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00화
“아니, 원래 여러분들의 주 활동 지역은 우르크 지역이었잖습니까….”
유럽 선수들도 여기 오크 플레이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오스턴 왕국에서도 더 동쪽으로 가면 드넓은 산맥과 황무지로 가득 찬 우르크 지역이 나왔다.
넓기는 더럽게 넓은데, 땅이 척박하고 황량해서 뭐 얻을 것도 별로 없고, 시설도 거의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대륙 왕국들이 왜 탐을 안 내는지 납득이 가는 똥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김태산 같은 플레이어들은 나름대로 (어마어마한 현질과 함께) 오크들과 힘을 합쳐 우르크 지역을 이것저것 개척해서 제법 사람 사는 동네처럼 만들어 놓은 상태.
오죽하면 오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김태산에게 <마을을 심은 사람> 상 같은 걸 만들어서 줬겠는가.
그만큼 우르크 지역 개척기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근데 그걸 두고 왜 오스턴 왕국에….
“굶주린 혼돈이 쳐들어와서 우르크 지역이 망했어.”
“…그, 그렇습니까?”
“정말 안 됐군요….”
선수들은 너무 솔직담백한 대답에 당황했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대답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오스턴 왕국에 와서 둥지를 좀 틀어야겠다. 겸사겸사 굶주린 혼돈한테 복수도 좀 하고.”
“…….”
“…….”
유럽 선수들은 서로 쳐다보며 지금 이 황당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꺼지라고 하면 되지 않나?
-뒤에 오크들 숫자가 안 보이는 건가? 지금 저 오크들이 우리 공격 안 할 거란 보장이라도 있어?
-…….
굶주린 혼돈만 적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굶주린 혼돈과 같이 맞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다.
당장 방금도 서로 내분이 나서 갈라질 뻔하지 않았던가!
가만히 듣고 있던 브리그스가 순간 꾀를 냈다.
“잠깐. 오스턴 왕국을 점령하고 싶다면 정령의 탑보다 먼저 공략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
“지금 김태현 선수가 오스턴 왕국 관련 NPC들 모으면서 각종 퀘스트 진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견제하지 않으면 오스턴 왕국을 다 점령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스미스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지요!”
브리그스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저번에 월드컵에서 개망신을 당한 복수도 좀 하고, 여기서 오크들도 치우고….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
“…….”
“??”
브리그스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황당한 눈빛으로 브리그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뭔데?”
“미친놈아… 김태현 선수 아버지가 저 사람이잖아….”
“그게 전략이냐? 그게 전략이야?”
다른 선수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개소리만 골라서 할 수 있단 말인가.
뒤늦게 깨달은 브리그스가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김태산이 입을 열었다.
“그거 정말 참 좋은 생각이다.”
“!!”
의외의 반응에 브리그스는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브리그스는 주변을 보며 외쳤다.
“거 봐라! 원래 말 안 듣고 게임만 하는 불효자식들은 언제나 못마땅하기 마련이다!”
‘브리그스 저놈 부모님이 브리그스 게임하는 걸 싫어하시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김태현 선수를 먼저 견제해서 오스턴 왕국의 꿀땅을 점령하고 나면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야, 미안한데 그냥 해준 말이야. 미친놈아.”
“??!”
브리그스는 고개를 들었다.
김태산과 오크 아저씨들이 한심한 표정으로 브리그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땅에 욕심이 멀어도 그렇지 지금 태현이가 굶주린 혼돈 퀘스트 깨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뒤통수를 칠 거 같냐?”
“형님이 그러실 분으로 보이냐? 형님이 소싯적에는 남의 길드에 스파이 넣어서 길드 와해시키고 남의 길드들이 정모하려는 가게에 먼저 예약 걸어서 방해하는 짓도 하셨지만 자기 자식 하는 일까지 그렇게 방해하실 분은 아니야!”
“…필요한 말만 해라….”
김태산은 아저씨들의 말에 울컥했다.
지금 보는 눈이 몇 개인데 할 소리 못할 소리 구분을….
“우리는 그냥 오스턴 왕국 영지 몇 개 얻어서 영주 정도만 할 거다. 태현이가 퀘스트 다 깨고 오스턴 왕국 국왕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
“아… 그러십니까.”
브리그스는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방금 너 불효자식 뭐라고 하지 않았냐?”
“…….”
* * *
굶주린 혼돈 퀘스트로 인한 판온 리그 중단.
판온 열풍을 타고 야심 차게 시작한 게임단들에게는 매우 가혹한 시련이었다.
경기 한 번 할 때마다 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는데 리그가 멈추다니!
게다가 리그만 멈춘 게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 퀘스트 때문에 많은 것들이 멈췄다.
당장 도시 안에만 있는 제작 직업들도 재료가 부족해져서 허덕이고 있었고, 전투 직업들도 평소라면 퀘스트 깨러 나갔을 텐데 나가지도 못하고 갇혀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상황.
“…….”
“…그래서 지금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요?”
“해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팀 KL 선수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배장욱 PD한테 ‘다른 게임단들을 위해 꼭 한 번 출연해 주시죠’란 부탁을 받고, ‘그래 다들 리그 중단도 되었겠다 한 번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라고 생각해서 태현은 선수들을 데리고 방송국으로 나갔다.
예전이었다면 거절했겠지만, 태현도 나름 선수로서 책임감이 조금 생긴 것이다.
다른 게임단 선수들을 도울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돕고 싶다!
그런데 돌아온 기획은 예상을 뛰어넘은 기획이었다.
“피디님. 케인… 아니, 저희가 해설 능력을 떠나서 그렇게 말이 능숙한 편이 아니거든요.”
‘방금 내 이름만 따로 부르려고 하지 않았나?’
“해설도 전문 해설자가 맡아서 하는 이유가 있는데 저희가 괜히 맡았다가는 분위기만 깨뜨릴 것 같은데….”
“제가 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말을 했군요. 물론 전문적인 해설을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진행을 맡으신 분은 당연히 따로 있고, 팀 KL 선수들은 소감 정도만 말해준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여러 게임단들이 퀘스트에 도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들 굶주린 혼돈 퀘스트가 어떻게 굴러갈지 궁금해하고 있고, 또 아직 전력을 숨기고 있는 게임단도 있는 게 사실이잖습니까.”
“오… 그런 거라면….”
케인이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정수혁과 최상윤이 동시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불안했던 것이다.
‘작가들 벌써 케인만 쳐다보고 있네.’
‘저번에 들었는데, 방송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케인 선수라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가능성 높지 않겠냐?’
PD나 작가들 입장에서는 예뻐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수들은 혹시 괜히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조심조심하는데, 케인은 그냥 자기 생각을 시원하게 말하는 것이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저희도 퀘스트 진행하는데, 저희 건 말 안 하고 해설만 해도 되는 겁니까?”
최상윤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말에 PD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어째서죠?”
“어차피 여러분들 퀘스트는 너무 진행이 많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할 수가 없어요. 같이 비교했다가는 방송 재미없어집니다.”
“…….”
“…….”
* * *
“어? 이세연이 없어?”
“이세연 씨 왜 없어요?”
“두 분… 이세연 선수는 팀 KL 선수가 아닌데요….”
스태프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태현과 이다비가 이세연 찾는 게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누가 보면 이세연이 팀 KL 선수일 줄 알 것!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저는 당연히 이세연이 있을 줄 알았는데요.”
‘역시….’
스태프는 흐뭇한 시선을 보냈다.
방송국 안에서 김태현과 이세연에 관한 소문이 몇 번 돈 적이 있었다.
서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선수들이고, 워낙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뭔가 있지 않겠냐는 소문이었다.
태현은 그 시선을 보고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지금 제가 이세연 선수 어디 있나 찾았다고 이상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 아, 아, 아닌데요?”
‘했군.’
‘한 거 맞네요.’
태현과 이다비는 한심하다는 듯이 스태프를 쳐다보았다.
케인과 상대방이 하는 짓이 비슷했던 것이다.
속마음을 들킨 스태프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제가 듣기로는, 유성 게임단이 지금 뭔가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방송도 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스태프의 추리는 그럴듯했다.
다른 게임단들이 뭐라도 하고 있는 와중에 유성 게임단 정도 되는 게임단이 조용히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밖에 공개하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퀘스트!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태현은 이세연한테 먼저 연락해서 떠볼까 싶어졌다.
원래라면 먼저 연락할 일이 없긴 했지만, 이번 굶주린 혼돈 퀘스트는 워낙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세연이 갖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얻고 싶었다.
“혹시 이다비. 이세연 번호 아니?”
“…태현 님. 설마 이세연 씨 번호 없는 건 아니죠?”
이다비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없을… 아. 저번에 저장해놨구나. 방송 끝나고 물어봐야겠다. 으음. 뭐라고 보내야 하지?”
“저한테 물으셔도… 으음. 이건 어떨까요?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라고.”
“좀 수상쩍어 보이지 않나?”
“…태현 님은… 별로 수상쩍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다비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태현과 이세연이 지금 처음 만나는 사람도 아니고 월드컵도 같이 하고 이것저것 열심히 같이 했는데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소리를?
“그래도 이세연이 의심할 수 있잖아.”
“판온이 아니라 현실에서 의심하고 안 나가면 그건 이세연 씨가 아니라 케인인데….”
이다비가 중얼거리는 걸 못 들은 척 하고, 태현은 말했다.
“이렇게 해야겠다.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 절대 수상한 제안이 아니야.’라고.”
“…태현 님. 제가 사회생활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건 말려야 할 거 같아요.”
이다비는 태현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었다. 태현은 살짝 억울해졌다.
절대 수상한 제안이 아니라고 강조를 했는데 어째서…?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 그 다음에 이모티콘을 넣어보죠. 덜 수상해질 거예요.”
“>_< 같은?”
“>_<도 좋고… 제 경험상, 여러 특수문자를 잘 활용하면 좀 괜찮아졌어요.”
“오오….”
“자. 이런 식으로…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 >_<’”
완성한 이다비는 잠시 냉정을 되찾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문자를 전부 지워버렸다.
“?!”
“제가 잠깐 미쳤었던 거 같아요.”
“괜찮지 않았나?”
“아무리 이세연 씨여도 그런 문자 보면 의심을 할걸요. 그냥 담백하게 가죠! 이세연 씨는 오해하지 않을 거예요.”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로 만나지 않을래?
“이렇게 보내죠.”
“그래. 이다비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비는 바로 버튼을 눌렀다.
둘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교환됐다. 서로 고생한 것이다.
저벅저벅-
옆에서 지나가던 케인이 둘을 보고서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둘이 뭐해?”
“이세연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지.”
“전화하면 되잖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