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79화
[최소한 이 바람이라도 좀 유리하게 바꿔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일리가 있긴 한데 여전히 미친 소리 같긴 하군.’
애초에 행운의 바람은 태현이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바람이 아니었다.
만약에 바람이 이 추위를 증폭시키기라도 한다면?
‘난이도를 스스로 올리는 꼴이 되겠지.’
[카르바노그가 다른 모험가들에게 물어나 보라고 말합니다.]
‘으음.’
카르바노그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조언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개판이라는 거였지만….
“다들 모여 봐라.”
“?”
각자 위치에서 움직이고 있던 파티장들은 태현의 부름에 모였다.
“내가 지금 쓸 스킬이 하나 있는데, 이 스킬을 쓸지 말지 같이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군.”
혼자서 깨는 퀘스트나 케인 같은 놈을 데리고 깨는 퀘스트였다면 묻지 않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파티들이 같이 하고 있는 퀘스트.
이런 건 태현 혼자서 멋대로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아무리 총파티장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듣고 같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쓰는 게 낫겠죠.”
“씁시다.”
“일단 써보는 게?”
“…아직 말도 안 했는데??”
태현은 황당해했다.
배장욱과 같이 온 랭커, 김재준과 노유리가 입을 열었다.
“김태현 선수가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다 계산이 끝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동의!”
다른 파티장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말 안 하고 그냥 하셔도 별 상관없습니다.”
“굳이 이걸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괜히 시간만 낭비하시는 것 같은데.”
“…….”
이다비는 이들의 반응에 감동했다.
판온이 그렇게 감동적인 게임은 아니긴 했지만, 가끔 이렇게 진심이 통할 때가 있었다.
-태현 님. 보세요. 태현 님의 진심이 통했어요.
-진심이고 뭐고 지금 설명도 안 들었는데 믿겠다는 게 제정신은 아니지 않나? 케인도 아니고?
-…….
이다비는 태현을 노려보았다.
감동적인 순간을 그냥 파괴해 버리다니!
* * *
-악마 놈 주제에 제법이구나.
타락한 정령왕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정령들을 소환해서 노예로 부리는 사악한 악마 공작이긴 했지만, 그 실력까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잘 버티다니!
-…정령 놈 주제에 감히 날 평가하지 마라.
빙결공 푸르네우스도 솔직하게 말했다.
매우 굴욕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상대 정령왕은 정말로 강력한 존재였다.
굶주린 혼돈의 힘까지 빌리자 더더욱 위험천만한 존재!
-어디 한번 이번 공격도 받아봐ㄹ….
[행운의 바람이 몰아칩니다!]
[한기가 더욱더 강해집니다!]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
폭포 같은 눈사태 더미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령왕도, 악마 공작도 거기에 휩쓸려서 굴러가버렸다.
[눈사태가…]
[……]
“와, 이거 장난 아닌데??”
“그래도 이쪽으로 안 와서 다행이지.”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김태현은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불러낸 바람이 저쪽으로 눈보라를 몰고 간 덕분에 이쪽 주변이 맑아진 것이다.
[눈보라가 약해집니다!]
[날씨가 맑아집니다!]
[시야가…]
[……]
[……]
물론 그 탓에 몰고 간 쪽은 눈사태가 일어나긴 했지만, 플레이어들만 안 공격하면 됐다.
“근데 저쪽… 아까 싸우던 곳 아닌가?”
“그러게? 하지만 우리 일 아니잖아.”
“맞는 말이야.”
플레이어들은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악마 공작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각자 구역 나눠서 수색 시작해!”
파티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아까보다 스킬을 쓰기는 수월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건 마찬가지.
시간을 줄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봐. 아키서스.
포병대 우리에 갇혀 있던 소환공, 에다게르가 태현을 불렀다.
“?”
-정령이 결속된 아이템은 평범한 곳에 있지 않을 거다. 내 생각에는 저런 산맥 높은 곳이 자연의 기운이 강하니 그쪽에 숨겨놨을 것 같군.
“고맙군. 에다게르. 물론 네 말을 믿지는 않지만.”
-…….
에다게르는 분노한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악마 공작의 조언 따위는 함부로 들어서 안 되는 것이다.
-이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교황님에게 직접 말을!
-크아아아악! 이 미친 드워프 놈들이! 도와줬는데도!!
에다게르의 조언이 끝나자 옆의 우리에 갇혀 있던 고대 제국의 황자, 페르소텔턴이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원래 정령들은 빙하 깊숙한 곳 아래나 산의 정상 같은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곳을 사랑하니까.
“그런가? 조언 고맙다. 나는 그쪽부터 수색해야겠군.”
-저주 받아라! 이 굶주린 혼돈 같은 놈들아!!
에다게르는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태현을 욕했다.
저 재수 없는 아키서스 놈 진짜!
* * *
“이쪽 맞지? 조심… 조심….”
“그만 좀 조심해라!”
“쉿. 목소리 낮춰. 멍청한 놈들아.”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엉금엉금 산맥 위를 기어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놀랍게도 <굶주린 혼돈의 빙하>였다.
태현이 이끌고 온 원정대 소속이 아닌, 별개로 찾아온 플레이어들!
당연히 좋은 목적이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당신을 부릅니다!]
[굶주린 혼돈의 퀘스트를 깰수록 더욱더 강한 힘을 하사받습니다.]
[……]
[……]
윌슨, 김재식, 와타베, 하쉬안.
이 4인조 파티는 굶주린 혼돈 세력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었다.
원래 악 성향 플레이를 즐기던 플레이어들은 이런 가입도 빨랐던 것이다.
‘빨리 가입해서 진짜 다행이지.’
‘굶주린 혼돈으로 끝까지 간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상황에 매우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판온은 선 성향보다 악 성향이 더 플레이하기 힘든 게임이었다.
누구 PK하면 현상금 붙고, 뭐 훔쳐도 현상금 붙고, 뭐 부서도 현상금 붙고….
좀 자유롭게 하겠다는데 매번 현상금이 붙고 뭔 놈의 현상금 사냥꾼들은 이렇게 많은지 일대다를 수십 번을 해야 했다.
완전 너덜너덜해져서 마을로 도망치려고 하면 ‘악명 높은 놈 안 받아줘 꺼져!’ 같은 말을 듣는 게 보통.
산적이나 해적들 게시판에 들어가보면 ‘현상금 사냥꾼들한테 털렸어요 ㅠㅠ’ ‘기껏 만들어 놓은 산적 요새 박살 났습니다 이제 어떡하죠?’ 같은 글들만 수천 개였다.
그렇게 울분과 서러움을 참고 남의 돈을 뜯어 오던 세월.
그 상황이 아예 뒤집힌 것이다.
강자는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혼란의 시간!
이대로 대륙의 왕국들이 다 망하고 길드들도 박살이 나고 굶주린 혼돈이 승리하면?
그 밑에서 공적치 포인트 높은 플레이어가 새로운 왕이 될 게 분명했다.
“가짜 김태현 아니지?”
“아, 몇 번을 확인했냐! 게다가 지금 생방송 중이잖아!”
“김태현 놈한테 오죽 당했어야지.”
산적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김태현 관련 이야기는 워낙 허황된 게 많아서 믿기 힘들었다.
-내가 예전에 김태현 만나봤는데, 김태현은 자기랑 완전히 똑같은 분신들 여러 개 데리고 다니더라. 그래서 그 분신을 공격하면 다른 곳에서 나타나서 역습을 하는 거야.
└무슨 진시황이냐? 개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스킬이 있다고??
-내 생각에는 아마 김태현이 돈 들여서 자기랑 닮은 플레이어들을 고용한 거 같음.
└확실히 판온 돌아다니다보면 김태현 닮은 놈들이 여럿 보이던데….
└그건 그냥 사칭범 아닌가?
하도 당한 사람들이 많아서 소문이 부풀려진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 상대하려는 입장에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 가장 겁이 많은 하쉬안이 입을 열었다.
“아… 그냥 김태현은 내버려 두고 다른 곳만 방해하고 튀면 안 되나? 그래도 보상은 받을 수 있을 텐데.”
이제까지 김태현을 노린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은 정말 없었다.
‘이번에는 꼭!’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았는데도.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려고 해도 떨칠 수 없는 두려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보상 받자고 여기까지 왔냐?”
“야. 하쉬안. 네가 중국인이라서 김태현한테 본능적으로 겁을 먹는 건 이해하겠는데 김태현도 사람이라고. 여기 상황을 봐. 김태현도 우리 못 쫓아온다니까.”
여기 파티는 김태현의 생방송을 아주 잘 보고 있었다.
원정대 이끌고 굶주린 혼돈 타격하러 온 만큼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김태현 잡으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김태현한테 한 방 먹여주고 튀면 보상이 오를 거라고.”
“그… 그래. 가자!”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태현의 레이드 방해!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았다지만 그들 넷이서 태현에게 덤벼드는 건 살짝 불안했다.
하지만 방해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레이드는 정교한 톱니바퀴 같은 거라서 조금만 건드려줘도 흐름이 깨지는 것이다.
찌익-
[<굶주린 혼돈이 하사한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혼돈의 장막이 위로 내려앉습니다!]
이들은 치밀하게 위장하고 대기했다.
태현이 방심하는 순간, 확실한 방해를 꽂아 넣을 것이다.
* * *
[미끄러집니다!]
[얼음이 떨어집니다!]
[……]
[……]
[……]
[카르바노그가 에다게르가 암살하려고 보낸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태현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미친…!’
지금 가까운 산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빙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날씨가 좀 맑아졌다 하더라도 조금 날아오르는 순간 지옥이 찾아왔다.
-주… 주인이여… 내가 아이스 드래곤이 된 거 같다. 내 색깔이 아직도 황금색인가??
-…내가 미안하다. 그냥 걸어 올라갈게.
설마 이 등산 자체가 이렇게 난이도 높을 줄은 몰랐었다.
스탯이고 스킬이고 다 묶어버리고 엿을 먹이는 살벌한 난이도!
태현은 한 손으로 빙벽에 검을 박고 반동을 줘서 위에서 떨어지는 얼음을 피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선수 멋집니다!”
밑에서 보고 있던 수많은 파티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배장욱도 박수를 치며 외쳤다.
“멋진 그림입니다!!”
“…….”
물론 위에서 듣고 있는 태현의 심기는 매우 복잡했다.
‘괜히 데리고 왔나?’
솔직히 말해서 정신 사나웠던 것이다.
파티원들이야 그렇다 쳐도 배장욱 저 양반은 눈치 없게 저렇게 환호성을….
‘같이 데리고 올 거 그랬군.’
콱!
태현은 간신히 빙벽을 기어올라서 정상에 도착했다.
[<굶주린 혼돈의 빙하 산맥>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냉기가 강해집니다!]
[사디크의…]
[태초의…]
[신성…]
[……]
[저항에 성공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하기 어려워집니다. 빠르게 움직이십시오!]
정상도 만만찮게 넓었다. 게다가 시간도 제한되어 있는 상황.
신의 예지가 먹혀들어간다 하더라도 깊숙한 곳에 박혀 있다면 찾기가 힘들었다.
‘폭탄으로 날려 버리면… 아니, 대참사가 날 수 있겠군.’
태현은 고민 끝에 다른 스킬을 하나 꺼냈다.
‘이건 쓸모없어서 잘 안 쓰던 스킬인데, 이렇게 쓰게 되나?’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을 시전합니다!]
[토템이 당신의 기도에 반응해 아이템을 내려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태현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사람들 몇몇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이 당신의 손에서 아이템을 가져갑니다.]
[미안합니다!]
“…?!??!???!”
“뭐, 뭐야?!”
4인조는 엎드려 있다가 기절할 듯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