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82화
생방송이라고 편집을 할 수 없다는 건 초보자의 생각이었다.
진정한 고수는 생방송도 각도를 조절해서 편집할 수 있는 법.
배장욱은 슬슬 태현과 이다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타이밍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신호 보내면 화면 돌리도록.”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굶주린 혼돈의 빙하>가 그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와. 굶주린 혼돈 퀘스트 다 깨면 나 레벨 300 돌파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어느새 레벨이 272를 찍은 걸 본 태현은 새삼스럽게 놀랐다.
게임 끝날 때까지 300 못 찍겠다고 생각한 게 예전이었는데 어느새 300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다른 최상위권 랭커들은 300 중후반 넘어서 400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고….
‘토끼와 거북이 같은 거지.’
토끼가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거북이는 포기하지 않는 법.
태현은 괜히 흐뭇해져서 코밑을 쓱 훔쳤다.
[카르바노그가 자기 불렀냐고 의아해합니다.]
* * *
오스턴 왕국의 남부 대도시, 바야드리안 시!
굶주린 혼돈 퀘스트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도시기도 했다.
무려 굶주린 혼돈 관문이 도시 성문 앞에 생긴 것이다.
터지는 순간 바로 도시 멸망.
당연히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아이고! 내가 죄가 많아서 길드 동맹에 가입했다가 이런 꼴을 보는구나! 그냥 에랑스 왕국에서 제작이나 하면서 살걸!
-굶주린 혼돈은 사실 길드 동맹이 주도한 퀘스트다! 사악한 길드 동맹이 김태현을 이길 수 없어서 계약한 거라더라!
-여러분! 종말이 찾아왔습니다! 일주일 후면 판온 세상은 멸망하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다른 차원으로 안전하게 이동하고 싶으시면 제게 10골드를 주십시오! 제가 판온 운영진과 친척입니다!
-다른 도시로 튈 수는 없나?
-지금 필드 거의 봉쇄 상태라 무리지.
-길드 동맹이 그래도 자기네 재산은 엄청나게 챙기는데 지원 좀 하겠지.
그래도 워낙 대도시고 길드 동맹이 있는 만큼 끝까지 믿어보려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다른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속보! 길드 동맹 화이트 나이트한테 패배!! 미다스하고 연합했는데도 졌다!
-진짜 망했다!!!
-재산 다 써서 맛있는 거나 먹자!
-아, 여기가 골짜기면 상자를 돌리는 건데!
-모험가 여러분들, 침착해 주십시오! 교단의 사제들이 관문을 막고 있으니….
-막아봤자 뭐합니까! 어차피 시간 지나면 뚫릴 텐데!
길드 동맹 간부, 넬슨은 인상을 팍팍 쓰며 말했다.
“길드원들 불러서 혼란 피우지 못하게 하고, 구역마다 파티 배치해라. 관문 터지면 싸워야 하니까.”
“넬… 넬슨 님. 진짜 지원 안 옵니까?”
“…나도 모르겠다.”
넬슨은 정확히 따지면 여기 영주가 아니었다.
원래 길드 동맹은 정말 믿음직스러운, 앨콧 같은 플레이어가 아니면 외국인 플레이어한테 영주 자리를 맡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넬슨이 여기 총책임자를 맡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다른 간부들이 모두 튀어서!
‘이 새끼들…!’
넬슨은 그나마 있던 정도 싹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평소에 외국인이라고 ‘하 이래서 백인은 우리 중화 사천년의 신비가 담긴 통치철학을 이해 못한다니까’ 같은 소리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최소한 영주 자리 맡고 있는 간부까지 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솔직히 튈 거면 같이 말해주고 튀어야 하지 않은가!
넬슨을 제외한 간부들은 일 터지자마자 도시 안에 있는 정예 랭커들과 함께 밤을 틈타서 필드를 뚫고 길드 동맹 본대와 합류해 버렸다.
남은 건 미리 소식 못 들은 넬슨 같은 간부와 그 밑의 일반 길드원들.
마음 같아서는 넬슨도 그냥 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바야드리안 시는 넬슨에게도 소중한 도시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애정을 들이면서 가꿔 온 도시를 그냥 버릴 수는 없다!
“넬슨 님! 원정대가 이쪽으로 옵니다!!”
“길드 동맹 지원이냐!”
“아, 아뇨. 김태현 쪽 원정대 같은데요.”
“…….”
넬슨은 좋다가 말았다.
김태현이 길드 동맹 쪽을 도와줄 리 없지 않은가.
“몬스터 뿌리고 가는 거 아니야?”
“설마 이렇게 힘든 상황에 김태현이 그럴… 놈이긴 한데.”
“진짜 그러면 김태현 사람도 아니다. 가서 악플 달 거임.”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김태현 쪽 원정대는 달려오더니 그냥 말도 걸지 않고 바로 관문으로 뛰어들었다.
“…?!?!?”
“뭐냐!?”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왜 뛰어들어??
“방송 켜봐라.”
“어? 켜도 됩니까?”
길드 동맹 내에서 김태현 쪽 방송 보는 건 일종의 금기였다.
봤다가 걸리면 ‘넌 이 새끼야 우리 길드가 망할 뻔했는데 그게 재밌냐??’ 같은 소리가 날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 궁금하다!
“…….”
“…….”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성벽 위에 오순도순 모여서 퀘스트 진행하는 걸 보기 시작했다.
“한국 애들 방송 재밌게 하네요. 프로 같은데?”
“방송국이 와서 찍고 있는 거야.”
“이걸 다?! 하긴 김태현 정도면 그럴 법도 하겠네요.”
“다른 길드들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공개해도 되나? 방해하는 놈들 붙을 것 같은….”
각자 팝콘 하나씩 먹으면서 떠드는 길드원들.
“저… 저저! 저 새끼! 저 새끼들 누굽니까? 척살령 내리죠!”
“사람이 양심이 없나! 지금 대륙이 망하기 직전인데!”
그들은 진행되고 있는 생방송을 보면서 울고 웃었다.
“해냈다! 역시 김태현이 저런 놈들한테 당할 리가 없지!”
“여러분들 뭐하십니까?”
다른 구역 맡고 있던 길드원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모여서 뭐하나 싶었는데 다 같이 방송 띄워서 보고 있었다니.
…길드 동맹이 진짜 망하는 건가?
“크, 크흠. 지금 우리 도시와도 상관이 있어서 보는 거야.”
“맞아. 재밌어서 보는 게 아니었다고.”
보고 있던 길드원들은 부끄럽긴 했는지 슬쩍 팝콘을 숨겼다.
“김태현이 공략한다고 방송하던 게 이겁니까? 어디….”
“음….”
“어….”
길드원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다. 그러자 위의 공간은 확 좁아졌다.
“아. 좁은데 그냥 내려가서 봅시다!”
“광장 가서 보죠. 어차피 지금 광장도 한산할 텐데.”
“그럽시다!”
길드원들은 우르르 내려가서 광장으로 갔다.
도시 내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길드원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모여 있지?”
“혹시 탈출하려는 거 아니야?”
“길드 동맹이 설마 그럴… 수 있지. 혹시 모르니까 쫓아가자!”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리면서 길드원들의 뒤를 쫓아갔다.
대체 무슨 사악한 꿍꿍이가 있어서 저렇게 모여서 우르르 달려가는 것일까?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
“…미친놈들인가 봐.”
“길드 동맹 진짜 망함??”
광장에 옹기종기 모여서 팝콘 뜯으면서 퀘스트 방송 구경하는 길드원들!
플레이어들은 황당해했다.
그 길드 동맹이 저러는 거 보니까 진짜 망해가나 보다!
“야. 우리도 그냥 같이 보자. 여기서 같이 보면 편하겠네.”
“그래. 따로 보는 것보다 이게 낫겠네.”
혼자 보는 것보다 광장에서 다 같이 모여서 보는 건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소문이 퍼지자 도시의 플레이어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도시 광장은 가장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온갖 판매와 좌판 때문에 발 디딜 곳도 없는 장소였다.
그런 곳을 이렇게 텅텅 비우고 다 같이 방송을 보는 건 다시 할 수 없는 경험일지도 몰랐다.
퀘스트가 진행되고, 흥분해서 고함까지 지르던 사람들은 마지막 정령왕의 설득 장면에서 울컥했다.
“크흑….”
“감동적이야… 저렇게 설득할 수도 있다니.”
“꼭 폭력이 답은 아니지…!”
물론 김태현 같은 사람도 몇 명은 있었다.
“어, 그냥 잡는 게 낫지 않아?”
“김태현 왜 안 잡지? 경험치가….”
“아! 조용히 해! 눈치 없게!”
“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없냐?!”
“미… 미안. 난 그냥 궁금해서….”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쭈그러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동안 여운을 즐기며 눈물을 훌쩍이던 사람들.
누군가 그 침묵을 깨고 외쳤다.
“관문에서 원정대 나온다!!”
“!!”
“보러 가자!!”
“팬사인…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도 구경가자!”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생방송을 보면서 약간 최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간 영화관에 왔을 때 배우가 직접 찾아와서 팬미팅을 하는 것 같은 상황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잠깐!”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앞을 막아섰다. 플레이어들은 성난 표정으로 항의했다.
“뭐야! 비켜!”
“멍청한 자식들! 줄을 서서 가야지! 무질서하게 달려들면 우리가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냐!”
“아아…!”
“과연!”
플레이어들은 길드원의 말에 감탄하고 납득했다.
지금은 멀리서 온 스타에게 시민의식을 보여줄 때였다.
“다들 줄 서!!”
“새치기 하지 마! 새치기 하는 놈은 로그아웃시킨다!”
* * *
“????”
퀘스트 클리어하고 관문에서 나온 태현은 성문 앞으로 쭉 늘어선 줄에 당황했다.
‘대체 뭐지?’
이다비도 놀랐는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저게 뭔지 아는 사람 있나?”
태현은 배장욱이나 배장욱과 같이 온 방송사 쪽 랭커들을 보며 물었다.
노유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김태현 선수 보려고 온 거죠.”
“…내가 어지간해서는 의견을 귀담아듣는 편인데 그건 너무 좀 심하지 않나?”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긴 한국이 아니라 판온이었다. 그것도 길드 동맹 쪽 도시.
길드 동맹 쪽 도시에서 태현을 보려고 줄 설 리가 없지 않은가.
“진짜 김태현 선수 보려고 줄 선 거라니까요? 왜 못 믿는데요?”
노유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장 노유리만 해도 김태현의 팬이라서 이번 방송국 기획에 참가한 것이다.
동감한다는 듯이 주변에 있던 랭커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태현은 단호했다.
“암살자들이겠군. 나와 싸우려는 플레이어들이 줄을 선 거야.”
“…….”
“…….”
그 모습에 노유리를 포함해서 다른 랭커들은 순간 생각했다.
‘혹시 김태현 선수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이다비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급히 변명에 나섰다.
“그, 태현 님이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여기가 길드 동맹 지역이잖아요? 길드 동맹은 졸렬하고 비겁하고 속이 좁은 사람들이라 태현 님 보려고 줄 서거나 하는 짓을 허용할 리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아….”
“그런 겁니까?”
랭커들은 그 설명에 납득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하긴 김태현 선수가 틀린 판단을 한 적이 이제까지 없었는데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김태현 선수. 저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때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는지, 줄 앞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태현에게 외쳤다.
“김태현 선수!! 팬입니다!!”
“이번 퀘스트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령왕을 그렇게 설득하실 줄은….”
“…….”
“…….”
“…잠깐. 아직 함정일 수도 있….”
마침 뒤에 있던 길드 동맹 길드원들이 황급히 따라왔다.
그걸 본 태현은 살짝 기대하는 시선을 던졌다.
함정인가?
“이봐! 줄을 서고 한 명씩 가라니까! 지금 말을 나누고 싶은 건 모두가 똑같아! 하지만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가 뭐가 되겠나!”
“죄, 죄송합니다!”
“자! 다 같이 줄을 서자! 한 사람당 너무 길게 말을 걸지 말고!”
“…….”
“…….”
방송국 랭커들은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현은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