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97화
그렇게 뜻이 통한 태현과 이다비였지만, 악마들이 그걸 듣고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러면 마계는 우리 악마들이 지키겠습니다’라고 흔쾌히 수락하진 않았다.
-관문을 파괴해야 한다!!
요새가 지어지는 걸 흐뭇하게 감시하고 있던 빙결공은 온몸에서 냉기를 풀풀 풍기며 달려왔다.
“아니 무슨 소리야? 지금은 지켜야 할 때라면서?”
태현은 시치미를 뚝 뗐다.
생각해 보니 빙결공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은 만만치 않은 적.
지금 좀 성공했다고 방심하면 금세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해자를 파고 성벽을 세워서 방어를 준비할 때!
-…이 아키서스 놈! 네놈은 알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을 이유가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푸르네우스?”
“지금 그쪽 요구 들어주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요!”
태현과 이다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관문을 파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날 그렇게 모욕하다니. 슬프기 그지없군. 하긴 악마들이 뭐 그렇지.”
“태현 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쓰레기 같은 연기는 작작해라! 지금 당장 관문으로 전진해야 한다. 내가 직접 선봉에 서겠다.
푸르네우스는 태현의 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런 연기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이제까지 당한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서 불리한 역할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관문으로 전진할 수밖에!
이 정도면 저 아키서스 놈도 분명히 납득을 해주겠….
“준비가 안 되어서 좀.”
“굶주린 혼돈이 너무 강해서 지금 멋대로 전진하기는 좀.”
-…….
둘의 반응에 푸르네우스는 빙결공이 아니라 화염공이 될 뻔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분노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내가 선봉에 서서 앞장서주겠다고 말했는데도… 지금… 딴청을 피우는 거냐?
“어허. 악마 공작. 자기가 선봉에 서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선봉은 결국 누구든 맡게 되어 있는 위치일 뿐이라구요.”
아키서스가 한 명일 때도 짜증이었는데 두 명이서 주고받으니 그 짜증은 몇 배로 늘어났다.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걸 말해봐라.
“지금 내가 설마 원하는 게 있어서 일부러 관문을 공격 안 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런 모욕을… 하지만 굳이 원하는 걸 물어보니 대답은 해주지. 난 네가 명령을 좀 제대로 들어줬으면 좋겠어.”
-무슨 같잖은… 이제까지 네놈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더냐?
푸르네우스는 분노했다.
묵은 원한을 잊고 이제까지 같이 해줬더니 저 뻔뻔한 소리라니.
“그랬나? 안 들은 것도 꽤 많고 매번 투덜거렸던 기억만 나는데.”
-네놈의 명령이 불공평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끔 좀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
-…….
푸르네우스는 마음 같아서는 창을 뽑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저 아키서스 샊… 아니, 아키서스 놈을 설득해서 관문으로 전진해야 했으니까.
-네놈의 명령이… 지나치게… 까드득… 이상하지만 않다면 들어주도록 하지. 맹세하겠다.
“으음. 엄청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니 고맙군.”
-그러면 이제 움직여도 되겠지?
“그런데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
푸르네우스는 이번 굶주린 혼돈의 습격을 막아내고 나면, 자신의 칭호가 빙결공에서 인내공으로 바뀌지 않을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 * *
“아,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야. 너 잘 한다.”
“원서를 직접 사서 읽었지.”
-…….
악마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플레이어들을 쳐다보았다.
골짜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방망이 깎던 노인’은 필수교양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아이템을 빨리 만들어달라고 하면?
-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누군가 가격을 깎아 달라고 하면?
-아이템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시우.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장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필수교양서!
물론 요즘은 해외 플레이어들도 알 거 다 알아서 ‘그거 우리도 읽어서 안 속거든 한국 놈아’ 하며 반응했지만, 악마들은 당하는 게 처음이었다.
-지금 빨리 따라오라고 주인님께서….
“아, 끓을 만큼 끓어야….”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모험가 놈들아. 빨리 오지 못하나!
악마 전령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빙결공의 뒤를 쫓아서 쭉쭉 따라와 줘야 하는데, 플레이어들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
물론 태현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관문 파괴는 우리가 서두를 필요 없다. 시간 끌면 악마들이 알아서 파괴할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느긋하게 따라가자고.
-최선을 다해서 게으름을 부리겠습니다!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플레이어들은 시간을 끌면 악마들이 알아서 관문을 파괴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악마들은 설마 굶주린 혼돈을 막기 위해 모인 영웅이란 놈들이 저런 치졸한 수법을 쓰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채 답답해했다.
[굶주린 혼돈의 기운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굶주린 혼돈의 군세가 이동합니다!]
“!”
느긋하게 따라가던 플레이어들은 움찔했다.
메시지창과 함께, 지평선 너머에서 수많은 굶주린 혼돈의 군대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움직이는 자들.
설마 그들이 오는 걸 깨닫고 매복해 있었던 걸까?
“튀어도 되나?”
“악마들이니까 튀어도 되지 않나? 악마들이 알아서 잘 싸우라고 하고….”
악마들은 플레이어들의 흉흉한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당, 당장 아키서스를 불러와라!
푸르네우스는 경악해서 외쳤다.
지금 저 굶주린 혼돈의 군세는 대륙을 불태우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저놈들은 졸렌 시 앞 평원에 설치된 마계 관문을 통해 마계로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완성된 마계 관문.
푸르네우스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관문을 내버려 두면 마계의 순진무구한 악마들이 굶주린 혼돈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공격해야 한다! 무슨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관문을 파괴해야 한단 말이다!
“아. 왜 바쁜 사람을 자꾸 부르는 거냐?”
태현은 귀찮은 목소리로 뒤에서 달려왔다.
이다비하고 아이템 제작하면서 느긋하게 오고 있었는데 빙결공이 재촉을 하는 바람에 멈춰야 했던 것이다.
성가신 놈 같으니!
-지금 상황을 봐라! 심각하다!
푸르네우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분명히 아키서스라면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으리라.
“그렇군. 음… 정말 위험한 상황이군.”
-바로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근데 이게 우리가 아직 준비가 안 끝나서….”
-…….
푸르네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아키서스 놈은 끝까지 발목을 잡으리라는 것을!
‘아키서스 놈을 믿은 내가 정신이 나갔었구나!’
푸르네우스는 깊이 반성했다.
수많은 선조 악마들이 ‘아키서스 놈하고 엮이지 마라’라고 경고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엮인 탓에 이 꼴이 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저 모험가 놈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 반드시 지원해라!
“그래! 나만 믿어라!”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냉기의 장막을 시전합니다.]
[장막 아래에서 공작의 군대가 나타납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냉기의 권속들을 소환합니다!]
[……]
[……]
쩌저저적!
공기가 얼어붙고 곳곳에서 얼음으로 된 괴수들과 악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푸르네우스를 따르고 있던 악마들의 숫자를 훌쩍 뛰어넘는 부하 숫자!
‘저런 걸 숨기고 있었나!?’
태현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악마 공작인 만큼 이것저것 숨겨진 스킬들이 많은 건 예측하고 있었지만, 지금 건 아예 예상도 하지 못한 스킬이었다.
더 소름 돋는 건 이제까지 꽤 많이 싸웠음에도 저런 스킬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괜히 악마 공작이 아니군.’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상대가 불리하다고 해서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악마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종족이었다.
-악마다! 악마들이 나타났다!
-감히 악마 놈들이 어디서! 굶주린 혼돈의 위엄에 무릎 꿇어라 악마 놈들!
완성된 관문을 지키고 있던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은 깜짝 놀라서 움직였다.
관문을 통해 마계로 넘어가고 있던 전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옆으로 돌아섰다.
-쥐새끼처럼 대륙을 더럽히는 악마 놈들!
-네놈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굶주린 혼돈의 야만전사들이 전투함성을 시전합니다!]
[……]
[……]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얼어붙은 폭풍을 풀어놓습니다!]
[냉기의 권속들이 더욱더…]
두 세력은 관문 앞에서 격돌했다.
아쉬운 게 많은 푸르네우스는 저번처럼 힘을 아끼거나 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냉기를 불러오며 상대를 찢어발겼다.
얼음의 창이 날아갈 때마다 굶주린 혼돈의 야만전사들이 쩍쩍 얼어붙고 박살이 났다.
-저 악마 놈을 포위해라!
-하찮은 악마 주제에 제법이구나!
-감히 마계의 악마 공작에게 그렇게 지껄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러나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푸르네우스와 냉기의 권속들을 둘러싸고 물량으로 밀어붙였다.
동료가 살벌한 냉기에 얼어붙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밟고 덤비는 난폭함!
푸르네우스도 고전할 정도로 사납고 야만스러운 자들이었다.
-파괴되어라, 관문아!
그래도 푸르네우스는 어떻게든 관문 앞까지 뚫고 도착했다.
도착한 푸르네우스는 전력을 다해 관문을 공격했다.
[굶주린 혼돈의 마계 관문이 파괴됩니다!]
와작와작-
“이야. 푸르네우스 잘하는데?”
“그러게요. 저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네요.”
태현과 플레이어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안 도와줘도 푸르네우스가 알아서 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확장됩니다.]
[접근을 주의하십시오! 마계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
푸르네우스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관문을 파괴했는데도 마계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남아 있다니.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야만부족의 주술사가 통쾌한 표정으로 외쳤다.
-늦었다, 악마 놈아! 관문이 완성된 이상 여기서 마계로 가는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굶주린 혼돈께서 직접 길을 고정시켰으니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
콰지직!
푸르네우스는 분노해서 주변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태현에게 퀘스트창이 날아왔다.
<아키서스의 영원한 친구-아키서스의 화신 퀘스트>
마계의 악마들은 전통적으로 아키서스의 쓸 만한 체스말 역할을 해왔었다.
지금 그 악마들이 굶주린 혼돈에게 위협받고 있다.
굶주린 혼돈이 그 사악한 손아귀를 마계에 펼치기 전에, 당신이 먼저 건너가 악마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보상: ?, ???, ?????
‘…뭔 미친 퀘스트냐 이게??’
태현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고대 제국의 후계자로서 세력을 모아라→이건 이해할 수 있었다.
고대 제국의 후계자로서 굶주린 혼돈을 막아라→이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키서스의 화신으로서 마계의 악마들을 끌어 모아라→…이건 뭐하자는 퀘스트지 대체??
[카르바노그가 굶주린 혼돈한테 뺏길 바에는 아키서스가 지배하는 게 악마들에게도 더 나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말에 동의했다.
…물론 악마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