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71화
태현도 푸르네우스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조언하러 왔으니까 알아서 골라 들어라. 의견 결정이야 다수결로 하면 될 거고.”
-…잠깐.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현을 푸르네우스가 멈추게 했다.
이 아키서스 놈이 지금 어디서 개수작을?
“왜 그러지?”
-다수결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지금 다수결의 법칙을 무시하는 거냐? 네가 그러고도 악마냐?”
태현의 말에 푸르네우스 뒤에 있던 악마들도 수군거렸다.
마계에서도 의외로 다수결의 법칙은 많이 쓰였던 것이다.
악마 공작들끼리 모였을 때 의견 결정을 내리거나, 앞으로의 마계 발전을 위한 계획을 세울 때 꼭 필요한 게 다수결의 법칙.
그렇지 않으면 악마들끼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수결로 정하면 네놈들 둘이 짜고 치겠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아느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악마 놈이 뇌 대신 얼음덩어리를 집어넣었나?
폴로뮤스는 매우 불쾌해했다.
아키서스 교단이라면 이데르고 교단 입장에서도 오래된 숙적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이데르고 교단이 무작정 편을 든다니.
“그러게 말이다. 폴로뮤스. 저 푸르네우스 놈이 이데르고 교단을 정말 개무시하는 거 같군.”
태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폴로뮤스한테 속삭였다. 폴로뮤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동의한다.
-저 저 저 찢어 죽일 놈의 혓바닥!
창백한 푸르네우스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주변에 뒤덮여 있던 얼음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만약에 받아들이기 싫다면 따로 행동해도 좋다. 물론 악마 공작쯤 되는 자가 자기 기분 때문에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 악마들은 종종 그러니까.”
-주인님! 저놈에게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아키서스 놈이 감히 우리를 조롱하다니!
뒤에 있던 악마들이 분노해서 외쳤다.
감히 인간 주제에 빙결공 푸르네우스의 냉정함을 무시하다니!
마계의 공작들 중에서도 절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는 그 빙결공 아닌가.
절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물론 악마들의 응원은 딱히 푸르네우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쾌했다.
-도움 안 되는 놈들 같으니….
“자. 내가 굶주린 혼돈의 군단을 상대하면서 얻은 정보를 공유해 주겠다. 나는 이미 군단 하나와 붙어서 승리한 적이 있지.”
-!
-…!
태현의 말에 둘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굶주린 혼돈의 군단을 벌써 하나 해치웠다고?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매우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은 쉽게 물리칠 수 없는 강적이었으니까.
“그 군단에서 얻은 정보는 바로 다음 침략 계획이다. 굶주린 혼돈이 직접 이 산맥을 노리고 있다더군.”
-!
-!
[!]
폴로뮤스도, 푸르네우스도, 그리고 카르바노그도 놀랐다.
[그게 진짜냐고 카르바노그가 묻습니다.]
‘아니?’
[……]
물론 그런 거 없었다. 그냥 포격으로 날려 버렸는데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태현은 여기 올 때부터 그걸 이용해서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다.
이런 걸 활용하지 않으면 뭘 활용한단 말인가.
“악마 공작은 물론이고 이데르고 교단의 전력이 여기 모여 있으니 당연한 계획이겠지.”
-어느 정도 규모로…?
“산맥을 아예 포위하려고 하던데?”
-!
“내가 기지를 불태운 것도 다 그래서였지.”
[폴로뮤스가 납득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이데르고 교단 내에서 평판이 오릅니다.]
[폴로뮤스의 친밀도가…]
[……]
이상하게 선신 교단보다 악신 교단 평판, 친밀도가 더 잘 오르는 것 같긴 했지만 태현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당장 빠져나가야 한다!
폴로뮤스는 포위당하는 일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자, 다 같이 빠져나가서 이동하자고!”
-…….
푸르네우스는 둘의 대화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정말 굶주린 혼돈이 이 산맥을 총공격하려고 한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 맞았다.
한시라도 빨리 포위망을 뚫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악마 공작으로서 굶주린 혼돈에게 당한다면 아키서스에게 당한 치욕보다 더욱 심한 치욕이 될 테니까.
게다가 아키서스에게 당하면 마계로 추방당하기나 하지, 굶주린 혼돈한테 잘못 당하면 영원히 삼켜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저게 정말 맞나?
-다른 왕국에 교단들도 있는데 여길 먼저 노린다고?
“아 말을 해줘도 왜 못 알아먹어요! 이데르고 교단이 그만큼 위험하니까 그런 거죠!”
옆에 있던 이다비가 화를 내며 말했다.
“기껏 악마 놈들한테 공유해 줬더니 이런 의심이나 받고! 태현 님. 앞으로는 그냥 공유해 주지 마세요!”
“그러게 말이다. 내 진심이 무시당하니까 너무 슬프군.”
이다비와 태현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푸르네우스를 나쁜 사람, 아니 악마로 몰았다.
뒤에 있던 악마들도 수군거렸다.
-일단 피하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서는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결국 푸르네우스도 이번에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산맥을 빠져나가는 것에 동의하겠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태현 님. 여기 정말 화술 스킬 올리기 좋은데요?
-내가 뭐라고 그랬어? 올리기 좋다니까.
* * *
“헉… 헉헉. 죽는 줄 알았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맡기시라니까….”
“아, 아니.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제가 직접 현장에 있어야 해요.”
이제는 MBS의 간판이나 마찬가지인 배장욱 PD는 헉헉대며 플레이어들의 뒤를 쫓아갔다.
[지구력이 바닥났습니다!]
[HP가 감소합니다!]
“쉬, 쉬었다 갑시다.”
“지금 안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예전 생각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배장욱은 지금 판온에 접속해서 에랑스 왕국에서 목숨 걸고 골짜기까지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레벨 300 넘는 랭커들도 잘못 걸리면 위험한 상황에서, 기껏해야 레벨 100을 조금 넘긴 배장욱이 필드를 돌아다니는 건 목숨 건 일이라고 봐야 했다.
당연히 혼자 가는 건 아니고 여러 랭커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인만큼 알고 지낸 랭커들은 여럿이었다.
“근데 HP가 너무 감소해서….”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빨리 움직이자고.”
랭커, 김재준이 배장욱을 업었다. 배장욱은 쑥스러워했다.
“이거… 미안해서….”
“PD님 덕분에 방송에 나올 수 있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실하긴 했지만 딱히 재미가 없던 김재준이었다.
그런 김재준의 캐릭터를 만들어 주고 방송에 꾸준히 내보내준 건 배장욱!
“맞죠. 이 정도 챙겨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랭커, 노유리도 동의했다. 노유리도 마찬가지로 배장욱 덕분에 인기를 얻은 플레이어였다.
“다들…!”
배장욱은 감동했다.
이제까지 쌓은 인연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PD님. 김태현 선수 만나면 소개 좀 시켜줄 수 있죠? 저 진짜 팬이거든요.”
“으흠. PD님. 저도 사실….”
“…….”
배장욱은 정색했다. 다른 랭커들은 그걸 눈치 채고 급히 PD를 달랬다.
“아 꼭 그게 목표인 건 아니구요. 헤헤.”
“1차 목표는 PD님을 안전하게 호위하는 겁니다. 저희의 진심을 믿으시죠?”
“못 믿겠습니다. 흥.”
파사삭-
“!”
“뭔가 있다! PD님 데리고 뒤로 빠져!”
떠들던 랭커들은 즉시 반응했다. 한 명이 배장욱을 데리고 뒤로 빠진 다음 나머지는 싸울 준비를 했다.
‘제발 한 명, 아니면 두 명까지만… 세 명이면 큰일난다.’
세 명이면 상대하다가 동료를 부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재준은 눈을 질끈 감고 빌었다.
“어? 사람이 있잖아?”
“!”
놀랍게도 나타난 건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아닌 플레이어들이었다.
나타난 플레이어들은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혹시 이 근처에서 팔 여섯 개 달린 사람 못 보셨나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아. 못 보셨나 보구나. 네. 그런 사람이 있어요.”
“!??”
랭커들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있는 거지?
“저 사람 혹시 굶주린 혼돈 세력 쪽 플레이어 아니야?”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다가 잘못 되면 막 종족도 변한다던데…?”
수군거리는 랭커들.
배장욱은 눈을 깜박이다가 비명지르듯 외쳤다.
“정수혁 선수! 최상윤 선수 아니십니까!?”
“어. 맞는데… 아니. 배장욱 PD님 아니세요?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최상윤은 희한해했다.
PD쯤 되는 분이 이렇게 상황도 안 좋은데 굳이 접속해서 고생할 이유가 있나?
“이번 퀘스트 진행 방송은 제가 직접 현장에서 주도하고 싶어서 이렇게 접속했습니다.”
“와. 사서 고생을… 케인도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둘의 대화에 웅성거리던 랭커들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팔이 여섯 개 달린 플레이어라면 케인 선수인가요?!”
“네. 맞습니다. 지금 흩어져서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지형이 변하고 지도도 안 먹히고 스킬도 먹통이라….”
그랬다.
케인이 스킬 하나 잘못 써서 미아가 되어버린 탓에, 최상윤과 정수혁은 케인을 찾고 있었다.
-너희 잘 오고 있지? 굶주린 혼돈이 대륙에 장막 펼쳐서 스킬들 오작동 일어나는데 괜히 억지로 텔레포트 스킬 같은 거 쓰지 마. 역효과 난다.
-물… 물론이지. 우리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당연히 우리는 그런 거 안 쓰지. 조용히 걸어 올 생각이었다고.
-하긴.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걸 말했군.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할 텐데.
…케인이 미아가 된 것에는 둘의 책임도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로 가시는 거라면… 일단 PD님을 데리고 가자. 수혁아.”
“하지만 케인 씨는….”
“걔는 지가 알아서 잘 버티겠지. 레벨이 몇인데. 버티고 있으라고 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정수혁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 정도쯤 됐으면 어디 떨어져도 알아서 버틸 수 있어야 했다.
‘…셋이 사이가 안 좋은가!?’
배장욱은 둘의 대화를 듣고 당혹스러워했다.
* * *
“그래서, 방송은 언제부터 시작할 겁니까?”
“도착하는 순간부터 진행할 겁니다!”
“…어.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최상윤은 살짝 당황했다.
뭐든지 편집을 거쳐야 재밌는 법이었다.
판온 관련된 콘텐츠나 다큐멘터리도 다 길고 긴 편집을 거쳐서 나오지 않았던가.
“물론 편집을 해서 방송으로 나가는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방송으로도 진행을 할 겁니다. 그걸 위해 제가 직접 온 거 아니겠습니까.”
배장욱은 확신이 있었다.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퀘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해도 재미가 있을 거라고.
-제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이번 생방송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정식 채널에서도 올라가게 해주십시오!
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확신 덕분이었다.
‘아니 괜히 걱정되네.’
최상윤은 괜히 걱정이 됐다.
판온 1 때부터 태현을 봐왔기에 퀘스트가 꼭 재밌는 부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PD 불렀는데 ‘대형검 100,000개 만들기 생중계’ 같은 걸 진행하면 수면방송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괜히 그들 때문에 PD가 잘리는 거 아닐까??
‘말려야 하나? 태현이한테 뭐라도 좀 해보라고 해야 하나?’
“…잠, 잠깐. 저거 뭐지?”
앞에 가던 랭커 한 명이 기겁해서 돌아왔다. 정수혁이 왜 그러냐는 듯이 물었다.
“골짜기 방향이 맞습니다만?”
“아, 아는데. 앞에 이상한 게 있어요! 이데르고 교단 같은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여기가 다른 곳도 아니라 아키서스 교단 총본산 같은 곳인데. 이데르고 교단이 있을 리가… …있네???”
“!??!”
앞으로 갔던 랭커들은 황당함에 눈을 깜박였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얼음의 대지>를 시전합니다.]
[대지가 얼어붙습니다!]
“…….”
“…우리가 아마 다른 골짜기로 온 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