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78화
‘미친놈인가?’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악마를 쳐다보았다.
여긴 빙하 지역이었다.
그리고 방금 빙결공이 뭐라고 하면서 움직였던가?
‘나약한 필멸자들. 이번에는 내가 자비를 베풀어주마’ ‘내가 여기 있는 적들을 먼저 상대해 보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얼마나 됐다고 도움 요청이라니.
케인도 저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그냥 뒤지라고 하자!
-이데르고 교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는 없겠소. 어차피 나중에는 죽여야 할 악마 놈인데 그냥 뒤지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헉. 개소리에 속아 넘어갈 뻔했잖아.”
태현은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는 교단 NPC들 때문에 최면에 걸릴 뻔한 것이다.
이다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쟤네들 말에 넘어가시면 안 되는 거 알죠?”
“너무 그럴듯해서 순간 속을 뻔했네.”
물론 태현도 빙결공이 죽으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하겠지만, 지금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전력 중 하나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배신을 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지원하러 움직인다!”
-저걸 구해야 한다니….
-이번 아키서스 교황은 좀 너무 무른 것 같소. 예전 아키서스 교황들은 엄격하고 단호했다는데.
“다들 조용히 하도록!”
태현은 NPC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이동 명령을 내렸다.
바글바글 모인 파티들과 NPC들이 지휘를 받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담긴 얼음 폭풍이 멀리서 몰려옵니다.]
[눈사태를 주의하십시오! 이 지역은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악마. 푸르네우스는 뭘 어떻게 했길래 위기에 빠진 거지?”
태현은 악마에게 물었다.
악마 공작은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태현이 가끔 성도 뺏고 영지도 불태우고 부하도 죽이고 해서 친근하고 마음 넉넉한 호구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기본적으로 악마 공작은 비열하고 잔혹한 이들인 것이다.
그런데 가자마자 지금 위기에 빠지다니?
-주인님의 힘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이 쓰신 힘은 오히려 상대에게 빼앗겨 들어갔습니다.
“!”
악마의 설명은 놀라웠다.
빙결공이 부리는 냉기의 힘이 그대로 상대한테 뺏겨 들어갔다니.
‘그 정도였나?’
생각해 보니 여기는 <굶주린 혼돈의 빙하>.
이 안을 돌아다니는 냉기의 힘을 적이 조종할 수 있다고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카르바노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악마 공작 정도 되는 자가 자기 힘도 뺏긴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말합니다.]
‘하긴 그것도 그래.’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이 이데르고 교단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해서 아키서스의 권능을 다 뺏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푸르네우스는 고작 빙하 들어왔다고 자기 힘 뺏겨서 당하고 있다니….
‘한심한 놈 같으니. 다른 교단 NPC들이 죽게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있다니까.’
[카르바노그도 동감합니다!]
* * *
-비켜서라!
-안 됩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빙결공이 냉기의 창을 불러냅니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습니다.]
태현이 막 도착했을 때, 푸르네우스는 거대한 얼음의 창을 상대한테 집어 던지고 있었다.
쩌저저저적!
안 그래도 추운 공기가 푸르네우스의 힘으로 더욱더 온도가 내려가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이라면 그 주변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
그러나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타락한 냉기의 정령왕이 역소환을 시전합니다!]
[냉기의 창이 흩어집니다!]
-가소롭구나, 악마 놈아! 네놈의 힘은 여기서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정령은 몸을 부풀리더니 거대한 주먹으로 푸르네우스를 후려갈겼다.
푸르네우스는 재빨리 몸을 날렸지만 완전히 다 피해내지는 못했다.
콰당탕!
꼴사납게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푸르네우스.
그 모습에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지금 그게 뭐하는 거냐!”
-닥쳐라! 네놈이 성만 훔쳐가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
태현은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저건 태현의 잘못이 맞았으니까.
-안 그래도 네놈이 정령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네놈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아주 잘 됐구나!
“!”
태현은 멈칫했다.
“그건 노예로 부리는 게 아니라….”
그러나 정령왕은 태현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푸르네우스한테 한 말이었다.
쾅!
타락한 정령왕이 거대한 검을 만들어서 휘두르며 푸르네우스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내가 아니라 푸르네우스였군.’
태현은 안심했다.
영지에서 지금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정령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무심코 변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격할까요?”
“그래. 공격 명령을 내려라!”
태현은 뒤에 신호를 보냈다.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부터 NPC들까지 일제히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아키서스 포병대가 공격을…]
[전술 스킬로 인해 추가 보너스를…]
[신성…]
[광역 마법들이 수십 개 이상 합쳐지며 위력이 증폭됩니다!]
[……]
[스킬들이…]
[……]
[버프로 인해 공격력이…]
지금 원정대는 태현이 이제까지 퀘스트를 깨기 위해 모은 전력 중 가장 규모가 큰 전력이었다.
그런 만큼 기대에 빗나가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작정을 하고 쏘아대는 아키서스 포병대의 공격은 주변 빙하를 박살내고 공기를 뒤흔들었다.
골짜기에서부터 잔뜩 버프를 받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그에 못지 않았다.
아껴뒀던 광역기를 날려가면서 정령왕을 제압!
-미친놈들아 제대로 맞추지 못하겠냐!!
물론 숫자가 숫자인 만큼 푸르네우스한테도 공격이 좀 날아왔다.
각 파티장들은 미안해하며 태현에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지금 급하게 쏘다보니 조준이 정확하게 안 되고 있습니다! 강하게 주의를 내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마음껏 쏴라.”
“…어? 괜찮습니까?”
“그래. 악마 공작은 이해해 줄 거다.”
“알겠습니다!”
파티장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난이도 높은 레이드는 실수 한 번 하면 서로 부모님의 유무를 물을 정도로 엄격한 곳이었다.
이번 레이드는 여러 파티들이 연합해서 공격을 하고 있을 정도로 고난이도의 레이드.
누구든 이런 레이드의 총파티장을 맡게 된다면 신경이 날카로워질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응원해 줄 줄이야….
“조준은 좀 빗나가도 괜찮으니까 더 공격해!”
“알, 알겠습니다!”
[빙하의 냉기가 정령왕을 회복시킵니다.]
[타락한 냉기의 정령왕이 다시 부활합니다!]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나는 정령의 왕! 어떠한 공격으로도 쓰러지지 않는다.
“!”
바로 부활한 정령왕의 모습에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원래라면 바로 역소환이 됐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런데 바로 부활하다니.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은 나는 무적이다! 정령계를 어지럽히는 타락한 자들을 심판하겠노라!
“공격 온다! 움직여!”
“탱커들 앞으로!!”
정령왕이 움직일 기색을 보이자 각 파티장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파티별로 빠르게 나눠지며 거리를 벌렸다. 서로 광역기를 피하고 보스 몬스터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탱커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막을 수 있을까?’
‘이쪽으로만 오지 마라. 이쪽으로만 오지 마라!’
어지간해서는 이런 생각을 안 하지만, 굶주린 혼돈 퀘스트는 아직 아무도 깬 적이 없는 미지의 퀘스트였다.
저 보스 몬스터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공격을 해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이쪽으로 오면 막을 자신이 없다!
‘제발….’
그리고 정령왕이 움직였다.
뒤쪽에 있는 푸르네우스를 향해서.
-?!?
방심하고 있던 푸르네우스가 기겁해서 몸을 돌렸다.
원정대가 공격을 시작해서 어그로가 저쪽으로 쏠린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정령왕이 무시하고 푸르네우스만 노린 것이다.
-정령을 노예로 부린 악마 놈아! 네놈을 그냥 내버려 둘 줄 알았느냐! 어디 한번 재주를 더 부려보거라!
-이… 이 하찮은 정령 주제에!
“…….”
태현은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푸르네우스를 데리고 온 건 잘한 짓이었다는 것을!
‘푸르네우스에게는 재능이 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재능.
그건 바로 탱커의 재능이었다.
악마 공작인 만큼 어딜 가든 싫어하는 놈들이 여럿 나오는 것이다.
“잘 됐다. 이렇게 된 이상 푸르네우스한테 시간을 끌게 하고 우리는 공략 방법을 찾자!”
-그거 정말 좋은 방법이군.
-동의하오.
다른 교단의 NPC들도 태현의 빠른 판단에 만족스러워했다.
보아하니 지금 정령왕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공략하기 어려워보였다.
무식하게 계속 공격을 퍼붓기보다는 다른 공략 방법을 찾는 게 맞았다.
-강한 정령들은 소환될 때 소환사의 힘을 빌리거나 강력한 아이템의 힘을 빌리곤 하지. 아마 이 정령왕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맞는 말이다. 정령왕의 힘을 유지시켜주는 아이템이 이 빙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해. 그걸 찾아서 파괴하면 놈도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겠지!
“확실히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무한히 소환될 수는 없겠지.”
서로 전문가인 만큼 태현과 다른 교단 NPC들은 이야기가 빠르게 통했다.
옆에 있던 푸르네우스의 부관은 당황해서 외쳤다.
-아, 아니! 여러분! 주인님을 구해주셔야죠! 주인님께서 위험하시지 않습니까! 주인님을 지금 설마 미끼로 쓰시겠다는 겁니까?
“미끼라니. 푸르네우스는 지금 숭고한 희생을 하고 있는 거다.”
-맞는 말이다. 지금 악마 공작의 비천하고 더러운 삶 중 유일하게나마 가치가 있는 순간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이래서 악마들은….
교단 인물들의 폭언에, 악마 부관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필멸자 새끼들…!
악마 부관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자 태현은 바로 태도를 바꿨다.
“이봐. 푸르네우스가 부하들한테 그렇게 잘 해준 편은 아니잖아? 응? 푸르네우스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나? 나중에 그냥 협박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라고.”
-그래! 이 악마 놈아.
태현과 폴로뮤스, 아크락스가 무기를 겨누며 말하자 악마 부관은 겁에 질렸다.
[빙결공의 부관이 겁에 질립니다!]
[협박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하… 하지만 다른 부하 악마들은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지켜볼 거다. 보고 있어라.”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악마들 앞에 섰다.
대기하고 있던 악마들은 웅성거리다가 태현을 보고 의아해했다.
“악마들아! 빙결공께서 저 포악한 정령의 시선을 끌어준다고 하셨다. 그사이 우리는 놈을 공략할 방법을 찾는다!”
-…엥? 그러셨다고?
-주인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근데 따져봤자 어쩌겠어. 아키서스 놈이 우리 말을 들을 놈도 아니고. 괜히 까불다가 죽기 싫다구.
[악마들의 친밀도가 높습니다!]
[악마들 사이에서 평판이 매우 무시무시합니다!]
[……]
[……]
[설득에 성공합니다!]
태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부관은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런 한심한 악마 새끼들…!
이러니까 맨날 교단들한테 지는 것 아닌가!
* * *
“주변을 샅샅이 뒤져! 이동 속도 빠른 사람들이 나서줘야 해!”
“수색 스킬 있는 사람 이쪽 좀 훑어줘!”
자리에 모인 파티들은 필사적으로 수색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악마 공작이 나서서 시간을 끌어줬지만,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르게 찾아야 한다!
‘굶주린 혼돈 때문에 스킬에 자꾸 페널티가 붙는군.’
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살벌한 날씨, 굶주린 혼돈의 페널티. 뭘 찾으려도 해도 보통 난이도가 아니었다.
정말 방법이 없나?
[카르바노그가 <행운의 바람>을 불러보는 건 어떠냐고 묻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태현은 당황했다.
아까 얼음 폭풍이 부는 걸 보고서 그런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