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72화
정수혁의 말에 최상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키서스 교단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골짜기에 왜 악신 교단부터 악마 공작까지 있단 말인가.
‘분명 굶주린 혼돈 때문에 지형이 달라진 게 틀림없어!’
“거기서 뭐하냐 너희?”
“!!”
익숙한 목소리에 일행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데르고 교단의 진영과 빙결공의 진영 사이에서 태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현아!!!”
“…왜 이렇게 오바를?”
최상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치자 태현은 살짝 당황했다.
누가 보면 몇 년 정도 떨어져 있다가 만난 줄 알 것 같았다.
“김태현 선수!!”
눈물을 글썽거리는 건 최상윤 혼자가 아니었다. 배장욱 PD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태현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PD님은 왜?”
“그게 이야기하면 정말 길어지는데… 하여튼 만나서 너무 반갑습니다!”
마계에서 떨어졌을 때 아키서스를 만나도 이 정도로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랭커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외쳤다.
“김태현 선수!”
“…어. 우리 아는 사이였나?”
“그냥… 반가워서 말해봤는데요.”
“…….”
태현은 랭커들을 무시하고 PD에게 물었다.
“혹시 이번에 진행하는 퀘스트 진행 방송 때문에 직접 오신 겁니까?”
“맞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제가 중계부터 시작해서 직접 현장에서 전두지휘를….”
“아니. 굳이 오실 필요까지 있었나 싶은데요.”
태현은 최상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퀘스트 영상은 재밌는 부분만 잘라내서 재밌는 거지, 그걸 하나하나 다 보여주면 지루할 수밖에 없지 않나?
“아닙니다. 김태현 선수. 저는 확신이 있습니다.”
“글쎄… 후회하실 것 같은데. 어쨌든 알겠습니다. 가능한 도와드리긴 하죠.”
인연이 있기도 하고, 태현 본인도 홍보를 해야 하는 만큼 배장욱의 제안은 나쁘진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될 뿐!
‘저러다가 방송국에서 괜히 욕먹는 거 아닌가?’
너무 스케일을 크게 잡은 것 같은데….
“그런데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여기 있는 악마들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네?”
“악마들도 음식을 잘 먹으면 버프가 들어가잖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태현의 모습에, 배장욱은 자신의 상식이 이상한 건가 혼란스러워했다.
* * *
태현은 어떻게든 이데르고 교단과 푸르네우스의 군대를 이끌고 산맥을 넘어 골짜기까지 오는 데에 성공했다.
푸르네우스는 도착하자마자 거만하게 말했다.
-골짜기의 문을 열어라!
어떤 악마 공작도 들어가지 못한 골짜기의 성문.
그 성문을 처음으로 지나서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기회를 봐서 계략을 펼칠 수도 있고….
“미쳤냐? 밖에서 대기해라.”
물론 태현이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었다.
“내 명령은 계속 거절하고 트집 잡던 놈이 어디서 동맹 행세야? 밖에서 기다려라.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순간 굶주린 혼돈이고 뭐고 너부터 죽는 거야.”
-역시 시꺼먼 속셈을 갖고 있었군! 네놈이 말한 연합이란 게 이런 거였나?
산맥에서 벗어나자 태현의 태도는 매우 달라졌다.
골짜기 앞이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태현은 아쉬울 것 하나 없으니 다른 자들이 숙여야 한다!
의외로 폴로뮤스는 별 불만이 없었다.
-당연히 다른 교단의 영지에 들어갈 수는 없겠지.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멍청한 역병쟁이 놈들…! 이 모욕에도 가만히 있다니!
-모욕이고 뭐고, 난 저 저주 받은 골짜기에는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다.
폴로뮤스의 말에 페르스메스도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교단, 특히 악신 교단 입장에서는 저 골짜기는 지옥의 문보다 더 무서운 문이었다.
괜히 들어갔다가 잘못 걸리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위험한 곳!
-…….
그렇게 말을 들으니 푸르네우스도 갑자기 골짜기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하긴 기분 나쁜 저곳에 들어갈 필요가 없겠군. 나도 밖에서 기다리겠다.
이데르고 교단도, 악마들도 서로 골짜기 앞에 진영을 만들었다.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기 전까지 쉬면서 지낼 진영이었다.
-…?
-???
[요리를 시작합니다!]
[<아키서스의 요리:악마>를 사용합니다.]
[……]
[……]
진영을 만들고 안에 들어가서 누워 있던 악마들은 갑자기 진영 앞에서 요리를 시작한 태현의 모습에 황당해했다.
아키서스 놈이 드디어 미쳤나?
-뭘 만드는 거지?
-뭐든 간에 우리에게 좋은 건 절대 아닐 거야. 조심하라고.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
악마들은 경계심과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태현이 깔아 놓은 거대한 가마솥들에서는 군침 도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악마들의 허기를 자극하는 먹음직스러운 냄새!
‘요리 스킬 중에서 <아키서스의 요리:악마>는 정말 쓸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아키서스의 요리:행운>, <아키서스의 요리:신성> 같은 스킬들은 얻었을 때부터 쓸모가 있어 보였고 실제로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아키서스의 요리:악마> 스킬은 얻었을 때부터 황당한 스킬이었다.
<아키서스의 요리:악마>
악마를 위한 요리를 시도합니다.
차라리 악마를 사용해서 요리하는 스킬이라면 납득이나 했을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그건 아니라고 당황합니다.]
하지만 악마를 위한 요리 스킬이라니.
이걸 정말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쓸 기회가 오는구나!
“다들 도와주겠나?”
“예!”
골짜기에 있던 요리사 플레이어들이 태현을 돕기 위해 나왔다.
골짜기에 있는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결코 만만한 플레이어들이 아니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진 요리사 플레이어들!
특히 골짜기는 가난했을 때부터 요리 만들어서 뿌리는 이벤트는 진행했을 정도로 요리사 플레이어들과는 인연이 깊었다.
“콜린이다! 골짜기에 있었구나!”
“콜린이 누군데?”
“너 콜린을 몰라? 괴식 요리로 플레이어 세 명을 로그아웃시킨 요리사잖아!”
“…미친놈아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냐??”
꼭 콜린 같은 괴식 요리 요리사들뿐만 아니라, 파워 워리어 소속 요리사 등 평범하게 실력 좋은 요리사들도 많았다.
그들은 각자 가마솥을 끌고 와서 밑에 불을 당겼다.
“태현 님. 알고 있습니다.”
“응?”
“독을 넣는 거죠?”
“…아니야.”
파워 워리어 요리사들이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모습에 태현은 어이없어했다.
“아닙니까!?”
“그래. 진짜 악마들한테 대접해 줄 요리 만드는 거다.”
“와… 신기하네요.”
“악마들한테 줄 요리면 재료 대충 써도 되나?”
파워 워리어 요리사들은 수군거렸다.
이제까지 그래도 나름 길드의 명성을 위해 재료도 양심껏 쓰고 명예를 지켜 왔었는데….
악마 상대라면 그런 걸 안 지켜도 되지 않을까?
“흠. 일리가 있다. 그러면 상한 재료 같이 쓰기 애매한 것들부터 우선적으로 쓰자고.”
“알겠습니다!”
[여러 요리사들이 작업을 돕습니다!]
[보너스를 받습니다!]
[재료들 중 상한 재료들이 있습니다.]
[페널티가…]
[전술 스킬이 높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악마를 위한 정체불명의 수프>가 완성됩니다!]
“넣고 끓여!”
“이것도 넣어도 됩니까?”
“넣어도 돼. 어차피 요리 스킬로 커버할 테니까.”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평소에 좀 쓰기 애매했던 재료들을 닥치는 대로 꺼냈다.
태현은 재료를 받고 넣어도 되는 건 솥 안으로 풍덩 집어 던졌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아키서스의 권능 요리> 스킬을 사용해서 커버했다.
하급 당근, 돌연변이 당근, 상한 당근, 하급 양파, 상한 양파, 뭉개진 감자 등등이 솥 안으로 차례대로 들어갔다.
“오염된 고기도 넣어도 될까요?”
“괜찮아. 악마들은 위장이 튼튼해서 먹어도 된다.”
녹색으로 변한 고깃덩이도 솥 안으로 들어갔다.
각종 향신료를 넣어서 끓이고 있었기에 어지간한 재료는 들어가도 티가 나지 않았다.
“계속 계속 끓인다! 질보다는 양이 필요하니까!”
“예!”
푸르네우스가 이끄는 악마들의 숫자는 많았고, 버프를 주려면 보통 양으로는 안 됐다.
‘골짜기도 한계가 있으니 고급 재료는 절대 안 되고, 싸구려 재료부터 시작해서 흙이나 돌멩이를 넣어서라도 양을 맞춰야 한다.’
태현은 완성된 수프부터 악마들에게 넘겼다. 물론 악마들이 처음부터 그냥 덥석덥석 먹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걸 먹을 거 같나!
-아키서스 놈 우리가 아무리 호구 같아도 그렇지 진짜 호구로 보나!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 해줘도 난리네.”
태현은 길게 설득하지 않았다.
수많은 악마들을 상대해 오면서 이미 경험이 쌓였던 것이다.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가장 좋았다.
-…누가 먼저 먹어볼 놈 없나? 다른 악마들을 위해 희생해볼 놈?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네놈이 먹어라!
-좋다! 싸움에서 진 놈이 먹는 거다!
악마들은 서로 멱살 잡고 다투다가 결국 약한 놈을 하나 뽑았다.
-…!
수프를 벌컥벌컥 들이켠 악마는 눈을 크게 떴다.
[<악마를 위한 정체불명의 수프>를 마십니다!]
[악마의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합니다!]
[버프가…]
[요리 스킬이 오릅니다!]
‘먹었군.’
태현은 안심했다.
악마 한 놈이 먹어서 멀쩡하단 걸 알았으니(사실 재료가 멀쩡하진 않았지만), 이제 다른 놈들도 차례로 먹으리라.
-크악! 독이 있다! 독이 있어!
-뭐!? 그게 정말이냐!? 역시….
-그러니까 내가 혼자 먹어치워야겠다! 다들 비켜라!
-…이 새끼 끌어내!! 어디서 개수작을!
맨 처음 악마가 확인하자 그 다음부터 악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서 아귀처럼 먹어대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언제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존재였다.
이 굶주림을 잠시나마 달래고 힘을 올릴 수 있다면…!
“저. 태현 님.”
“?”
“저기 이데르고 교단도 버프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저기는 알아서 해먹고 버프 주지 않을까? 악마들하고 다르잖아.”
“하지만 급하게 온 바람에 요리사들이 없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식재료는 물론이고요.”
“그렇긴 한데….”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괴식 요리>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보겠습니다.”
“…마음을 사로잡을 건 없고, <괴식 요리>는 어차피 효과 좋은 편이니까 상관없긴 하겠군.”
악마들이야 악마를 위한 요리를 따로 만들어야 했지만, 이데르고 교단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괴식 요리를 해서 줘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이들!
“알겠습니다!! 괴식 요리사들 집합해라!”
“앗?! 괴식 요리 해도 됩니까!?”
“사기 떨어진다고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태현 옆에서 요리하고 있던 파워 워리어 요리사들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괴식 요리 먹이면 이데르고 교단 놈들 탈주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설마. 그 정도도 구분 못하진 않겠지. 강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인데. 역병도 참는 놈들이 괴식 요리를 못 참는다고?”
-와아아아아아!
“!”
뒤에서 이데르고 교단 NPC들이 소리 지르는 게 들리자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설마 진짜 탈주하나?
-제법이군! 이런 요리를 할 줄 안다니. 교단 요리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요리의 재능이 있군!
“…….”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탈주보단 나은 상황이긴 했는데….
저게 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 * *
“…그래서 지금 계속 요리하느라 바쁜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건 찍어봤자 별로 재미도 없잖습니까.”
“너무 재밌습니다!”
배장욱은 즉답했다. 듣는 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