마들은 아키서스와 계약할 때 ‘이번만은 좀 상황이 적절하니까 해봐야겠다! 평소라면 안 할 테지만 이번은 괜찮겠지?’라고 하며 계약을 하곤 했다.
다들 ‘난 다른 악마들과 달리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괜찮았던 악마는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악마 공작들의 설득은 하나도 되지 않았겠지. 우선 이 자리에 나타날, 지금 활동하고 있는 악마 공작들 중에 가장 까다로운 놈은 빙결공 푸르네우스다.
에다오르가 보기에 여러 악마 공작들 중 지금 활동하고 있는, 마계 대회의에 참석할 공작들만 설득하면 됐다.
여기 참가한 공작들이 뜻을 하나로 모은다면 마계는 거기에 따르게 될 테니까.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빙결공은 매우 까다로운 상대였다.
-근시안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성격이라 어떤 협조도 하지 않을 놈이지. 하지만 놈에게도 약점은 있다. 자기 성을 빼앗긴 탓에 매우 약해졌을 테니, 협박을 한다면….
쿵, 쿵-
-…?
말하던 에다오르는 고개를 돌렸다.
저 앞에서 냉기를 뿜어내며 푸르네우스가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진영으로 걸어간 푸르네우스는 악마들과 정령들을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앉았다.
안 그래도 강력한 악마 공작이, 진설의 조각을 3단계까지 열어버린 덕분에 살벌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물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에다오르는 기겁했다.
보는 순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몰려올 정도의 강함이라니?
-빙… 빙결공은 이미 와 있었나?
“그래. 빙결공 말고는?”
-포악공 아다드가 있지. 놈 또한 순순히 협조할 놈이 아니다.
‘으음.’
태현은 아다드의 이름을 듣자 입맛을 다셨다.
악마 공작, 아다드는 태현과도 악연이 깊었던 것이다.
예전에 푸르네우스의 영역에서 분탕을 칠 때도 아다드를 끌어들여서 이간계를 펼쳤고, 아다드의 부관인 갈그랄도 태현이 잡았고, 랄그갈도 태현이 잡았고….
심지어는 저번에 아다드의 부하 악마를 붙잡고 거짓말로 설득해서 아다드한테 독까지 먹이라고 명령했었다.
연락 없는 걸 보니 그건 실패한 게 분명했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었지만.’
하여간 이런 식으로 악연이 가득한 상황.
따지고 보면 에다오르나 푸르네우스보다 더 지독한 사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그냥 친한 악마 공작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조용히 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아키서스 놈. 아다드는 내가 잘 안다. 내게 맡겨주면 설득해 주겠다.
“!”
태현은 에다오르의 말에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다드는 내게 약점이 몇 개 잡혀 있지. 내 설득을 거절할 수는 없을 거다.
‘…믿고 싶어지면서도 불안해지는데.’
태현은 왜 에다오르의 모습이 익숙한지 깨달았다.
저 호언장담은….
케인을 닮았던 것이다.
‘저 새끼 저러고 나중에 못 하겠다고 하면 정말….’
[카르바노그가 대검 부러뜨려 버리라고 말합니다.]
일단 태현은 에다오르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포악공 아다드께서 도착하십니다!!
“!”
-왔군. 내가 가야겠다.
에다오르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차원문을 향해 걸어갔다.
에다오르를 그렇게 믿지 않는 태현은 당연히 그 뒤를 쫓았다. 교단 NPC들도 같이 데리고.
“악마 공작 놈 난동 치면 바로 공격할 준비 해라.”
-예!
그러는 사이 에다오르는 위풍당당하게 서서 양팔을 벌리고 외쳤다.
-어서 와라, 아다드. 네놈에게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 귀를 크게 열고 잘 듣도록 해라!
파아아앗!
차원문이 타오르더니 안에서 악마 공작이 나타났다.
“…??”
[???]
악마 공작은 맞았지만, 그건 아다드가 아니었다.
그건 태현이 아다드 암살하라고 마계로 돌려보냈던 굶주린 악마, 골라돈이었다.
-꿀. 환영에 감사한다. 꿀꿀.
“….”
태현은 경악했다.
…설마 암살에 성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