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581화 (1,580/1,826)

§ 나는 될놈이다 1581화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은 굶주린 혼돈 퀘스트 때문에 잔뜩 독이 오른 사람들이었다.

깨던 직업 퀘스트가 멈추고, 도시가 갇히고, 필드도 못 나가게 됐는데 그쪽으로 갈아탄 플레이어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밟아버려!”

세 명은 그대로 박살이 났다.

아무리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았든 말든 이 인원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잠깐! 다들 진정해 보십시오!”

셋이 한참 신나게 두들겨 맞던 도중, 배장욱이 나와서 말렸다.

“??”

“왜 그러세요?”

두들겨 맞던 김재식은 배장욱의 얼굴을 알아봤다.

한국의 유명한 스타 PD 아닌가!

‘혹시 도와주려는 건가?’

방송을 아는 사람인 만큼 도와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게 사실 그렇게 큰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냥 로그아웃시키면 놓칠 수 있으니 포로 상태로 만들어서 다른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캐냅시다!”

“…맞는 말씀입니다!!”

“와아아! 역시 피디님이셔!”

플레이어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 * *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을 시전합니다!]

[토템이 당신의 기도에 반응해 아이템을 내려줄 것입니다.]

[<단단한 얼음 덩어리>를 얻습니다.]

‘차라리 아까 뭐라도 나왔을 때가 그리울 정도인데.’

아래에서 제압하는 사이 태현은 다시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아까보다는 나오는 아이템이 훨씬 적었다.

태현은 스킬을 쓰면서 아까 얻은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굶주린 혼돈의 명령서>를 엽니다!]

[퀘스트 정보가 추가됩니다!]

<굶주린 혼돈의 명령서-굶주린 혼돈 퀘스트>

굶주린 혼돈의 은혜로운 힘이 대륙에 강림하였으나 아직 남아 있는 불순한 필멸자들이 많다!

이 필멸자들 중 신분 높고 고귀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대륙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는 우두머리들을 처치하라!

(에랑스 왕국 국왕: 0/1)

(오스턴 왕국 국왕: 0/1)

….

….

보상:?, ???

‘!’

태현은 깜짝 놀랐다. 퀘스트 생각보다 매우 노골적이었던 것이다.

‘하긴 이런 게 없으면 더 이상하겠군.’

예전 고대 제국 멸망 퀘스트를 직접 본 입장에서 태현은 굶주린 혼돈의 수법을 어느 정도 잘 아는 편이었다.

대륙에서 왕족이나 장군 같은 중요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혼란을 만드는 것!

지금도 곳곳을 차단했다지만 제법 곳곳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태현 아닌가.

‘당연히 내 이름도 있고.’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을 시전합니다!]

[토템이 당신의 기도에 반응해 아이템을 내려줄 것입니다.]

[<정령왕의 잔>을 얻습니다!]

“…어?!”

태현은 정말로 놀랐다.

[카르바노그가 스킬 써놓고 왜 놀라냐고 의아해합니다.]

‘아니… 이게 원래 그런 거지.’

물론 태현이 스킬을 쓴 건 맞았다.

하지만 대장장이가 성공 확률 0.01%짜리 아이템을 만들면서 ‘이게 설마 되겠어?’라고 생각하듯이, 태현도 마음속으로는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안 될 거 같은데?

…그런데 그냥 진짜 한 번에 나와버리다니!

심지어 MP가 아직 절반 넘게 남아 있는데!

[카르바노그가 행운의 화신이면 좀 더 자신만만하라고 측은해합니다.]

‘네가 내 입장 되어봐라. 카르바노그. 스스로가 행운의 화신이라고 느껴지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유독 태현 퀘스트만 배배 꼬이고 난이도 높아진 게 맞았다.

다른 랭커들 직업 퀘스트는 아무리 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정령왕의 잔:

내구력 ?/?

스킬 ‘정령왕 소환’ 사용 가능, 스킬 ‘정령왕 역소환’ 사용 가능.

정령왕을 불러낼 때 쓰이는 강력한 아이템이다. 정령왕의 힘이 잔 곳곳에 새겨져 있다.

투박한 나무잔은 그 겉모습과 어울릴 정도로 간단한 설명을 갖고 있었다.

스킬도 <정령왕 소환>과 <정령왕 역소환>만 있을 정도로!

태현은 바로 <정령왕 역소환>을 사용했다.

-정령왕 역소환!

[정령왕 역소환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정령왕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정령왕을 쓰러뜨리십시오.]

‘역시 쉽게는 안 되겠군.’

날로 먹으려고 했던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다.

역시 잔을 부숴서 정령왕에게 타격을 준 다음 레이드를 해야 하나?

“김태현 선수!!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

* * *

눈사태에 날아갔던 정령왕과 악마 공작.

둘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진설(眞雪)의 첫 번째 조각>을 사용합니다!]

[냉기의 진정한 주인이 찾아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푸르네우스는 아껴뒀던 보따리에서 보물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진설의 조각>은 냉기의 핵처럼 강력한 냉기를 모아 놓은 아이템.

한 번 사용하면 안 그래도 막강한 힘을 더욱더 증폭시켜줬다.

-악마 놈이!?

타락한 정령왕도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

-네놈은 내 심기를 건드렸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분노한 악마 공작은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식으로 다음 아이템을 사용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진설(眞雪)의 두 번째 조각>을 사용합니다!]

[냉기의 진정한….]

[냉기의 핵이 점점 더 깨어납니다!]

-죽어라!

푸르네우스는 양손에 무기를 쥐고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정령왕은 점점 밀리며 방어만 하는 식으로 변할 정도였다.

콰아아악-!

몰린 정령왕은 원정대 플레이어들 앞까지 날아왔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뒤에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것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어? 역전했잖아?”

“그냥 이기나??”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솔직히 악마 공작이 죽을 줄 알았는데 뭘 잘못 먹었는지 미쳐 날뛰면서 정령왕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건 플레이어들만이 아니었다. 빙결공의 부하 악마들도 놀라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살아계시잖아!?

-이거 돌아오시면 괜히 화내시는 거 아닌가?

악마답게 주인을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부터 먼저 걱정하는 현명한 태도.

다행히 푸르네우스는 대화들을 듣지 못했다. 정령왕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쾅!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정령왕의 양팔을 봉쇄합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습니다!]

-아키서스! 방법은 찾았나!

푸르네우스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외쳤다.

이 정도로 시간을 벌어줬으면 정령왕을 해치울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설마 아키서스 놈이 그 정도 재주도 없을까!

-잠깐. 교황. 이걸 꼭 지금 말해줄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맞는 말이오.

폴로뮤스와 아크락스가 태현에게 와서 속삭였다.

-저 악마 놈을 보라고. 매우 수상쩍지 않나? 무슨 수단을 썼는지 보통 힘이 아니야. 만약에 싸움이 끝났는데 저놈이 우리를 배신한다면?

-만약이 아니오. 저놈은 확실하게 배신한다고 봐야 하오. 악마잖소!

“….”

나름 둘 다 교단 NPC인데 매우 사악한 표정으로 속삭이는 게 좀 어이가 없긴 했다.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저거 힘을 숨기고 있었나?’

푸르네우스도 꽤나 아낀 스킬이나 아이템을 쓴 게 분명했다.

아마 태현을 죽일 기회가 있을 때 쓰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

<진설의 조각-냉기의 핵 퀘스트>

사악한 악마, 빙결공 푸르네우스는 마계 깊숙한 곳의 냉기를 손에 넣은 것으로 지금의 악마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설의 조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냉기의 핵을 감싸고 있던 봉인은 풀리게 마련.

냉기의 핵을 감싼 봉인을 해방시켜라!

그렇게 한다면 냉기의 핵은 당신에게 감사해하리라.

보상:?, ???

“…???”

태현은 갑자기 나오는 퀘스트에 당황했다.

냉기의 핵은 지금 하늘성 상층부에 봉인되어 있는, 하늘성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아이템.

그런데 이게 봉인된 거였다고?

‘풀어줘도 되는 거 맞나? 대륙이 얼어붙기라도 하면… 아니, 지금은 좀 얼어붙어도 상관없긴 하겠지만.’

정령들도 노예로 부려먹는 악마인 만큼, 푸르네우스가 냉기의 핵도 무슨 짓을 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키서스!! 내 말 안 들리나!

푸르네우스는 화를 냈다.

간신히 정령왕 놈을 제압했는데 아키서스 놈이 못 들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정령왕은 포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패배를 인정하겠다, 악마 놈. 하지만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정령을 노예로 부린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아니다! 정령왕! 정령을 노예로 부린 건 악마 공작의 잘못이다!

폴로뮤스가 크게 외쳤다.

붙잡고 있던 푸르네우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노려보았지만 폴로뮤스는 무시했다.

-감히 정령을 노예로 부리다니. 그러고도 네가 악마 공작이냐?

-맞는 말이오!

-…!

정령왕은 둘의 말에 감동한 것 같았다.

-아키서스여… 내가 이런 행패를 부렸는데도 날 이해해 준 것인가?

-이데르고 교단이다, 이 멍청한 정령 놈아!

폴로뮤스는 울컥해서 외쳤지만 정령왕은 무시했다.

원래 이런 건 가장 우두머리 쪽으로 쳐주는 것이다.

이번 레이드가 끝나면 역사서에는 ‘아키서스 교단의 레이드’로 남지 ‘이데르고 교단의 레이드’로 남지 않는 것처럼!

[타락한 정령왕이 감사해합니다!]

“그… 그래. 악마 공작이 좀 심하긴 했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태현은 일단 탑승하고 봤다.

보아하니 싸우지 않고 정령왕을 퇴치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득이었던 것이다.

-당신 같은 영웅들이 있는데 굶주린 혼돈의 힘을 빌려서 대륙을 불태우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군.

-이딴 말을 지금 듣고 있으란 거냐?! 아키서스 놈아! 처치하란 말이다!

빙결공은 분노해서 외쳤다.

지금 간신히 정령왕의 힘을 꽉꽉 봉인하고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자기들끼리 감동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령왕을 꿰뚫은 무기를 놓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령왕이 누구를 공격할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령왕!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순수했던 예전으로 돌아와라!”

태현의 외침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같이 입을 모았다.

“맞습니다! 정령왕 님! 악마 때문에 그러시지 마세요!”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세요!!”

수많은 모험가들의 외침에 정령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끄러워했다.

-아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너무 부끄럽구나!

[타락한 정령왕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정령왕이 굶주린 혼돈과의 계약을 파기합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의 레벨이 오릅니다!]

[최고급 화술 스킬 6으로 변합니다!]

[….]

-나를 역소환해 다오, 아키서스여! 더 이상 굶주린 혼돈의 노예 노릇을 하지 않도록!

“알… 알겠다. <정령왕 역소환>!”

[정령왕이….]

[<굶주린 혼돈의 빙하>를 유지하던 힘이 사라집니다!]

[굶주린 혼돈이 극도로 분노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빙결공 푸르네우스를 저주합니다!!]

-?!?!?

악마 공작은 경악했다.

아니 미친 새끼가 누구한테 저주를 내린단 말인가?

-돌아버린 것이냐! 굶주린 혼돈 놈아!!

“정령왕,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모인 플레이어들은 정령왕에게 감사했다.

마지막에 스스로를 희생하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싸움은 몇 배로 길어지고 복잡해졌을 것이다.

-다들 닥치지 못하겠나!

“정령왕 만세!! 정령왕 만세!!!”

푸르네우스의 분노한 마음도 모르고, 플레이어들은 정령왕의 이름을 환호했다.

배장욱은 코밑을 쓱 훔쳤다.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감동적인 방향으로 퀘스트가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단순히 퀘스트를 깨는 것만이 아니라 감동까지 줄 줄이야.’

“김태현 선수. 정말 감탄했습….”

“아. 잡았어야 경험치를 더 줬나? 그냥 잡을 거 그랬나.”

“굶주린 혼돈이 개입하기 전에 깔끔하게 끝냈다는 것에 의미를 두죠. 아쉽기는 하지만요.”

“그래. 근데 진짜 아쉽다.”

“저도요. 너무 아쉬운데요.”

“….”

배장욱은 태현과 이다비에게서 슬슬 거리를 벌렸다.

‘저 쓸데없는 대화는 넣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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