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70화
역병 주교 후계자, 페르스메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같은 교단인 척 나를 속이다니!
-그런데 아키서스 교단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
그건 그렇긴 하지!
성기사의 말에 페르스메스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원래 아키서스 교단은 그런 교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을 미리 들었는데도 속은 페르스메스 본인의 잘못이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사악한 놈들이지만, 굶주린 혼돈과 싸울 때는 도움이 될 겁니다.
[기지를 파괴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경험치가…]
-저 전술을 보십시오. 우리들이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과감한 전술입니다.
-…….
페르스메스는 계속 기지를 태우며 숫자를 모으는 태현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했다.
확실히 과감한 전술이긴 한데….
대체 뭘 노리는 거지?
[이데르고 교단의 성기사들이 늘어납니다!]
[전술 스킬이 낮습니다. 페널티를 받습니다.]
[……]
[……]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는군.’
판온에서는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이 많으면 지휘부터 시작해서 각종 부분들에 페널티가 왔다.
태현의 전술 스킬은 최고급 2 후반.
이쯤이면 대형 길드 길마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니, 더 높은 수준이었다.
전술 스킬을 굳이 저렇게까지 올리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물론 태현은 일부러 올리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그런데 지금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들을 지휘하는 건 금세 한계가 찾아왔다.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들이 생각보다 강하긴 한가보군.’
[카르바노그가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태현이 이데르고 교단을 너무 얕봐서 그렇지, 이데르고 교단은 절대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쟁쟁한 NPC들이 모두 살아 있는데다가 계속해서 대륙에서 버티고 있는 악신 교단 아닌가.
게다가 이 산맥에 있는 성기사들은 보통 성기사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악마 공작의 부하들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정예들!
‘맞는 말이야. 음. 이상하게 악신 교단만 만나면 좀 호구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 편하게 대하게 되는군.’
[카르바노그도 이해합니다. 악신 교단 놈들이 좀 칠칠맞은 경향이 있다고…]
그렇게 떠드는 사이, 태현은 성기사들을 이끌고 전초기지들을 파괴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데르고 교단 성소>에 도착합니다!]
[역병 선장, 폴로뮤스가 나타납니다!]
-반갑군.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여!
“이쪽도 반갑다.”
다시 만난 폴로뮤스는 저번보다 훨씬 더 강렬한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번은 각종 함정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으니 상태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장님. 아무리 그래도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과 손을 잡는 건….
-교단의 역사서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까. 너무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폴로뮤스를 따르는 역병 선원들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폴로뮤스가 화를 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들아! 지금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 같으냐? 굶주린 혼돈을 막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키서스 교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여기까지 찾아 온 교황한테 실례되는 소리 하지 마라. 용서하지 않겠다.
폴로뮤스는 그렇게 부하들을 단속한 다음, 태현한테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부하들이 무례한 소리를 했군. 잠깐. 뒤에 성기사들은 왜 다 여기 모여 있는 거지?
“음. 이유가 있다.”
태현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오면서 ‘너희 기지를 다 태워서 성기사들을 한 곳으로 모았어’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힘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기지를 전부 태웠다.”
-…….
-…내가 잘못 들었나?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잘 보면 알겠지만 이게 사실….”
[폴로뮤스가 실망합니다!]
[설득에 페널티가…]
[친밀도가 떨어집니다!]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
[……]
[설득이 실패합니다!]
‘안 되나?’
[카르바노그가 너무 만만히 본 거 같다고 말합니다.]
‘뭐 안 되면 튀어도 되긴 하는데.’
태현이 이런 과감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건 바로 남의 교단이기 때문이었다.
기지가 박살 나든 점령도가 넘어가든 자기 교단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과감한 수법!
‘그래도 아쉬우니 최대한 설득해 보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미친 전술이지 않나! 아무리 힘을 모으려고 해도 그렇지 기지까지 태우다니!
“기지를 내버려 두면 악마들이나 굶주린 혼돈의 부하들이 점령할 테니까.”
[역병 선원들이 경악합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악명이 올라갑니다!]
악신 교단 NPC들도 놀랄 만큼 과격한 발상.
태현은 살짝 억울해졌다.
‘지들은 뭐 얼마나 선하게 싸웠다고….’
쾅!
“!”
갑자기 들리는 굉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악마들이다!
-성소 앞에 악마들이 몰려 왔습니다!
“봐라! 내가 노린 게 이런 거다!”
우연이었지만 태현은 당당하게 우겼다.
약해 보이게 위장해서 상대를 끌어들이는 방법!
물론 진짜로 약해졌다는 게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럴듯하게만 들리면 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소 앞에 나타난 악마들이 옆으로 갈라서더니, 그 앞에서 악마 하나가 나타났다.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데르고 교단 놈들아!
-…?
-????
안에 있던 이데르고 교단 NPC들은 악마의 말에 당황했다.
뭐가 뭐라고?
-이것도 노린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태현 님. 좀 분위기가 많이 이상한데요….”
이다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수습 가능한가?
* * *
-이데르고 교단 놈들이 기지를 전부 태우고 있습니다!
-성기사들이 한쪽으로 모이고 있는 걸 보니 정말로 철수하려는 것 같습니다.
악마들은 재잘대며 공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빙결공, 푸르네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은 기지들을?
-하지만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푸르네우스가 악마들을 잘 믿지 않기는 해도, 이렇게 많은 악마들이 말하는 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주인님!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총공격을 할 것 같습니다!
-!
그제야 푸르네우스는 이데르고 교단의 속셈을 깨달았다.
더 이상 산맥에서 싸울 자신이 없으니 그냥 빠지고 둘을 싸움 붙이려는 게 분명했다.
-신을 섬긴다는 놈들이 이렇게 패기도 없고 겁쟁이 같을 줄이야! 하찮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주인님에 비하면 하찮은 놈들입니다!
아부하는 악마들의 말을 들으며 푸르네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비웃긴 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도 워낙 이데르고 교단과 치열하게 싸우느라 이쪽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만약에 이데르고 교단이 사라진다면?
전력이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 아닌가.
-…….
푸르네우스는 고민했다.
차라리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꼬드겨볼까?
선신 교단이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악신 교단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때와 경우에 따라서 악마들과도 손을 잡는 게 악신 교단.
어차피 산맥에서 철수하려던 놈들이었으니 이용 좀 하더라도 푸르네우스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내가 놈들을 직접 보러 가야겠다!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후후. 자세한 건 직접 가서 듣도록 해라.
* * *
-내 영광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이데르고 교단 놈들아!
푸르네우스는 오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에 발끈한 이데르고 성기사 몇 명이 외쳤다.
-감히 악마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지껄이는 거냐!
-역병의 세례를 받기 전에 꺼져라! 이데르고 님께서는 네놈 같은 악마들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성기사의 반응에도 푸르네우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보는 눈이 없을 줄이야. 지금 산맥 앞에 모인 굶주린 혼돈의 군세를 봐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대륙을 그대로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거대한 적을 내버려 두고 그런 간단한 계산도 하지 못하다니!
-맞다, 맞아!
-그것도 모르다니!
주인의 말에 모여 있던 악마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비웃어댔다.
성기사들은 분노로 떨었지만 악마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성기사들 사이에서도 동의하는 목소리가 하나 나왔다.
“네 말이 맞다 푸르네우스!”
듣고 있던 태현은 박수를 치며 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극도로 분노합니다!]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습니다!]
[분노로 인해 잠시 실어증 상태에 빠집니다!]
[……]
[……]
푸르네우스는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동작이 멈췄다.
그만큼 열이 받았다는 증거였다.
설마 이데르고 교단에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아키서스 놈이잖아??
-저, 저 아키서스 놈하고 동맹을 맺으라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쉿. 주인님의 말씀이잖아. 주인님의 말씀을 거역할 생각이냐?
-하지만 아키서스 놈이잖아!
-주인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악마들은 수군거리면서도 도망치진 않았다. 푸르네우스가 직접 말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푸르네우스가 지독한 냉기를 내뿜으며 살벌하게 말했다.
-감히 어떤 염치로 네놈이 나와 연합을 맺겠다는 것이냐??
“푸르네우스! 이렇게 보는 눈이 없을 줄이야. 지금 산맥 앞에 모인 굶주린 혼돈의 군세를 봐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대륙을 그대로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거대한 적을 내버려 두고 그런 간단한 계산도 하지 못하다니!”
-…….
[최고급 화술 스킬을…]
[……]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더 이상 분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합니다!]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습니다!]
[분노로 인해 잠시 실어증 상태에 빠집니다!]
[……]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와. 화술 스킬이 이렇게 오르는 건 처음 보는군.’
최고급을 찍은 다음부터는 아무리 모욕을 하더라도 정말 아주 조금만 올랐었는데….
빙결공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고마울 정도였다.
-…….
푸르네우스는 대답 대신 씩씩거리며 김만 내뿜었다. 주변이 어찌나 얼어붙었는지 악마들이 슬슬 도망칠 정도였다.
[카르바노그가 아마 할 말 없어서 자존심 때문에 저러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말한 게 있으니 말은 못 뒤집겠고, 태현하고 연합은 하기 싫고….
[카르바노그가 좀 달래주면 어떠냐고 묻습니다.]
‘아니. 역으로 가야지.’
“푸르네우스.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
“네가 그런 간단한 계산도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널 악마 공작으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런 간단한 계산도 못한다면….”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오오…! 한 번만 더 하면 안 되나?’
[카르바노그가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대는 악마 공작이었다.
저기서 한 번 더 찔렀다가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싸움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 * *
역병 선장 폴로뮤스.
빙결공 푸르네우스.
아키서스 교단 교황 김태현.
…셋이 앉아 있는 협상장의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다.
-그래서? 설마 네놈이 지휘를 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푸르네우스는 싸늘하게 말했다. 태현은 손을 내저으며 시치미를 뗐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조언을 할 뿐이지. 이데르고 교단을 돕기 위해서 왔으니까.”
-이데르고 교단은 도와달라고 아키서스 놈을 부른 건가!? 정신이 나갔나!?
푸르네우스의 당연한 의견 제시에도 폴로뮤스는 귀를 후비며 무시했다.
-우리 교단 일에 신경 꺼라. 악마.
-이 멍청한 놈…! 기껏 조언을 해줘도….
푸르네우스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왜 알려줘도 모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