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01화
“전… 전화하면 실례가 될 수 있잖아.”
“그런가?”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세연이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김태현 정도면 전화한다고 실례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짜 실례야?”
“그…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공범인 이다비도 살짝 말을 더듬었다.
둘의 반응에 케인은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내가 전화했던 게 계속 실례였나??
‘하연이가 착해서 받아준 거지, 사실 속으로는 싫어하고 있었을지도…!’
* * *
스튜디오 안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스태프들도 그걸 눈치채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지?”
“원래 분위기가 이랬나?”
원래 플레이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으면 스튜디오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시끄러울 때가 많았다.
정식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들도, 평소에 판온에서 자주 만나던 플레이어들을 보면 긴장이 풀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이다.
실제로 그게 배장욱 같은 PD가 노리는 효과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무슨 시험장 같은 비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왔다!”
“진짜 팀 KL이야…!”
자리에 앉아 있던 플레이어들은 웅성거리면서 앞을 쳐다보았다.
팀 KL 선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에 뉴스에서, 기사에서 그렇게 자주 봤는데도 실제로 보는 건 역시 그 아우라가 달랐다.
세계 최상위권의 왕좌에 앉아 있는 선수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감!
“저기 김태현 선수다!”
“이다비 선수하고 뭘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심각한 표정인 거 보니까 아마 굶주린 혼돈 퀘스트 관련해서 상의하고 있는 게 분명해.”
“정말 대단하다. 이런 자리에서도 퀘스트를 고민하다니….”
“난 아직 멀었어.”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름 랭커들에, 유명한 플레이어들인 만큼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불평을 하거나 트집을 잡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다 분위기에 압도되어버린 상황.
이쯤이면 선수들이 모인 게 아니라 팬미팅이라고 봐야 했다.
“P… PD님. 선수들 왜 저럽니까?”
“…일단 내버려 둬봐. 억지로 뭘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다비. 내가 지금 생각해 봤는데 아까 그렇게까지 문자를 고민할 필요 없이 전화했으면 됐던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에요.
태현과 이다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케인도 그에 못지않게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지금 차이기 직전에 놓여 있는 것인가?
“야. 말 걸어봐.”
“싫, 싫어. 네가 말 걸어봐.”
“말 걸었다가 욕 먹으면 어떡해.”
“김태현이 미친놈이냐?! 욕을 왜 해!”
“판온 1에서는 그랬다잖아. 네가 해보던가.”
“그때는 누가 자리 뺏으려고 시비 걸었다잖아.”
“그러니까 네가 해봐.”
“….싫, 싫어. 욕 먹으면 어떡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선수 중 한 명이 꿀꺽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김태현 선수!!”
“?”
“여쭤볼 게 있습니다!”
“어… 여쭤보세요.”
태현은 상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희는 성 밖을 점령한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기 위해 성벽을 올리고 성 안팎에 농장과 과수원, 방앗간들을 짓고 있습니다.”
“아. 팀 두마리보쌈인가요?”
“네!! 맞습니다!”
이다비의 질문에 말을 꺼낸 선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설마 이다비 선수가 2부 리그에도 있지 못한 게임단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솔직히 게임단의 실력으로 유명한 게 아니라 게임단을 후원하는 프랜차이즈 때문에 좀 더 유명한 게임단이기도 했고….
“팀 두마리보쌈 퀘스트 진행하고 있는 거 잘 보고 있어요. 굶주린 혼돈 저항 퀘스트에 참가해 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무슨…!”
“그런데 조금 지적을 해도 괜찮다면,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건….”
“…뺏길 가능성이 높아서 좀 그렇긴 합니다.”
태현이 이다비의 말을 받았다. 둘은 서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굶주린 혼돈이 필드에 장막 깔고 안 보이게 만들어서 착각하기 쉽지만, 놈들의 정찰병이 꾸준히 필드를 돌아다니는 편입니다. 안 보인다고 방심하면 꼭 한 번씩 나타납니다. 지금은 중요한 목표물만 노리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외부에 이것저것 지으면 나중에 약탈당하고 피눈물 흘리실 겁니다.”
태현의 말에 팀 두마리보쌈 선수들은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퀘스트 진행 방향을 듣자마자 취약점을 바로 알아맞히다니.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그렇게 밖에 짓지 말라고 했는데 밖에 지었다가 몇 개 날려 먹었거든요.”
“내가 진짜 살아 움직이는 폭탄으로 쓰려다가 말았지.”
“썼어야 했다니까요.”
“레벨이 낮아서 그다지 효과가….”
선수들은 둘 사이에 오가는 흉흉한 대화는 못 들은 척했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밖에 있는 시설을 다 박살 내는 게 나을 겁니다.”
“…….”
“…….”
선수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역시 누가 기계공학의 아버지 아니랄까 봐…!
그러나 태현은 진지했다.
“어차피 성벽 밖에 시설 둬봤자 점령당하거나 약탈만 당할 텐데, 그냥 부수고 자재나 아이템이라도 다 챙겨서 갖고 오는 게 낫지 않아요?”
“그… 그렇긴 한데요… 이게 밖의 시설 지은 게 게임단 돈이기도 해서….”
“게임단한테 허락을 받으면?”
“허락을 해줄까요?”
“음. 확실히 운영비 관련해서 나가면 게임단 쪽에서는 안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게임단한테 홍보가 되면 어느 정도 허락을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한 번 허락을 받아보시죠.”
“도… 도와주신다고요?”
태현의 말에 선수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팀 KL 선수들이 이렇게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만약 여기 두마리보쌈 관계자들이 있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내보낸 방송에서 저런 기회를 물어올 줄이야!
다른 게임단 선수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근데 시설들 부수는 거에서 어떻게 홍보를 하죠?”
“폭탄 터뜨리면 게임단 로고가 위에 나오게 해줄 수는 있는데….”
“그… 그걸 좋아할까요?”
“그건 생각해 봐야지.”
태현과 이다비가 소곤거리자, 두마리보쌈 선수 중 한 명이 다시 용기를 내서 케인에게 물었다.
“케인 선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
“…결국에는 다 죽어서 한 줌의 먼지가 되겠지.”
“…….”
“…….”
태현과 이다비는 경악해서 케인을 쳐다보았다.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최상윤과 정수혁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말렸어야 했는데!’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남은 건 절망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생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굶주린 혼돈 퀘스트에 참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수혁이 재빨리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최상윤은 케인의 옆구리를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세게 찔렀다.
“솔직히, 굶주린 혼돈 퀘스트가 어떻게 끝이 날지는 저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굶주린 혼돈 쪽으로 판온이 굴러가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한테는 그렇게 즐겁지 않은 상황이 될 거라는 겁니다.”
“…!”
정수혁의 진심 어린 말은 선수들에게 진정성 있게 와닿았다.
확실히 그랬다.
지금까지는 레벨이 높든, 레벨이 낮든 각자 원하는 걸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길드 동맹처럼 빡세게 관리를 하는 곳도 있었지만 플레이어들은 원하지 않으면 다른 왕국으로 갈 수 있었다. 잘츠 왕국 빼고.
제작을 하고 싶으면 제작을.
탐험을 하고 싶으면 탐험을.
교역을 하고 싶으면 교역을.
하지만 굶주린 혼돈이 승리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추측은 가능했다.
굶주린 혼돈의 대륙은 길드 동맹보다 더한 통제국가가 될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하지 못하고 강제 퀘스트만 해야 하는 끔찍한 곳!
“맞습니다! 자기만 좋자고 굶주린 혼돈으로 갈아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팬들에 대한 배신 아닙니까!”
솔직히 여기서 몇몇 선수들은 굶주린 혼돈 쪽으로 갈아탈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저항 퀘스트는 난이도가 높고, 진행은 안 되고, 굶주린 혼돈 쪽으로 갈아탄 친구는 잘나가고….
그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든 유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정수혁의 뜨거운 외침을 들으니 그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우리가 실력이 없지 가오가 없냐!
“굶주린 혼돈을 타도하자!”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자!”
“스미스는 배신자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됐냐?’
태현은 갑자기 뜨거워진 스튜디오의 분위기에 살짝 당황했다.
정수혁이 원래 저렇게 선동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태현하고 같이 다니다 보니….
“무,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들어온 사회자는 자기가 없는데도 알아서 굴러가고 있는 스튜디오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보통 자기가 시작하지 않으면 잘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데, 선수들이 알아서 뜨겁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피, 피디님. 뭡니까?”
“지금 한창 재밌으니까 조금 지나고 들어가게.”
“?!”
* * *
“언니. 문자 왔는데요.”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중요한 문자면요?”
“광고 문자겠지. 중요한 거면 전화로 올 거야. 자. 캡슐 들어가자.”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 선수들부터 예비 선수들까지.
유성 게임단은 철저하게 정보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관리하며 힘을 모으고 있었다.
다른 게임단이었다면 판온 리그가 연기된 것에 초조해하며 어떻게든 좀 공개하라고 재촉했을 수도 있었다.
게임단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홍보가 되지 않고 묻혀버리는 건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유성 게임단은 달랐다.
회장이 직접 ‘선수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라고 명령이 내려왔는데, 단장이나 운영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간섭할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다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세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이세연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까지 그러기는 힘들었다.
유성 게임단의 선수들은 전원 일치단결해서 이세연의 퀘스트를 도운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선수들도 전원 랭커인데, 자신의 퀘스트를 내버려 두고 이세연의 퀘스트 돕다니.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다.
-굶주린 혼돈하고 싸워서 이기려면, 이세연 선수의 퀘스트를 더 진행해야 한다!
전설 직업 네크로노미콘의 후계자를 가진 이세연.
그런 이세연의 직업 퀘스트를 진행시켜서 각종 스킬들을 강화한 다음, 그 힘으로 굶주린 혼돈을 깨겠다!
“아닙니다. 주장!”
“저희는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선수들은 진심을 담아서 외쳤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지금 확신에 가득 찬 상태였다.
이제까지 그들이 개인 방송도 전부 참고, 이세연의 퀘스트를 도우면서 불만이 없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주장에 대한 철저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돌아오고 있었다.
지평선을 가득 채운 언데드 군대.
원래라면 모래로 가득 찬 사막이 지금은 언데드로 꽉 차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언데드를 한 명이 전부 소환했다고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스미스. 게 섰거라! 우리가 간다!”
“야. 불길하게 왜 하필 게 섰거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