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83화
“김태현 선수.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어, 음. 그래.”
“김태현 선수! 길드 동맹의 도시까지 이렇게 와주실 줄이야….”
“으응….”
태현은 오랜만에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하고 장비에 사인까지 해줬다.
줄을 선 플레이어들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기뻐했지만 태현은 매우 떨떠름했다.
‘길드 동맹 놈들 진짜 게임 접으려고 이러나?’
지금 저기서 같이 줄 서서 사인 받으려고 하는 게 길드 동맹 길드원들인지 아니면 길드 동맹 길드원들의 탈을 쓴 굶주린 혼돈의 첩자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길드 동맹 놈들이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도시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모두 동원해서 함정을 판 게 아닐까?”
“소름 끼치게 그럴듯한 예측인데요?”
“저기 두 분.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방송에 잡히잖아요.”
방송국 랭커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둘을 구박했다.
아니, 김태현 선수야 원래 좀 독특한 면이 있다지만 이다비 선수까지 안 말리고 동의할 줄은 몰랐다.
왜 갑자기 머릿속에 ‘유유상종’이란 단어가 떠오를까?
구시렁대는 태현과 이다비와는 별개로 즉석 사인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배장욱과 방송국 랭커들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게임이지.”
“맞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겠습니까?”
평소에는 적대하던 다른 나라의 도시.
그런 곳을 아무런 조건 없이 구해주러 간 선수들과, 그런 도움에 진심으로 감동해서 이렇게 줄을 선 사람들.
하나의 드라마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작 당사자인 선수들은 수상쩍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저건 잡지 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완벽하게 파악했습니다.”
카메라가 거리를 벌리고 소리가 작아지자, 사람들은 궁금해서 죽으려고 했다.
-지금 김태현 선수하고 이다비 선수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좀 들려주세요!
-둘이 무슨 이야기하는 거야?
-별로 중요한 이야기 아니겠지. 지금 상황이 감동적이라는 거 아니겠어?
-길드 동맹 놈들 죽어라 같은 소리는 안 하나?
-미친놈임? 그런 소리를 지금 왜 해? 김태현이 넌 줄 아냐?
-쓸데없는 소리니까 치웠겠지. 아마 저녁 메뉴가 뭔지 떠들고 있을걸.
-케인을 시키느냐 마느냐 같은 대화일 수도 있다.
-너 팀 KL 정말 잘 아는구나?
-후후. 내가 팀 KL 올드팬이긴 해.
* * *
일반 플레이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길드 동맹 길드원들까지 수줍은 표정으로 사인 받아가자 태현은 슬슬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길드 동맹의 간부, 넬슨은 등급 높은 길드원들과 함께 태현 앞에 섰다.
“김태현 선수. 나는 사실 사인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드디어 시커먼 본색을 드러냈구나!”
“??”
“아. 아닌가? 미안하군. 기습할 줄 알았지.”
-김태현 선수가 왜 저러는 건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길드의 다른 랭커들한테 워낙 기습을 많이 당해서 아닐까요?
-…? 길드의 다른 랭커들이 김태현한테 기습을 당했으면 당했지, 김태현이 당하지는 않았잖나?
-그… 그러네요?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넬슨은 고민에 찬 얼굴로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이 도시의 영주 자리를 받아줄 수 있으십니까?”
-이건 진짜 함정이죠…!
이다비는 경악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보냈다. 태현도 매우 동감했다.
길드 동맹 간부가 ‘헤헤 이 도시의 영주님이 되어주십셔’라고 말한다면 그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도시에 뭔가 사악한 함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빚이 있거나 받는 순간 키메라로 변하는 저주가 있을지도 모르지.’
태현의 그런 생각도 모르고 넬슨은 천천히 설명에 나섰다.
“물론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이해도 되지 않으실 거고요.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넬슨을 포함한 길드원들이 가꾸고 아끼는 도시, 바야드리안 시는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굶주린 혼돈 때문에 주변 연결이 다 차단된 상황.
게다가 길드 동맹은 스미스의 길드를 상대하느라 다른 곳에 쓸 여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고위 간부도 아닌 넬슨이 남은 길드원들과 함께 바야드리안 시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전술 스킬이 매우 낮습니다! 페널티를…]
[현재 명성이 매우 낮습니다! 페널티를…]
[현재 도시 경비대장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페널티를…]
[현재 성문…]
[……]
[……]
그러나 도시 운영도 절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이런 대도시라면 더더욱.
길드 동맹도 그걸 아는 만큼 각 분야에 뛰어난 랭커들을 배치해서 영주의 운영을 돕게 했지만….
그 랭커들이 영주와 같이 밤에 도망친 상태!
지금 안 그래도 밖의 상황이 최악인데 도시 스탯이 쭉쭉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굶주린 혼돈이고 뭐고 간에 도시에서 먼저 반란 일어나고 시설 파괴되는 걸 보게 생긴 것이다.
“저하고 이 친구들은 바야드리안 시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넘기는 게 낫겠습니다.”
“쑤닝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텐데.”
“알 게 뭡니까!”
태현은 감탄했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면 알 게 뭐긴 했다.
먼저 간부들이 도망쳤는데 남은 사람도 살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음… 그래. 그런 이유라면 맡아주지. 어쨌든 굶주린 혼돈을 퇴치하긴 해야 하니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야드리안 시의 영주 자리가…]
[명성이…]
[오스턴 왕국…]
[……]
[……]
[……]
파아아앗!
1분도 안 되는 사이 도시의 영주 자리가 그대로 바뀌었다.
사인회 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배장욱은 태현이 걸어오는 걸 보며 물었다.
“대화가 좀 길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셨습니까? 혹시 길드 동맹 이야기라도?”
“아. 별 건 아니고, 자기들이 지금 맡을 능력이 안 되어서 영주 자리를 대신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예?? 네???”
-???
-방금 이상한 말이 오가지 않았냐?
-잘못 들었겠지. 경주였을 거야. 경주 자리. 하늘섬 경주 이야기겠지.
-오… 뭔 개소리야.
-영주란 은어가 있나?
-여러분. 현실을 받아들이시죠. 지금 영주 김태현한테 넘어간듯.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냐!? 길드 동맹의 신성한 도시를 어느 누가!
-어. 방송 보세요. 지금 영주 자리 맡아달라고 하잖아요.
방송을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혼란과 충격에 빠져 눈만 깜박였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원정대에 같이 참가한 파티장들이나 랭커들이 하나둘씩 도시 곳곳으로 가는 걸 보며 사람들은 현실을 깨달았다.
…진, 진짜 넘어갔어?!
바야드리안 시 같은 대도시가 이렇게 한 번에??
* * *
<화술의 극한-최고급 화술 스킬 퀘스트>
전설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어떤 스킬이든 쉽지 않지만, 화술 스킬이라면 특히 그렇다.
당신은 수많은 존재들을 속이고, 분노에 빠뜨리고, 설득하면서 혀의 달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경지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위대한 업적들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적들 상대로 어려운 난이도의 화술 스킬을 성공시켜라!
(악마 공작: 0/1)
(드래곤: 0/1)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0/1)
(상급천사: 0/1)
(국왕: 0/1)
보상: ?, ???
[악마 공작을 상대로 화술 스킬을 성공시켰습니다!]
[드래곤을 상대로 화술 스킬을 성공시켰습니다!]
[상급천사 상대로 화술 스킬을 성공시켰습니다!]
“…?”
태현은 퀘스트창을 읽다가 나오는 말에 당황했다.
어?
‘그렇군. 이제까지 했던 게 있으니까….’
조금 어이없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저걸 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힘든 일이었으니까.
[카르바노그가 그러면 이제까지 화술로 설득한 상대는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냐고…]
화술 스킬이 지금보다 훨씬 낮을 때도 설득해 왔던 걸 생각해 보면 저건 정말 타고난 아키서스의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바노그는 새삼 감탄했다.
쿵-
망치기사단의 단장, 아크락스가 망토를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교황 성하. 우리는 관문을 파괴하고 바야드리안 시를 회복했소.
“그래. 그 와중에 내가 영주가 되긴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사고에 가까운 거였지. 설마 이것 때문에 따지러 온 건 아니겠지. 아크락스?”
-물론이오. 굶주린 혼돈이 대륙을 불태우는데 지금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소.
“오. 다음 목표인가?”
태현은 저번보다 좀 더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 성공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이대로 굶주린 혼돈이 반응하기 전에 빠르게 관문을 몇 개 파괴한다면, 인근에 있는 혼돈의 힘은 크게 약해지리라.
-아니오! 도시 안의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것이오.
“…응?”
-도시 안의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것이오.
<배신자 처형-파이토스 교단 퀘스트>
파이토스 교단의 미치광이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는 바야드리안 시의 다른 교단 NPC들을 용서할 수 없어한다.
아크락스의 말을 듣지 않고 도시 안에 숨어 있던 겁쟁이들!
이 겁쟁이들을 처형해서 일벌백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겁쟁이들이 나올 것이다.
굶주린 혼돈과의 싸움을 위해 이들을 처형하라!
보상: ?, ???, ????
‘미친놈….’
태현은 질색했다.
아무리 퀘스트가 좋다고 하더라도 모든 퀘스트를 다 받을 수는 없었다.
특히 이런 퀘스트는 더더욱 그랬다.
받았다가는 다른 교단과 기껏 회복한 사이가 다시 악화될 것 아닌가!
[카르바노그가 왜 꼭 선신 교단에서 저런 미치광이들이 나오는 거냐고 투덜댑니다.]
‘음. 아키서스 교단도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고….’
-교황 성하!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크락스 님을 설득해 주십시오!
도시에 있던 다른 교단 NPC들이 와서 눈물로 호소했다.
나름 관문을 봉인하고 안에 있는 놈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는데, 아크락스가 오자마자 ‘이 배신자 겁쟁이들 너희들은 처형이다 처형!’이러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파이토스 교단 미친놈들!
“아크락스. 진정해라. 지금 굶주린 혼돈과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전력이 필요한데 아군을 처형하라니.”
-언제 도망칠지 모르는 겁쟁이들이 무슨 전력이 되겠소이까!
[……]
[설득에 실패합니다!]
‘와. 미친놈 맞군.’
미친놈을 설득하는 건 확실히 태현이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각종 보너스를 받고 들어갔는데도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에,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내가 교단 교황인데….
태현은 다시 설득에 들어갔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 되지.”
-어떻게 말이오?
“음… 저들을 사슬로 묶어서 우리 근처에 묶어 두면 도망치려고 해도 못 도망치겠지.”
[카르바노그가 무슨 소리를 하냐고 황당해합니다!]
카르바노그는 태현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경악했다.
악마들이나 우리 안에 가둬도 별 말이 안 나오지, 교단의 사제들을 그렇게 가두면….
‘걱정 마. 카르바노그.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다. 아크락스가 거절하면 다른 제안을 내놓을 거다.’
이쪽에서 미친 제안을 내놓으면 아크락스도 그걸 보고 좀 반성하게 되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 같소. 하긴 성하의 입장도 있으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는 않겠소.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아크락스를 설득하자 화술 스킬이 상당히 많이 올랐다.
그만큼 설득하기 어려운 미친놈이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태현은 고개를 돌려 다른 교단 NPC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슬로 묶어서 데리고 다니면 좀….
-감사합니다, 교황 성하! 아크락스 님을 말려주셔서!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파이토스 교단 내에서 평판이…]
[……]
[……]
“…?!”
아크락스와 같이 있으니 태현이 한 제안이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제안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카르바노그는 이걸 아키서스의 상대성 효과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