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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1593화 (1,592/1,826)

§ 나는 될놈이다 1593화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태현은 딱히 스킬을 쓴 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폭탄도 꺼내지 않고 손만 든 상황.

정말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한데?’라고 누군가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태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며 ‘같이 죽자’라고 하는 순간, 선수들은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김태현 자폭한다!!

-안 돼!! 조금만 더 버텨!!

-근데 자폭하면 어디까지 날아갈지 좀 보고 싶지 않음?

-너 이 새끼 골짜기 대장장이냐?

-아…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보고 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믿었다.

김태현이 자폭할 거라고.

판온에서 손꼽히는 기계공학 장인에, 이제까지 온갖 폭탄을 만들어 온 사람 아닌가.

분명히 자폭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팟-

“…….”

“…….”

아무 말도 없이 등 돌린 다음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태현의 모습에, 모여 있던 선수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김태현!!! 김태현!!! 네가 그러고도 김태현이냐!?”

“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르는 거야. 쪽팔리게.”

“김태현! 진짜 이렇게 졸렬하게 나오기냐!!”

선수들이 울부짖었지만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럿이서 한 명 조지려는 놈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긴 것 아닌가.

그리고 태현은 원래 저런 놈들 상대할 때 일일이 대꾸해 주지 않았다. 괜히 피곤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절대 놓치지 마!!”

“내가 로그아웃당하는 한이 있어도 저놈은 진짜 잡는다!”

이제는 ‘놓쳤지만 잘 싸웠다’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모인 선수들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 * *

중앙 평야 산장 뒤편, 뉴욕 라이온즈 소속 재자언.

보라색 숲 깊은 곳, 뉴욕 라이온즈 소속 알레리.

퇴색한 광산 동굴, 보스턴 타이거즈 소속 도그.

작은 갈림길 요새, 텍사스 카우보이즈 소속 노리버.

……

……

……

어디서 누가 튀어나올지 예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가능한 모든 곳에서 선수들이 튀어나왔다.

거리가 많이 벌어진 만큼 여기서 놓치면 태현이 그대로 빠져나가는 게 확정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이 자식들 왜 이렇게 열심히 싸우지?’

게다가 아까 개망신을 당한 덕분에 선수들은 몸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이대로 끝나면 진짜 개망신인 것이다.

[<초승달의 두 번째 검>이 시전됩니다!]

[검이 갑옷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관통하는 그림자 창>이 시전됩니다!]

[……]

[……]

-아키서스의 비전 방어, 아키서스의 광역 결계!

태현은 아키서스 화신의 갑옷에 잠들어 있는 스킬을 터뜨리며 공격을 막아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진 않았다.

-에랑스 왕가의 신성한 회복, 살라비안의 폭주!

“작작해라 김태현!”

재자언은 어이가 없었다.

보통 태현 같은 스타일의 딜러는 전형적인 유리몸이었다.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이고 폭발적인 딜을 꽂아 넣는 대신, 방어력과 HP가 비교적 낮은 것이다.

이제까지 김태현이 그렇게 잘 싸워올 수 있었던 건 공격을 피해내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

역으로 말하면 그걸 묶으면 김태현을 잡을 수 있다는 소리가 됐다.

그런데 이렇게 포위를 하고 피할 수 없는 공격을 계속 찔러 넣고 있는데도….

‘지긋지긋한 놈 같으니!’

‘설마 밑천이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선수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 모인 선수들은 태현의 알려진 약점만 연구해 온 것이다.

태현은 보통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의 공격을 피하거나 회피력으로 흘려보냈지, 장비와 스킬로 버티진 않았다.

숨길 수 있다면 최대한 숨겨두는 게 좋았으니까.

그리고 그 어처구니없는 절약이 지금 빛을 보고 있었다.

선수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못 보던 스킬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것이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콱!

그러는 와중에도 태현은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친다고 해서 무조건 맞기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면 상대의 기세만 올려줄 뿐이었다.

제대로 도망을 치려면 맞받아쳐야 한다!

태현은 가장 가까운 선수 한 명을 붙잡고 미친 듯이 검을 찔러 넣으며 폭딜을 퍼부었다.

방금까지 도망치면서 쌓은 치명타 스택을 폭발시키고, <화염 적중>으로 인해 쌓인 사디크의 화염 기운까지 전부 사용!

[<사디크의 화염>이 더욱 더 누적됩니다!]

[일시적으로 <위대한 화염의 검술>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

“캬아아악!”

다 같이 공격을 퍼붓고 있던 탓에 방심하고 있던 선수 한 명이 그대로 붙잡혀서 딜에 녹아내렸다.

설마 도망치고 있는 놈이 이렇게 덤벼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도와줘!! 도와달라고!”

“지금 간다! 김태현, 이 자식 진짜!”

선수들이 어떻게든 태현을 떼어놓으려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태현은 스킬과 장비를 믿고 버텼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회피에…]

[회피에 실패합니다! 커다란 충격으로 몸이 흔들립니다!]

[일시적으로…]

순간 시야가 흔들리고 어두워지고 손이 느려지는 등등의 페널티가 들어왔지만 태현은 무시하고 기어코 한 명을 로그아웃시켰다.

[HP가 0이 되어…]

홱-

태현이 돌아서자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그들의 숫자가 더 많고, 그들이 태현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고, 심지어 지금 태현이 각종 공격을 받아서 너덜너덜해졌다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위축이 됐다.

그릇의 차이!

혼자서 남의 영역에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쑤시고 나올 수 있는 사람과, 절대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였다.

태현은 검을 들어 올렸다. 각종 버프로 인해 활활 타오르는 검이 겨눠지자 선수들은 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스킬을 쓰려는 거지?’

탓!

그리고 태현은 다시 돌아서서 달려나갔다. 두 번이나 당한 선수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개ㅅ….”

“야! 팬들이 보고 있다!”

“…….”

선수들은 이를 갈면서 쫓았다.

보통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김태현 저 자식은 치졸하게 굴었다가 묵직하게 굴었다가 하니 도저히 예측이….

-멍청한 모험가 놈들 같으니. 아직도 못 잡았단 말이냐!

“!”

달려 나가던 태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앞에서 굶주린 혼돈의 부하들이 나타난 것이다.

‘견적이… 젠장.’

태현은 빠르게 계산하고 나서 쓰게 입맛을 다셨다.

평범한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이면 어떻게든 치고 달릴 수 있겠지만, 딱 봐도 상대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커다랗고 장식 가득한 갑옷에, 투구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눈빛.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인해 변했는지 여러 개 달린 팔과 머리.

마치 아수라처럼 그 팔마다 든 무기에서는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굶주린 혼돈에게 직접 힘을 받은 검투사나 전사? 네임드 NPC겠군.’

-모두 다 비켜서라!

굶주린 혼돈의 투사는 사납게 외쳤다. 그 말에 선수들은 움찔하고 멈췄다.

퀘스트 때문에 같이 하고는 있었지만, 굶주린 혼돈 쪽 NPC들은 상대하기 좋은 NPC들이 아니었다.

성격은 오만하고 괴팍한 데다가 심심하면 폭발하는 것이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이쪽까지 공격할 수도 있었다.

-더 꺼지지 못하나! 일대일에 방해가 되지 않나!

“하, 하지만 저놈이 도망칠 수도 있….”

-지금! 내가! 놓친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굶주린 혼돈 님에게 말해서 굶주린 혼돈 형에 처하겠다!

“아… 아닙니다!”

“?”

태현은 상대의 외침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투구를 쓰고 걸걸하게 외치고 있긴 한데 뭔가….

‘NPC가 아니라 사람 같은데?’

선수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자, 굶주린 혼돈의 투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빨리 튀어!”

“…….”

놀랍게도 그건 케인이었다.

* * *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에게 발견되어서 끌려간 케인은, 자신에게 생각치도 못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허, 이 팔 여러 개 달린 거 보게. 아주 혼돈스럽군.

-머리통까지! 대체 어떤 축복을 받아야 이렇게 추하고 괴물 같은 형상을 갖게 되는 건가?

[키메라 종족으로 인해 친밀도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

[……]

유쾌한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신참이라고 케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다른 신참들은 밑바닥에서 화살받이로 굴렸지만, 케인은 보통 인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 굶주린 혼돈 님의 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나? 내, 원래 다른 놈들에게 주지 않지만 네놈에게는 특별히 이 해골을 주지. 이 해골에 든 성스러운 물을 마시도록 해라.

-아니! 대장님!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건 차별입니다!

-닥쳐라! 이 머리통도 하나인 데다가 팔도 두 개밖에 없는 한심한 놈들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을 이끄는 전사 대장은 케인에게 특별 대우를 해줬다.

보통 새로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퀘스트 수십 개를 깨고 나서야 굶주린 혼돈의 힘을 조금이나마 얻을 기회를 받았지만, 케인은 그냥 시작하자마자 프리패스를 받은 것이다.

물론 케인 입장에서는 등골이 서늘해질 제안이었다.

‘받아도 뒤지고 안 받아도 뒤진다!’

안 받으면 여기서 뒤질 것이고, 받으면 현실에서 김태현한테 뒤질 것이다.

‘귓속말을….’

[현재 귓속말을 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강한 곳에서는 귓속말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케인은 울고 싶었다.

‘생각해라, 케인. 생각해! 이제까지 했던 모든 시련과 수난들… 나는 살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케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제까지 겪은 시련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태현을 생각해 보면 지금 눈앞의 NPC는 만만하게 느껴졌다.

“거절하겠습니다!”

-…뭐라??

[굶주린 혼돈의 전사대장이 가진 친밀도가…]

“저는 아직 그럴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직접 공을 세워서 제가 그런 힘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

[…크게 올라갑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대장은 케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머리통만 많은 줄 알았더니, 생각도 깊었던 것이다.

-네가 이렇게 생각이 깊을 줄은 몰랐구나. 좋다! 내 너를 양아들로 삼겠다.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아, 아버지??”

-네게 이 갑옷과 무기를 내리겠다. 이걸 입어라! 그리고 이 부하들을 이끌고 공적을 세워라.

[굶주린 혼돈의 전사대장이 당신을 양아들로 삼습니다!]

[평판이…]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

태현과 케인은 미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케인이 어쩌다가 굶주린 혼돈 쪽으로 잠입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김태현…! 날 믿어라! 내가 설마 굶주린 혼돈 쪽으로 갈아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캡슐 나오면 바로 멱살 잡힌다고!’

케인은 설마 오해를 살까 봐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투구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러면 간다.”

“공격해!”

쾅!!

태현은 달려들어서 케인을 사납게 후려갈겼다. 괜한 오해를 받으면 안 되니 힘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크윽!”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HP가 일시적으로 크게…]

[사디크의 화염이…]

[……]

[……]

[……]

[HP가 더욱 더 크게 깎입니다!]

[……]

‘…어???’

메시지 창을 읽던 케인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한 대 정도는 맞아도 될 줄 알았는데 메시지창이 예상을 넘어갔던 것이다.

설마??

설마????

[<굶주린 혼돈의 판금갑옷>이 상처를 흡수하고 부서집니다!]

‘휴.’

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니 태현이 거리를 확실히 벌리고 있었다.

“뭐… 뭡니까!??! 놓치시면 어떡합니까!”

“닥쳐라!”

케인은 되레 화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 약하게 나오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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