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06화
‘어… 토끼 부족은 좀… 약해야 하지 않나?’
태현은 머뭇거리며 카르바노그에게 물었다.
물론 이게 편견일 수도 있긴 하지만, 보통 토끼 하면 귀엽고 연약한 동물을 떠올리지 않나?
곰 수인족 전사들이 강한 건 곰 자체가 워낙 강한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전사들 자체가 레벨이 높은데 곰으로 변신까지 하면 얼마나 더 강해지겠는가.
그에 비해 토끼는….
‘변신해 봤자 약해질 것 같은데.’
[카르바노그가 화가 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토끼 부족 전사들을 피해서 허겁지겁 도망치는 수인족 부족들!
-곰 부족 놈들아! 네놈들 때문에 토끼 부족 놈들이 또 미쳐 날뛰잖냐! 이게 다 네놈들 때문이다!
-닥쳐라,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놈들이! 갈랄타가 깨어나면 네놈들 따위는… 크악!
말을 하던 곰 부족 전사 한 명이 또 쓰러졌다.
타오르는 붉은 눈을 가진 토끼 부족 전사가 달려들어서 베어버린 것이다.
‘…진짜 살벌한데?’
몬스터들도 살기가 있었다.
판온에서 구를 만큼 구른 랭커들은 스킬을 쓰지 않아도 상대의 모습이나 분위기에서 대충 견적을 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토끼 부족 전사들은….
‘미친 살인마 같은데….’
[…….]
태현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토끼 부족 전사들은 기다란 토끼 귀를 달고, 붉은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며 닥치는 대로 베어버리고 있었다.
-토끼 부족 놈들아! 우리 말을 들어다오! 우리 말을 들으면 이해할 거다! 지금 같이 힘을 합쳐서 곰 부족 전사들을… 크악!
-토끼 부족 놈들아! 잘 했다! 갈랄타야말로 우리를 굶주린 혼돈에게 이끌… 크악! 미친놈들아! 말 좀 들으라고!
대화나 협상 따위는 일체 거부하는,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
쌍검을 휘두르는 토끼 부족 전사들은 정말 무시무시 그 자체였다.
-틀렸어! 저렇게 된 이상 아무도 말릴 수 없다!
-토끼 놈들의 광기가 폭발했어! 두고 도망쳐라!
[수인족 부족들이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곰 부족 전사들이…]
[늑대 부족 전사들이…]
[……]
[……]
태현이 놀라워하는 사이 썰물처럼 도망치기 시작하는 수인족 전사들.
순식간에 태현 앞이 텅텅 비어버릴 정도로 재빠른 도주였다.
“…….”
-…….
[…카르바노그가 미리 사과합니다.]
자기들끼리만 남은 토끼 부족 전사들은 붉은 눈으로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용용이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이여. 내가 시선을 끌 테니 주인은 도망쳐라.
“…그럴 순 없지. 토끼 부족 전사들아! 나는 카르바노그의 뜻을 전하러 왔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카르바노그의 뜻을 이어받았습니다.]
[카르바노그 교단을 부활시켰습니다.]
[……]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되나?’
태현은 순간 기대했다.
메시지창들을 보니 제법….
[토끼 부족 전사들이 광기에 빠져 있습니다!]
[설득에 실패합니다!]
-목을 따버려!! 목을 따버려!!
-모두 목을 날려 버려!!
“젠장.”
태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무력충돌밖에 없었다.
토끼 부족 전사들이 행운을 뚫고 데미지를 줄 스킬을 갖고 있지 않기를 빌 수밖에.
쾅!!
…그러나 공격받은 건 태현이 아니었다.
태현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이런 미친 수인족 새끼들!!
급히 달려온 푸르네우스는 기습에 비명을 지르며 아이스 드래곤 위에서 떨어졌다.
그 위로 토끼 부족 전사들이 신이 나서 쌍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 * *
-아키서스 놈이 공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있군!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던 푸르네우스는 태현이 먼저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렇게 오해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속력을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수인족들이 무너지고 흩어지려고 하자 푸르네우스는 더더욱 초조해졌다.
아키서스 놈이 저렇게 나서서 희생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목적이 있다!
-저 전공을 핑계로 자신이 지휘권을 쥐려는 게 아닐까요?
-그럴듯하군. 누가 아키서스 아니랄까 봐 행동 하나하나가 비열하고 치밀한 놈이다!
푸르네우스는 당연히 그런 모습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태현이 원정대의 지휘권을 쥔 것 때문에 얼마나 일이 꼬이고 있던가.
악마들이 대륙의 종족들을 위해서 대신 희생해 주고 있는 상황이라니.
다른 악마들이 들었다면 배꼽을 잡고 웃었을 소리였다.
굶주린 혼돈과 이 거지 같은 상황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절대 없었을 텐데!
-속도를 올려라! 놈이 독차지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야겠다!
외침과 함께 푸르네우스는 아이스 드래곤을 몰고 뛰어들었다.
아키서스를 매우 싫어하는 푸르네우스였지만, 아키서스의 능력까지 부정하진 않았다.
아키서스 놈이 저렇게 먼저 달려들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어서가 분명했다.
순식간에 흩어져서 도망치는 수인족들을 보자 푸르네우스는 더욱더 확신에 찼다.
-냉기여, 몰아쳐라! 도망치는 적들을….
쾅!!
그리고 푸르네우스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토끼 부족 전사가 <목에 점선 긋기>를 사용합니다!]
[급소가 지정됩니다. 급소에 대한 방어력이 급격하게 내려갑니다!]
[토끼 부족 전사가 <절명>을 사용합니다!]
[급소를 공격당합니다!]
“…….”
옆에서 보고 있던 태현은 기겁했다.
푸르네우스가 아무리 연이은 싸움으로 지쳤다지만, 여기는 마계고 푸르네우스는 악마 공작이었다.
그런데 토끼 부족 전사들은 쌍검을 휘두르며 집요하게 푸르네우스의 목을 썰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오히려 푸르네우스가 밀리고 있다!
[카르바노그가 주먹을 불끈 쥡니다.]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니야, 카르바노그!’
태현 입장에서는 저 미쳐 날뛰는 토끼 부족 전사들이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 광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어렵군. 선택을 해야 하는데.’
태현이야 진지한 고민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지만 푸르네우스는 아니었다.
진지하게 위기에 몰린 푸르네우스는 이를 악물고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진설(眞雪)의 세 번째 조각>을 사용합니다!]
[냉기의 진정한 주인이 찾아옵니다!]
[냉기의 핵이 점점 더 깨어납니다!]
‘아니. 저놈 미쳤나?’
태현은 황당해했다.
푸르네우스가 갖고 있는 아이템, 진설의 조각.
이건 평범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마계 깊숙한 곳의 냉기를 모아 놓은 냉기의 핵.
그 냉기의 핵을 봉인하고 있는 조각!
저 조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냉기의 핵을 감싼 봉인도 풀리게 되어 있었다.
태현도 퀘스트를 받아서 알고 있는 만큼, 푸르네우스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세 번째 조각까지 쓰고 있었다.
미쳤나?
[카르바노그가 그만큼 몰린 것 같다고 말합니다.]
‘…<냉기의 핵> 퀘스트. 진지하게 해볼 만한가?’
태현은 순간 고민했다.
저번에 푸르네우스가 진설의 조각을 썼을 때, 태현에게는 퀘스트가 떴었다.
<진설의 조각-냉기의 핵 퀘스트>
사악한 악마, 빙결공 푸르네우스는 마계 깊숙한 곳의 냉기를 손에 넣은 것으로 지금의 악마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설의 조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냉기의 핵을 감싸고 있던 봉인은 풀리기 마련.
냉기의 핵을 감싼 봉인을 해방시켜라!
그렇게 한다면 냉기의 핵은 당신에게 감사해하리라.
보상: ?, ???
지금 냉기의 핵은 태현이 갖고 있는 하늘성 중앙에 위치했기에 뜬 퀘스트.
하지만 태현은 이 퀘스트를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지금 해야 할 퀘스트들이 산더미인데, 저런 식의 가능성 희박한 퀘스트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푸르네우스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진설의 조각을 팍팍 써서 봉인을 풀어줄 리도 없었고….
그런데 지금 세 번째 조각까지 쓴 걸 보니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의외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째 조각까지 있는지는 몰라도, 세 번째 조각 정도면 꽤 많이 왔다. 몇 번만 더 자극하면….’
-안 도와주나??
뒤늦게 도착한 구시렉이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보며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태현은 변명했다.
“악마 공작이 저렇게 싸우는데 내가 괜히 사이에 끼었다가 방해만 될 것 같아서.”
-…….
구시렉은 눈빛으로 ‘뭔 개소리를 하고 있냐?’를 말했다.
아까 갈랄타를 팰 때는 그렇게 신나게 패놓고…?
-아키서스. 네놈의 속셈이 뭔지는 짐작하고 있다.
“!”
태현은 움찔했다.
역시 구시렉도 악마 공작.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에 태현의 속셈을 눈치채다니….
-푸르네우스 저놈도 우리에 집어넣어서 가두고 싶겠지.
“…….”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용납할 수 없다.
헛다리를 짚은 것도 모르고, 구시렉은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마계 대회의를 진행하려면 푸르네우스 놈이 미워도 필요했다.
악마 공작들은 기본적으로 더럽게 말을 안 듣는 놈들이라, 굶주린 혼돈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들어도 ‘왜지? 왜 내가 협력해야 하지??’ 같은 소리를 하는 새끼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뜻이 통하는 악마 공작이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두 번째로 더 이상 아키서스 놈한테 강한 악마를 넘겨줄 수 없었다.
진지하게 걱정이 되는 수준!
구시렉은 태현이 굶주린 혼돈을 토벌하고 나서, 붙잡은 악마들을 이용해 마계까지 정복하려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을 하고 있었다.
과한 의심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아키서스는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후. 들켰군. 구시렉. 용케 알아챘는데.”
태현은 괜히 부정해서 구시렉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정하는 것을 택했다.
구시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교활하다지만 여긴 마계고 내 영지지.
“알겠다. 푸르네우스는 포기하도록 하지. 대신 저 수인족들을 설득하고 싶은데.”
-…정신이 나간 것이냐??
구시렉은 말을 하다 말고 기겁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지금 저 토끼 부족 전사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악마들도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려면 강한 전사들이 더 필요하다. 구시렉.”
-으음… 저자들의 광기를 몰아내기 위해 노래를 연주해 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노래는 함부로 쓸 수 없는 귀한 노래인데….
“부탁한다. 구시렉. 푸르네우스도 포기했잖나.”
아키서스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자 구시렉은 매우 만족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좋다. 그렇게 말한다니 한 번 내가 놈들의 정신을 깨워보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해라. 야만족들의 정신은 맑아져봤자 달라질 것 없다는 것을….
쾅!!
-!!
말하던 구시렉은 깜짝 놀랐다.
자기 앞에 거대한 빙창(氷槍)이 날아와서 꽂혔다.
고개를 들자 진설의 조각을 3단계나 사용한 덕분에 압도적인 냉기를 흩뿌리는 푸르네우스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혼자서 토끼 부족 전사들을 얼려 버리고 공격에서 벗어난 것이다.
-도움 안 되는 쓰레기 같은 놈들…!
진설의 조각을 3단계까지 사용한 푸르네우스는 구시렉도 압도할 정도의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구시렉은 무심코 긴장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푸르네우스 놈이 무슨 짓을 해서 저렇게 강해진 건지는 몰라도, 아키서스와 연합한다면 쉽게 움직이지 못할 터.
-아키서스.
“음.”
태현은 구시렉의 뜻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푸르네우스에게 외쳤다.
“내가 잘못했다! 푸르네우스! 너야말로 최강의 악마다!”
-?????
견제하랬더니 갑자기 고개 숙이고 아첨하는 태현의 모습에, 구시렉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