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03화
고대 곰 부족의 대전사, 갈랄타는 사납게 소리치며 지휘를 내렸다.
-봐라! 굶주린 혼돈의 힘이 있다면 저 악마 따위도 별 것 아니다!
판온의 야만부족들은 언제나 힘을 숭상하고 약자를 경멸해 왔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굶주린 혼돈과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굶주린 혼돈이 본격적인 진군을 개시하기 시작할 때, 야만부족들이 우르르 넘어간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춥디추운 판온의 오지에서 지내던 고대 곰 부족은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대륙을 짓밟을 생각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놈의 하찮은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주술사들은 더욱더 힘을 사용해라! 내가 놈의 목을 따겠다!
갈랄타의 오만함이 구시렉을 정말 제대로 열받게 만든 모양이었다.
가능한 힘을 아끼고 상대하려던 구시렉은 더 이상 참는 것을 포기했다.
-보자 보자 하니 아주 끝을 모르고 까부는구나!
[음악공, 구시렉이 분노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마계의 분노가 휘몰아칩니다!]
귀를 찢는 강렬한 선율과 함께 주변을 지진처럼 뒤흔드는 노래!
주술사의 주술로 보호받고 있는 전사들도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렬한 공격이었다.
-하룻강아지도 안 되는 놈들. 여기서 모두 묻어버리겠다!
-전사들, 변신해라!
[굶주린 혼돈의 야만전사들이 곰의 힘을 끌어냅니다!]
[굶주린 혼돈의 곰 부족 전사들이 변신합니다!]
“?!”
보고 있던 태현은 깜짝 놀랐다.
‘곰 부족 전사들이었나?!’
그냥 야만전사들이 아니라 곰 부족 전사들이었다니.
태현은 이미 곰 부족들과 악연이 있었다.
예전 노드란체가 따뜻해졌을 때, 얼음 속에서 봉인되어 있던 고대 곰 부족 전사들이 녹아 나와서 덤벼들었던 것이다.
고대 제국을 뒤흔들었던 만큼 곰 부족들을 비롯한 수인족 전사들은 무식한 힘을 자랑했다.
그때도 정말 힘들게 다시 봉인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게다가 굶주린 혼돈의 힘까지 받아서 말이지!’
“공격 개시! 더 내버려 뒀다가는 안 되겠다!”
콰르르르르릉!
태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아키서스 포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잔뜩 쟁여 놓은 포탄들이 날아가고 드워프들과 거인들의 고함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재장전! 재장전!
-이 악마 놈들아! 마력을 더 짜내지 못할까!
-폭탄을 더 갖고 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키서스 포병대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아키서스 성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더니 방진을 짜고 <고대 제국 유탄 머스킷>을 조준했다.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살벌한 일제사격이 날아갔다. 포병대를 노리고 달려들던 곰 부족 전사 몇몇이 뒤로 밀려날 정도로.
‘대단하다!’
‘이 정도였어!?’
같이 온 골짜기 랭커들부터 플레이어들도 깜짝 놀랄 정도의 위력이었다.
물론 아키서스 포병대의 폭딜이 강하다는 건 어지간한 플레이어들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키서스 포병대는 딱 봐도 약점이 명확했다.
그 무거운 대포들에, 악마들 들어 있는 감옥수레에, 폭탄까지 꾸역꾸역 짊어지고 다니다 보니 움직임이 느리고 근접전에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태현도 아키서스 포병대를 꺼낼 때는 상황과 장소를 봐가면서 꺼냈던 거였고.
그런데 아키서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단단하게 방벽을 치고 둘러싸자 마치 요새라도 된 것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면 약점이 사라진 수준이었다.
쓸 만한 NPC들 하나 키우는 데 얼마 드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 저 아키서스 포병대를 비롯한 아키서스 교단 전력은 정말 갈고닦은 최정예가 맞았다.
‘아니, 김태현은 현질도 안 했을 텐데 저걸 어떻게 키운 거지?’
‘교단에 들어온 수입을 전부 다 돌린 거 아니야?’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수가 있나?’
“우리도 들어간다! 움직여!”
“딜러들 손이 놀고 있다!!”
NPC들의 활약에 각 파티들도 자극을 받았는지, 파티장들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골짜기 소속 랭커들부터 시작해서 추가로 합류한 랭커들까지.
각자 파티별로 나눠지며 곰 부족 전사들을 막을 방진을 짰다.
태현은 가장 앞으로 달려가면서 길드 동맹 출신 파티들에게 외쳤다.
“곰 부족 전사 놈들 돌격력이 장난이 아니다! 탱킹 가능한 플레이어들 있으면 탱커로 전환시키고 무조건 수비적으로 붙어!”
“김태현. 우리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니냐!?”
길드 동맹 출신 파티장 중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아무리 그들이 굴러 들어온 돌이라지만 저건 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 지금 랭커 포함한 25명의 파티가 방진을 짜고 있는데 곰 부족 전사 두셋을 못 막으면 그건 판온 자격이 없었다.
“이 새끼들은 배려해 줘도 난리냐? 하라는 대로 해!”
“아, 아니… 그렇다고 화를 낼 건 없잖아….”
태현이 벌컥 화를 내자 파티장은 움찔했다.
많이 부드러워졌다지만 김태현은 여전히 김태현이었던 것이다. 화를 내면 솔직히 무서웠다.
[굶주린 혼돈의 곰 부족 전사가 야수의 돌진을 사용합니다!]
“막아!”
길드 동맹 출신 파티장은 그렇게 외치며 창을 들었다.
<야수의 돌진>은 레벨 낮은 짐승 계열 몬스터들이 쓰는 돌진 스킬이었다.
그렇게 강한 스킬이 아닌 만큼 탱커들이 발만 묶으면 바로 딜을….
“커허허허헉!”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을…]
순식간에 탱커들을 튕겨내고 진입해서 파티장을 박살 내는 곰 부족 전사!
곰 부족 전사는 굶주린 혼돈의 힘을 줄줄 풍기며 파티장을 두들겨 팼다.
옆에 있던 길드원들이 기겁해서 곰 부족 전사를 공격했지만 놈은 파티장을 놔주지 않았다.
“파티장님!!”
“진, 진짜 로그아웃을 당했다고?! 한 번에??”
“탱커들 방어 굳혀! 공격한다고 나서지 마!”
예상하지 못했던 피해가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파티들이 깝치지 않고 방어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딜 넣으려고 하지 마! 딜은 뒤에서 넣어준다!”
“무조건 시간만 끌어!”
[베레타르바 교단의 축복이…]
[타이란 교단이 당신에게…]
[데메르 교단의 기도가…]
[……]
[……]
‘이건 막았다.’
태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무시무시하긴 해도, 아군 전력도 정말 작정하고 뽑은 정예인 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랭커들이 여럿 끼어있는 데다가 각 교단 대주교들이 작정하고 버프를 걸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버티기만 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덤벼라! 모험가 놈들아! 덤비란 말이다!
곰 부족 전사들은 짜증 난다는 듯이 외치면서 무기를 휘둘렀지만, 플레이어들은 방패만 내세우며 어떻게든 버텼다.
딜은 뒤에 있는 원거리 직업들과 아키서스 포병대들이 넣어주면 충분했다.
뒤에는 나타난 태현 쪽 원정대.
앞에는 분노한 구시렉과 부하.
흐름이 안 좋게 흘러가자 갈랄타는 그걸 예민하게 잡아낸 뒤 외쳤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놈의 목을 따겠다!
그 외침에 구시렉은 솔직히 안도했다.
저놈이 대장 같은데, 저놈이 아키서스 놈을 상대하겠다고 뒤로 빠진다면 구시렉은 훨씬 쉽게 남은 야만족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빨리 빠져라!
-가자! 친위대 전사들아! 악마 공작의 목을 따러!
-아니!!
구시렉은 분노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 뒤에 아키서스 교황이 있고, 앞에 악마 공작이 있으면, 무조건 아키서스 교황을 먼저 쳐야 하지 않는가?
백이면 백 다 아키서스 교황을 공격할 텐데….
-무식한 야만족 놈들아! 너희는 저 뒤에 있는 자가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냐!
-악마 놈이 말이 많다!
[대전사 갈랄타가 굶주린 혼돈의 힘을 빌려 공간을 이동합니다!]
갈랄타는 친위대 전사들을 이끌고 구시렉 앞으로 이동했다.
구시렉은 피리를 꺼내더니 강하게 소리를 폭발시켰다.
꽈과과과광!
-크아아아악!
-캬아악!
[음악공 구시렉이 소리를…]
[음율이 사납게 적들을 찢어발깁니다!]
친위대 전사들이 절반 넘게 나뒹굴었지만, 갈랄타는 무기를 앞장세우며 버텼다.
-죽어라, 악마 놈아!
음악 스킬을 주로 사용하는 구시렉은 전형적인 원거리 타입.
갈랄타가 가까이 붙으면 구시렉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안….
“구시렉, 도우러 왔다!”
-!!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크악!
갈랄타는 등판에서 화끈하게 터지는 폭딜에 고개를 돌렸다.
강력한 신성력을 풍겨내는 모험가 한 놈과, 다른 악마 공작 한 놈이 이쪽에 덤벼들고 있었다.
-비겁한 약자 놈들이 손을 잡고 덤비는구나! 어디 한번 덤벼봐라!
-닥쳐라, 야만족 놈아! 비록 내가 지금 아키서스와 손을 잡고 있다고 하지만 네놈에게 모욕당할 정도는 아니다!
푸르네우스는 대뜸 냉기의 창을 찔러 들어갔다.
갈랄타는 피하는 대신 가슴팍에 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
쩌저저적!
갈랄타의 가슴팍이 지독한 냉기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빙결공의 냉기가 대전사 갈랄타를…]
[굶주린 혼돈이 갈랄타의 패기를 칭찬합니다!]
-으핫핫핫!
냉기의 창을 타고 굶주린 혼돈의 힘이 폭발적으로 솟구치더니 푸르네우스의 한쪽 팔을 그대로 휘감았다.
-!!!
-악마 놈아! 내 공격도 맞아봐라!
꽝!!
갈랄타는 무식하게 푸르네우스를 붙잡은 뒤 후려갈겼다. 각진 대검에서 살벌한 소리가 나며 푸르네우스를 가격했다.
-크아아악!
-하하하!
-크악!
-하하하하하!
-크윽… 아니, 잠깐, 아키서스 놈아! 뭐하는 거냐!! 안 돕고!
간신히 피하고 흘려보내고 얼음으로 막아내던 푸르네우스는 짜증이 폭발해서 외쳤다.
같이 와놓고 뭐하는 거란 말인가.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음악공, 구시렉이 당신에게 전사의 선율을 선사합니다.]
[음악공, 구시렉이 당신에게 위풍당당한 행진곡을…]
[……]
[……]
[카르바노그가 구시렉이 너무 노래 많이 해주는 거 아니냐고 의아해합니다.]
[버프가 중첩됩니다!]
[버프가 <아키서스를 위한 옛 찬양의 노래>로 바뀝니다!]
“!”
행운의 일격 스택을 쌓아 올리면서 어떻게든 폭딜을 넣으려던 태현은 메시지창에 멈칫했다.
‘뭔 노래지 저거?’
[카르바노그가 옛날에 마계 악마들이 아키서스와 손 잡았을 때 지어준 노래 아니냐고…]
‘…….’
그런 것도 지어줬었나?
갑자기 배신당한 악마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키서스 놈아!!
“아, 간다니까!”
팟!
준비를 끝낸 태현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노리는 것은 행운을 영구적으로 소모해서 적에게 강렬한 일격을 날리는, <아키서스의 세 번째 공격>!
[<아키서스를 위한 옛 찬양의 노래>가 당신의 앞길을 인도합니다.]
[마계에 떠도는 기운이 당신의 팔에 깃듭니다.]
[스탯이 일시적으로 크게 상승합니다!]
[데미지가 일시적으로 크게…]
[아키서스 권능 관련 스킬들이…]
[……]
[치명타가 터집니다!!!]
꽝!!!!!
갈랄타는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으며 옆으로 날아갔다.
아까 푸르네우스의 공격도 받아내면서 난타전으로 유도했을 만큼 맷집에 자신이 있었던 갈랄타였지만….
방금 공격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아찔했던 것이다.
[현재 검술 스킬로 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검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최고급 검술 스킬 레벨이 오릅니다!]
[아키서스 검법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됩니다!]
[아키서스의 다섯 번째 공격을 얻습니다!]
아키서스의 다섯 번째 공격.
저번에 강제로 한 번 쓴 적 있는 만큼 어떤 스킬인지는 태현도 알고 있었다.
마검 깃들게 하는 광기의 공격 스킬!
‘하지만 그것보다 최고급 검술 스킬 레벨을 올린 게 더 기쁘군!’
상대가 강한 만큼 검술 스킬이 평소보다 더 많이 오른 게 분명했다.
[광기의 폭발 검법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됩니다!]
[폭발 누적을 얻습니다!]
<폭발 누적>
일어나는 폭발을 칼날에 누적시킵니다. 무기의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합니다.
‘그래. 최고급 검술 4에 만족하자.’
태현은 못 본 척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