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99화
-저거 도미닉이야? 이번에 새로 파리 라이트닝에서 영입했다더니 진짜 나온 건가??
-와, 도미닉을 여기서 보게 되네.
도미닉.
에랑스 왕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마법사 랭커였다.
본인부터가 마법사 길드의 길마인 데다가 휘하 길드원들의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에랑스 왕국 쪽 길드들이 영지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영지전에 뛰어들었다면 훨씬 더 유명했을 것이다.
실제로 도미닉을 아는 마법사 플레이어들은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미셸에, 베르트랑에….
-어? 저건 독일 선수들 아니야?
-독일 선수들도 같이 참가했나 본데?
-저건 조너선인데? 조너선도 있으면 영국 선수들도 온 거 아니야?
-유럽 선수들 다 모인 거야??
새 랭커들을 선수로 영입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유럽 쪽 게임단들 여럿이 힘을 합쳤다.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깨기 위해 작정을 했다는 게 누가 봐도 느껴졌다.
“도미닉. 오랜만이다.”
“친한 척하지 마라.”
“맞아. 브리그스. 16강 탈락한 놈아.”
“…….”
브리그스는 영국대표팀까지 나갔던 선수였지만, 다른 나라 선수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애초에 판온 리그에서 그렇게 서로 라이벌로 다퉜는데 선수들 간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하나 때문이었다.
돈!
-이번에 파리 라이트닝, 런던 파이레츠, 베를린 도펠죌트너 선수들이 모여서 같이 퀘스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예? 왜 그런 놈들하고… 저번에 저희 한 번 이겼다고 얼마나 조롱을 해댔습니까?
-단독으로 퀘스트 진행이 힘든 상황이라면서? 각자 길드원들을 합쳐도 힘들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금 준비를….
-더 준비하다가는 퀘스트 자체가 끝나버릴 수도 있어. 지금 다른 게임단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다른 게임단 입장에서는 김태현부터 스미스까지 온갖 주목이란 주목을 다 긁어모으는 현상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는 도중에 참가해도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밀려나는 수가 생겼다.
…결국 사이도 좋지 않은 게임단의 선수들이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
-유럽 쪽 선수들은 다들 친한가 봐.
-저거 봐. 다들 웃으면서 악수하고 있어. 사이좋은 게 보기 좋은걸?
-아시아 쪽 선수들은 저런 거 없어? 한국하고 중국 선수들도 사실 경기 때만 치열하게 싸우고 경기 끝나면 친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선 넘지 마라.
도미닉은 자리에 모인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여러 게임단에서 모인 선수들은 물론이고, 그 선수들이 끌고 온 친한 플레이어들이나 길드원들까지.
이 정도면 확실히 퀘스트를 진행해 볼 전력이 됐다.
“그러면 각자 움직이자. 다들 알고 있겠지만, 정령의 탑은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한다.”
“잠깐. 도미닉.”
“?”
직업 <원혼을 다루는 검사>를 갖고 있는 브리그스가 도미닉의 말에 끼어들었다.
“주변부터 공략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지금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강렬하게 한 방 보여주는 게 좋지 않겠냐?”
“…어쩌자는 거지?”
“바로 정령의 탑으로 들어가자고. 괜히 주변에서 지루하게 사냥만 하면서 시간 끌어봤자 묻히기만 할걸.”
“…….”
도미닉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브리그스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 굶주린 혼돈 퀘스트 선두주자들이 너무 잘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스미스는 이제까지 쌓아 놓은 이미지를 버리고 굶주린 혼돈 쪽으로 갈아탔지만,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 쪽으로 갈아탄 플레이어들 중 스미스만큼 잘나가는 플레이어들은 없었기에 사람들은 좋든 싫든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맞서고 있는 김태현도 캐릭터가 확실했다.
아탈리 왕국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저항군을 만든 다음 길드 동맹이나 미다스 길드원들까지 받아가면서 점점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거기에 고대 제국 관련 퀘스트까지 추가한 상황.
여기서 깨작거리면 그대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각자 의견을 들어보자. 주변 토벌부터 해야 한다는 사람? 아니면 정령의 탑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결과는 3:7 정도.
게임단에서 압박을 받은 것도 있었고, 선수들도 사람인만큼 이번 퀘스트에서 제대로 얼굴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것도 있었다.
도미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바로 정령의 탑으로 들어가자고. 이 정도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겠지.”
오스턴 왕국 정령의 탑.
미다스 길드가 점령한 왕국 서부 지역에 위치한 유명한 건축물로, 미다스 길드의 자랑 중 하나였다.
정령의 탑은 각종 강력한 버프는 물론이고 특히 마법사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버프들이 몇 개 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굶주린 혼돈의 세력한테 점령당한 상황.
에랑스 왕국 쪽에서 출발한 선수들이 이 정령의 탑을 1차 목표로 삼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삐이이이익-!
“돌격 개시!! 정령의 탑으로 가자!”
* * *
[굶주린 혼돈의 힘이 저주를 내립니다.]
[마법 시전에 실패합니다!]
‘큰일 났다!’
도미닉은 오랜만에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정령의 탑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마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건, 굶주린 혼돈이 마법에 대비해서 각종 저주를 흩뿌려놓았다는 것!
아마 미다스 길드 때문에 그런 것 같았지만 피해는 여기 선수들이 보게 되었다.
특히 도미닉 같은 마법사 랭커들은 몇 배로 치명적이었다. 마법을 쓸 때마다 시전 실패가 뜬다니.
[타락한 정령이 덤벼듭니다!]
-선수들이 생각보다 이상한데?
-왜 저렇게 못하지?
-쩔쩔매는 것 같은데….
보고 있던 사람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웅성거렸다.
처음에는 ‘아, 힘을 아끼고 있나 봐!’ 하던 사람들도 이제 슬슬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쯤이면 그냥 못하는 거 아닌가?
-지금 탑 1층도 돌파 못하고 있는데 실력 부족 아닌가?
-김태현은 잘 깨던데 여기는 왜 못 깸? 같은 연봉 받는데?
-같은 연봉 받았다고 승수도 똑같진 않잖아.
그러나 선수들은 지금 사람들이 떠드는 걸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타락한 정령들이 날뛰는 사이, 탑 주변에 흩어져 있던 몬스터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타락한 슬라임이 울부짖습니다!]
[타락한 소형 골렘이 달려듭니다!]
[……]
평소에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들도 굶주린 혼돈 때문에 몇 배로 강해진 상황.
유럽 선수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곳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다! 탈출해야 해!”
“지금 탈출하자고? 그게 얼마나 망신일지 생각은 해봤냐?!”
“그러면 여기서 죽겠다고? 그건 더 망신이지!”
“그만 싸워, 정신 나간 놈들아!”
“어쨌든 난 탈출해야겠다. 너희들이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같이 죽을 생각은 없거든!”
브리그스의 말에 몇몇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미닉은 거기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잠깐만… 너야 검사니까 뚫고 도망칠 수 있겠지. 마법사들은 어떻게?”
“…도망은 각자 쳐야지.”
브리그스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다른 마법사 플레이어들은 분노했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하여간 영국 놈들은!”
“자기 목숨은 자기가 알아서 챙기는 거 모르나! 이제 와서 뭘!”
“야, 이 멍청한 놈들아. 카메라 신경 써! 방송 나가고 있다고!”
비교적 나이 있는 독일 선수가 일행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말다툼은 벌어진 뒤였다.
지금 이걸 보고 있는 게임단 관계자들은 뒷목을 붙잡고 있었다.
-오우. 흥미진진한데….
-그래! 이렇게 싸워야 대형 레이드지! 원래 대형 레이드는 이런 정치질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이야.
-솔직히 김태현이 진행하는 레이드는 너무 순한 맛이라 이런 자극적인 게 없었달까?
-이해해. 나도 김태현이 진행하는 걸 보면서 너무 훈훈해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지.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김태현처럼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폭풍처럼 레이드를 진행하는 선수가 있다면, 이렇게 오합지졸스럽게 서로 물고 뜯는 레이드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그리고 세상에는 후자를 보면서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싸움구경은 재밌다!
…물론 그게 게임단 이미지에는 좀 안 좋긴 하겠지만….
-브리그스 저놈, 괜히 김태현 도발했다가 시궁창에 빠진 개처럼 두들겨 맞았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 사람이 가볍다니까.
-이게 왜 브리그스 잘못입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산 사람은 살 거면 왜 같이 파티를 했는데? 도움받을 때는 파티고 지 불리해지면 각자 살기임?
-영국놈들이 뭐 그렇죠. 괜히 유럽연합에서 나간다고 하겠어요.
-지금 그게 왜 나와!?
선수들이 다투는 사이에도 점점 포위망은 두꺼워지고 있었다.
다투던 선수들도 그걸 깨닫고 멈칫할 정도로.
“지금 다툴 때가 아니다!”
“그래. 난 먼저 가보겠다!”
브리그스는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뒤에서 프랑스 선수들이 브리그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때 오크들이 나타났다.
“???”
처음에 선수들은 잘못 본 줄 알았다.
저 멀리서 파도처럼 몰려오는 녹색 물결.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오크들이 아니라 뭔가 다른 몬스터인 줄 알 정도였다.
크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오크들의 함성이 증폭됩니다!]
[……]
[……]
“뭐, 뭐야??”
“대체 뭔….”
“정령의 탑은 우리들의 것이다!!”
오크 플레이어들부터 오크 NPC들까지, 자리에 모인 오크들이 총공격을 시도했다.
굶주린 혼돈에게 지배당한 몬스터들은 급히 오크들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워낙 숫자 차이가 났다.
수십 수백 마리를 잡아도 그냥 밀고 들어오는 오크들!
게다가 오크들은 단순무식하게 들이박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배치된 오크 플레이어들이 오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태현처럼 최고급 전술 스킬을 찍지는 못했어도, 중급에서 고급까지 전술 스킬을 찍은 오크 플레이어들!
최강지존무쌍 길드 소속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전술 스킬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도 오크들을 많이 데리고 돌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밀어내고 있다!’
선수들은 경악했다.
처음에는 오크들이 좀 밀리나 했더니, 뚝심 있게 버티다가 오히려 상대를 포위해서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화살 쏴! 계속 쏴!”
“데미지 안 들어가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많이 패서 잡으면 돼!”
오크들은 신나게 쓸어버리고 정령의 탑 주변을 장악했다.
그 앞에 있던 김태산은 도끼를 탁탁 털며 다가왔다.
“고… 고맙습니다.”
선수들은 김태산이 그들을 도와주러 온 팬인 줄 알고 인사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까지 해서 도와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뭘 별 걸 다… 그런데 요즘 같은 상황에 돌아다니는 걸 보니, 혹시 태현이가 이끄는 원정대 소속인가?”
김태산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필드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흔치 않았다.
태현이 오스턴 왕국을 수복하기 위해 원정대를 끌고 올라왔으니, 거기 소속 랭커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아닙니다.”
“아니야?”
“저희는 파리 라이트닝과 런던 파이레츠… 아니, 잠깐, 저희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모르는데.”
“혹시 판온 리그를 안 보십니까?”
“나는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팬이라서.”
2부 리그 팀을 말하는 김태산의 모습에, 선수들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1부 리그는 혹시….”
“팀 KL하고 유성 게임단 정도밖에 몰라.”
선수들의 표정은 더욱 시무룩하게 변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자. 그러면 다들 잘 가게나.”
“예?”
“뭐가 ‘예’인가? 우리도 여기 정령의 탑을 점령하려고 온 건데.”
“…….”
선수들은 그제야 슬슬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