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85화
“미리 좀 말해주면 안 되나?”
-그럴 순 없다.
페르소텔턴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태현은 말해주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겠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페르소텔턴은 이미 갇혀 있었던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어떠냐고 묻습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카르바노그. 페르소텔턴은 이미 죽은 상태야….’
굶주린 혼돈의 힘 때문에 부활한 거지 원래 목숨은 사라진 상태였던 것이다.
어떤 협박도 잘 통하지 않는 일종의 무적 상태.
“미리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렇다.
“뭐지?”
-미리 알면… 감동이 없다.
“…….”
태현은 순간 자제심을 잃고 무기를 뽑을 뻔했다. 이다비가 슬며시 태현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줄! 정신줄 붙잡으세요!”
“저 자식… 이제 보니 케인보다 나를 화나게 만들 줄 아는데?”
배장욱은 황자의 말에 감탄했다.
‘방송을 아는 NPC잖아?’
하긴 원래 극적인 효과라는 게 있는 법.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하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몰랐다.
“방송을 좀 아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배장욱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편집된 영상만 보다가 이렇게 김태현과 같이 퀘스트를 깨보니 알게 된 게 있었다.
김태현 선수는 같이 돌아다니면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다비 선수는 용케 겁을 안 먹는군.’
* * *
-각자 신분을 밝혀주시오.
-파이토스 교단,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 성기사단장이오.
-베레타르바 교단, 연정사제단 단장 알로페. 교단 내 직위는 대주교입니다.
“?”
“???”
“??????”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홱 돌려 알로페를 쳐다보았다.
이다비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주교였어요?”
-…….
알로페는 자기도 좀 창피했는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주교면 왜….”
“쉿. 이다비. 자기들만의 사정이 있었겠지.”
대주교쯤 됐으면 아크락스하고 맞서 싸워야지, 아크락스 무섭다고 목에 쇠사슬 차고 있는 게 말이 되나?
-타이란 교단, 함성성전사단 단장… 울라히요.
이번에는 태현이 나섰다.
“주교들이야 그렇다 쳐도 성기사단 단장쯤 된 양반이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크흠. 맞서 싸웠으면 교단의 화합이 깨지고 난장판이 만들어졌을 테니, 그릇이 넓은 내가 참은 것이지.
[카르바노그가 아무리 봐도 쫀 것 같다고 말합니다.]
‘쉿. 카르바노그.’
태현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걸 말하지 않는 게 예의였다. 태현은 데메르 교단에서 나온 NPC를 쳐다보았다.
“혹시 그쪽도?”
-대지사제단 단장, 대주교 비니시오입니다….
데메르 교단의 여러 사제단 중에서 대지사제단은 그 규모가 가장 크고 명성이 높은 사제단이었다.
데메르 교단이 원래 사제들로 유명한 만큼,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제단이라고 하면 실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 대주교 NPC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성격으로 유명해서 태현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근데 지금 목에 쇠사슬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목에 쇠사슬을??”
-차라고 하셨잖습니까…?
“싫다고 하면 되잖아요!”
-이게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태현은 기가 막혔다.
뭔 놈의 네임드 NPC들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아니, 그러면 아크락스가 난리칠 때 ‘이놈 아크락스! 내 지위가 지위인데 감히 날?’ 하면서 따끔하게 훈계를 해야지 다들 입 다물고 고개 숙이고 있으면 어쩌라고….
‘아무리 아크락스가 무서워도 그렇지 너무 심약한 거 아닌가?’
태현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봤다.
배장욱 옆에 서있던 방송국 랭커들은 태현이 쳐다보자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움찔했다.
케인이나 팀 KL 선수들은 ‘알지 알아’ 하며 동감할 반사작용이었다.
“잠깐. 너희들 중 몇 명은 분명 네임드 NPC들 얼굴 알아봤을 텐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했지?”
“…….”
“…어, 그게….”
“?”
“물어보기 무서워서…?”
노유리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배장욱과 같이 출발할 때만 해도 ‘김태현 선수와 같이 방송에 나올 수 있다고요? 와. 나도 같이 갈래! 방송하다가 김태현 선수가 나한테 반하면 어떡하지?’ 같은 장밋빛 상상을 했었지만….
지금은 ‘내가 실수해서 김태현 선수가 날 로그아웃시켜버리면 어떡하지?’ 같은 핏빛 상상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무섭다!
“…그렇군. 내가 잘못했다.”
“!!”
태현은 반성했다.
평소에 이다비나 태현을 잘 아는 플레이어들하고만 같이 돌아다니다보니,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 퀘스트는 혼자 깨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새로 수많은 파티가 참가한 만큼 그런 플레이어들을 배려해 줄 수 있어야 했는데.
“사… 사과할 것까지는 없는데!”
“아니. 그걸 말 못했다면 내 잘못이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배장욱은 무심코 생방송의 댓글을 확인했다.
-저 랭커들 뭐임? 한 것도 없는데 왜 김태현 사과시키냐??
-미친 거 아님??
-자기가 김태현보다 레벨 높음? 자기가 김태현보다 친구 많음??
“…여, 여러분. 사회적으로 뒤지기 싫으시면 빨리 말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배장욱의 속삭임에 뒤늦게 방송 댓글을 확인한 랭커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김태현 선수! 고개를 드세요!”
“김태현 선수!! 김태현 선수의 강력한 지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충성충성충성!”
“???”
태현은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의아해했다.
뭐지?
‘이놈들도 굶주린 혼돈한테 오염이라도 당했나?’
“앞으로 좀 친절하고 부드럽게 퀘스트 진행을 하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지금처럼 해주세요!”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 불평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 첩자입니다!”
방송국 랭커들은 태현을 둘러싸고 찬양의 시간을 가졌다.
태현은 의아해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들 모인 것 같군.
각 교단에서 나름 발언권이 있는 네임드들이 모이자, 페르소텔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저 교단은 악신 교단 아닌가?
페르소텔턴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데르고 교단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륙이 위기인데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요? 참으로 어리석군!
-으음! 미안하다. 이 페르소텔턴이 생각이 짧았군.
고대 제국의 황자는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다. 폴로뮤스도 그 사과에 마음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페르소텔턴이라고 하면….
-내 이름을 아는 자가 자리에 있었군. 그렇다. 나는 제국의 황자였다.
-!!
‘헉!’
배장욱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설마 고대 제국의 황자가 여기 있을 줄이야.
먼 옛날에 멸망한 것 때문에 대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는 고대 제국.
판온 플레이어들 중 고대 제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배장욱도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 불러서 몇 번 특집을 열었을 정도로.
‘…잠깐. 그런데 저 사람 우리에 갇혀 있었잖아…?’
배장욱은 그걸 지적하려다가 참았다. 분위기가 너무 엄숙했던 것이다.
-황자 전하!
-황자 전하!
각 교단의 NPC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고대 제국의 황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이야.
페르소텔턴은 근엄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착-!
“!”
태현은 기겁해서 무기를 뽑으려고 했다.
‘저 황자 놈이 드디어 사고를 치는구나!’
…그러나 페르소텔턴은 우리를 뚫고 나오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근엄해 보이려고 검을 뽑은 것이었다.
-나는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굶주린 혼돈이 내 육신을 더럽히고 꼭두각시로 부활시켰다. 모두 이 비열한 짓을 똑똑히 보아라!
각 교단의 네임드 NPC들은 그 말에 매우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서 우리 안에….’
배장욱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현한테 미안해졌다.
다 이유가 있는 거였는데 괜한 오해를 한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굶주린 혼돈은 대륙을 불태우려고 하고 있다. 나는 또다시 제국의 멸망을 보고 싶지 않다. 그대들이 도와줘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맙다. 저기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은 대륙의 수많은 영웅들 중 가장 제국의 후계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교황의 깃발 아래가 아닌,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가 가진 깃발 아래로 모두 뭉쳐다오!
[현재 <고대 제국의 후계자> 퀘스트를 수행 중입니다.]
[명성이 매우 높습니다.]
[……]
[<고대 제국의 후계자-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됩니다!]
<고대 제국의 후계자-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
오만한 죽은 황자, 페르소텔턴은 어떤 영웅이 나오더라도 제국의 후계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의 위기가 코앞까지 닥쳐온 지금, 페르소텔턴은 당신이야말로 고대 제국의 후계자로서 마땅하다고 인정했다.
페르소텔턴의 호소에 따라 고대 제국의 깃발을 들어라!
그 깃발 아래에 수많은 영웅들이 모이리라!
보상: ?, ???, ?????
‘…아니. 아니. 아니. 잠깐.’
태현은 경악했다.
페르소텔턴이 이런 말을 할지 예상 못하기도 했었지만, 그보다는 고대 제국 후계자 퀘스트가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태현이 이제까지 고대 제국 관련 퀘스트를 하면서 왜 굳이 공개를 안 했겠는가.
미친듯이 어그로가 끌릴 퀘스트였기 때문이었다.
왕국 하나 얻어도 온갖 견제가 들어오는데 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를 하고 있다?
이건 정말 자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숨기고 있었는데….
이 페르소텔턴 미친놈이 그걸 생방송으로 선포한 것이다.
‘굶주린 혼돈에 오염된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태현의 한탄에 카르바노그가 대신 변명해 줬다.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니었을 거라고 카르바노그가…]
짝짝짝짝-!
누군가 박수를 쳤다. 배장욱이었다.
배장욱 PD는 눈가에 이슬까지 맺힌 채 감동 받은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이 웅장한 장면을 옆에서 직접 볼 수 있다니.
PD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차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같이 있던 랭커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그들도 똑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다.
아, 여기 있길 잘 했구나!
“…….”
이다비만 혼자 태현의 눈치를 봤다. 태현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 뽑으시는 건 아니겠지?’
* * *
태현은 페르소텔턴 욕을 1분 정도 하고 나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쩌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아키서스의 화신으로 전직했을 때도 그랬고, 그 다음 퀘스트가 떴을 때도 그랬고, 수많은 기타 등등의 일들을 겪어왔을 때도 그랬다.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다비… 혹시 반응 좀 봐줄래?”
“다들 감동하고 있어요.”
“그 반응 말고 나 싫어하는 놈들 좀 봐줘.”
“이게 요즘 다른 길드들이 다들 조용해진 상태라서… 잠시만요… 아. 네. 견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네요. 은근슬쩍 편들어보라고 지시 좀 내릴게요.”
“그래. 고마워.”
태현은 털썩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페르소텔턴의 퀘스트 추가가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긴 했다.
[주의하십시오!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는 저항군의 규모가 커질수록 안에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당장 태현의 전술 스킬과 명성 스탯에도 이런 경고가 뜨지 않았던가.
페르소텔턴의 도움은 이런 부분에서 확실히 유용했다.
다른 교단 네임드 NPC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
문제는 이거 하나 얻자고 판온의 모든 랭커들과 대형 길드들의 어그로를 끌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 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 때문에 태현이 얼마나 어그로를 끌었을지는 태현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제발 반(反) 김태현 연합 같은 거 만들지 마라.’
“…태현 님. 길드 동맹 소식 보셨어요?”
이다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스… 스미스랑 연합했나?”
“네? 아뇨. 그게 아니라, 길드 동맹이…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