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84화
“어, 정말 사슬로 묶어서 데리고 다녀도 되나?”
-아크락스 님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파이토스 교단도 고생이 좀 많군.”
고위 사제들이 ‘어쩔 수 없지’ 하고 받아들이는 걸 보니 갑자기 좀 불쌍해졌다.
파이토스 교단도 생각보다 멀쩡한 교단은 아닌 모양이었다.
[카르바노그가 모두 겉으로는 행복해 보여도 실제로는 다들 제각각의 문제를 떠안고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카르바노그. 그럴듯하게 말한다고 아키서스 교단이 덜 이상해지진 않아.’
은근슬쩍 훈훈하게 넘어가려는 카르바노그의 말에 태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교단의 내부 사정이 생각보다 이상하더라도, 태현은 한 가지는 확신했다.
아키서스 교단보다 더 이상한 곳은 없었을 거라고!
일단 아크락스와 다른 교단 NPC들을 설득한 태현은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좋아. 빠르게 정리 들어간다. 각자 맡은 구역을 확인해 주고, NPC들이 내는 퀘스트가 있으면 해결해 주도록.”
“예!”
“알겠습니다.”
태현을 따라온 골짜기의 파티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길드 동맹의 간부들이 대부분 도망친 상황이라, 태현을 따라온 랭커들이 활약을 해줘야 했다.
각자 구역을 맡아서 관리에 들어가고, NPC들이 내주는 퀘스트를 해결해서 도시 상태를 원상복귀시키려는 게 목적!
[퀘스트, <성벽 수리>…]
[퀘스트, <연금술 재료>…]
[퀘스트, <식량 창고 복구>…]
[……]
[……]
“각 교단의 사제단들도 도와줬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황 성하. 저희도 이 도시의 사제입니다.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대도시인 만큼 여러 교단의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서서 퀘스트를 도와준다는 말에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버프는 난이도 높은 퀘스트 깰 때 빼놓을 수 없는 도움이었던 것이다.
“…야. 근데 저 사람들 왜 쇠사슬 차고 있냐…?”
“나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참고 있어. 조용히 해.”
물론 태현은 물어보면 이유를 설명해 줄 생각이었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은 지레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
-??? 사제들이 지금 쇠사슬 차고 있지 않았냐?
-내가 잘못 본 건가?
-왜 아무도 안 물어보지??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황당해했다.
그리고 가장 황당한 건 아무도 저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 * *
“저놈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이다! 저놈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이다!!”
“크윽…!”
“이 자식! 빨리 외쳐!”
“굶주린 혼돈을 믿어서 죄송합니다! 이기적인 놈이라서 죄송합니다!”
태현이 보여준 퀘스트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됐다.
눈치만 보고 있던 대형 길드들부터 랭커들이 이대로 가면 전부 다 관심을 뺏기겠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대륙 곳곳의 도시와 성에서 길드들과 랭커들이 힘을 합쳐서 레이드 시작!
아탈리 왕국 같은 경우도 남쪽에는 여러 길드들이 있었다. 태현이 영지를 돈 받고 판… 아니, 양보해 줬기 때문이었다.
스칼로 성에 자리 잡은 <검은 갈퀴>나 <나인테일> 길드부터 시작해서, 밀레네 시에 자리 잡은 유 회장과 낚시꾼들. 피넬레 시에 자리 잡은 김태산 쪽 오크 길드원들 등등.
각자 나름대로 준비를 끝내고 공세를 시작했다.
-김태현이 성공했다고 다들 너무 겁 없어진 거 아니야? 초반에 얼마나 실패를 했는데.
-제가 판온 레벨 381의 전문가인데, 제가 보기에 저 레이드는 실패합니다. 김태현 같은 경우는 진짜 왕국 최정예 전력 박박 긁어모아서 공격 들어간 거고, 여기는 그냥 길드들이잖아요.
-솔직히 <검은 갈퀴> 길드는 거품인 듯. 요즘 대형 길드들 겉멋 든 거 같음.
-김태현이 성공했다고 자기들도 성공할 줄 아나 봐.
…물론 사람들의 반응은 좀 많이 냉정했다.
초반에 대형 길드들이 여럿 실패한 탓에 ‘설마 되겠어?’ 싶은 생각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태현이 성공했다지만 원래 태현은 미친 난이도 퀘스트만 깨는 전문가였고….
그에 비해 대형 길드들은 퀘스트보다는 사냥터나 던전 잡고 무한반복사냥으로 레벨 올리는 인상이 강했다.
그런 놈들이 과연 깰 수 있을까?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물러납니다!]
“해냈다!!!”
“길드 거품이라고 한 새끼들 나와!!”
그러나 놀랍게도 곳곳에서 승리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태현처럼 군단 하나를 통째로 상대한 건 아니었지만, 영지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전부 쓸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성과였다.
-<검은 갈퀴>가 거품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해결한 거지? 영상 조작한 거 아님?
└진짜 죽고 싶냐? 야. 너 닉네임 까라. 1:1로 붙자.
-아탈리 왕국이 생각보다 단합이 되게 잘 되는데? 나 에랑스 왕국에서 굶주린 혼돈 공략 퀘스트 참가했던 랭커인데, 저 정도로 숫자 모으기 쉽지 않음.
다른 곳의 길드들은 실패했는데 아탈리 왕국의 길드들은 성공한 이유.
그건 바로 왕국에 소속된 플레이어들 차이였다.
기본적으로 아탈리 왕국의 플레이어들은 훨씬 더 충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평소에 왕국 세금은 거의 안 걷고, 영지 세금도 거의 안 걷고(이건 태현의 눈치가 보여서였다), 무슨 문제 생기면 언제나 열심히 해결해 주고….
대륙의 왕국들 중에서 아탈리 왕국은 가장 너그럽고 자유로운 운영을 하는 편이었다.
길드들은 ‘아 김태현 놈 사업감각 더럽게 없네 돈을 복사할 수 있는데’ 하면서 투덜댔지만, 놀랍게도 그런 투자가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의 단결을 불러왔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였다.
“굶주린 혼돈에게 넘어가지 맙시다! 굶주린 혼돈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굶주린 혼돈으로 넘어갔다가 잡히면 게임 접을 줄 알아라!”
“굶주린 혼돈을 용서하지 맙시다!”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파티를 짜서 굶주린 혼돈으로 배신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감시했다.
그리고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퀘스트를 도왔다.
“여기 화살 만들어서 갖고 왔습니다!”
“…어? 이걸 지금 사라는 건가?”
“뭔 소리예요? 공격 나갈 때 갖고 가서 쓰라고요!”
“공짜로?! 무슨 생각이야?!”
“아니 이런 미친 길드원 놈을 봤나! 도와줘도 난리네! 인터넷에 <검은 갈퀴> 놈들이 도와줘도 난리라고 글 올릴까?”
“미… 미안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물론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던 길드들도 당황했지만, 곧 그 도움을 받아들였다.
제작 직업이나 예술 직업들 모두 다 같이 힘을 모아서 퀘스트에 집중!
그 힘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힐러들 없어요?! 힐러 필요해!”
“힐러 없으니까 요리사들이 그냥 음식 들고 뛰어서 먹여줘!”
“오른쪽 진형 무너졌다! 예비대에 있던 탱커들이 나와서 막아줘야 해!”
“탱커들 없어! 못 막아!!”
“대장장이들이 가서 막자! 다들 갑옷하고 방패 들고 따라와!”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물러납니다!]
퀘스트가 끝나고 나서 검은 갈퀴의 길마인 남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평소에는 ‘아 세금도 별로 안 내면서 불평은 더럽게 많네!’ 하고 투덜댔던 플레이어들한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이야.
‘내가 이제까지 잘못 생각했었던 거야…! 김태현은 이걸 알고 있었던 거고.’
반성한 남정훈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퀘스트는… 크흑. 모두의 도움 덕분에 깰 수 있었던 겁니다.”
“쟤 왜 울어?”
“지금 생방송 중이라고 억지 감동 넣으려는 거봐.”
“야! 연기하지 말고 세금이나 깎아줘!”
“…….”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남정훈은 감동이 싹 사라졌다. 남정훈은 울컥해서 외쳤다.
“깎아주면 되잖아 이 자식들아!”
“와아아아아아아!”
“남정훈 만세!”
바로 돌변하는 그 모습에 남정훈은 이를 갈았다.
아오 뭐 저런 놈들이 있어!
* * *
[바야드리안 시의 치안이 회복됩니다!]
[……]
[……]
사람이 많으면 역시 퀘스트 진행이 빨랐다.
수백 개가 넘는 일퀘와 잡퀘들이 빠르게 깨지는 걸 보며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길드 동맹에서는 정말 아무 연락이 없었어?”
“네. 잠잠한데요.”
“진짜 상황이 안 좋나 본데.”
태현은 길드 동맹 쪽에서 ‘너 이 XXX 영지 내놔!’ 하고 연락이 올 줄 알았다.
그렇게 날로 먹었으니….
그런데 놀랍게도 길드 동맹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정신이 없는 거지?’
이쯤 되면 태현도 슬슬 걱정이 될 정도였다.
길드 동맹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굶주린 혼돈 상대할 때 길드 동맹이 무너져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우리 할 일 하자.”
태현은 지도를 펼치고 이다비와 머리를 맞댔다.
어쩌다 보니 오스턴 왕국의 도시를 날름 하나 먹기는 했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베레타르바 교단과의 합류-베레타르바 교단 퀘스트>
사랑의 신, 베레타르바 교단은 언제나 대륙의 안위를 위해 나섰던 교단….
<데메르 교단과의 합류-데메르 교단 퀘스트>
……
<타이란 교단과의…>
……
지금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퀘스트는 대륙의 다른 교단들과 손을 잡는 퀘스트들.
[카르바노그가 사제들 목에 걸어둔 쇠사슬 언제 풀어줘야 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다른 교단 주교나 성기사단장 오면 아크락스도 뭐라고 못 할 테니까 그때 풀어주자고.’
퀘스트 진행하는 동안 태현도 솔직히 좀 신경이 쓰였다.
악마들을 우리에 가둬 놓는 것도 이상한 시선을 많이 받았는데, 사제들 쇠사슬 채우고 퀘스트 시키는 건….
정말 좀 그랬던 것이다.
“원래 마음 같아서는 아탈리 왕국으로 돌아가서 교단들과 손을 잡고 싶은데.”
“그게 무리죠.”
아탈리 왕국에서 퀘스트를 깰 수 없는 이유.
…그건 바로 아탈리 왕국에는 아키서스 교단 말고 다른 교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태현이 쫓아낸 것!
덕분에 다른 교단의 정예 세력들과 합류하려면 다른 왕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카르바노그가 동의합니다.]
태현은 지도 위로 선을 그으면서 말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부터 접근해서 교단 고위 NPC들을 세력에 합류시키는 게 좋겠지.”
[현재 전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
[……]
[주의하십시오!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는 저항군의 규모가 커질수록 안에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음. 확실히.’
지금 이데르고 교단, 파이토스 교단, 악마 공작 셋만 있는데도 투닥거리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교단 몇 개만 더 추가되면 정말이지….
[카르바노그가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다스려야 한다!
이다비는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태현은 뒤를 노려보았다.
고대 제국의 황자, 페르소텔턴이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게 됐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너무 크게 말했나 보군.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다스려야 한다. 알다시피 교단 놈들은 위험하면 뭉치지만 조금만 배가 부르면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비열하게 구는 벌레 같은 놈들이니까.
“…아, 아니. 난 그렇게까지 말 안 했는데.”
태현은 일단 부정했다.
다른 NPC들이 들으면 고대 제국 황자뿐만 아니라 태현까지 엮어서 친밀도가 팍팍 떨어질 것 아닌가.
‘저 황자 놈 굶주린 혼돈에게 오염되었다고 뇌까지 맛이 갔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이 때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다시 부활한 것도 이 때를 위해서겠지.
페르소텔턴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이다비가 속삭였다.
“태현 님. 저만 불안한 거 아니죠?”
“응. 나도 지금 매우 불안해지고 있다.”
대체 저 황자가 뭘 하려고 저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