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68화
최상윤과 정수혁은 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걸 보고 의아해했다.
“너 왜 그래?”
“왜 그러십니까? 혹시 골짜기로 가는 게 걱정되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에이. 설마. 케인이 여기서 가장 쉬울 텐데.”
최상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여기서 가장 골짜기로 가기 쉬운 게 바로 케인이었다.
직업 자체가 <아키서스의 노예> 아닌가.
애초에 아키서스 교단의 수장인 태현을 찾아서 날아가는 스킬들이 있는 만큼 그냥 스킬만 쓰면 됐다.
“…!”
케인은 무릎을 쳤다.
맞다!
그게 있었지!
“잠깐. 너 지금 놀라지 않았냐? 설마 생각 못하고 있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나를 뭐로 보고?”
“하긴 그렇겠지.”
최상윤과 정수혁은 케인의 정색에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 스킬을 그냥 놓치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 * *
-화신님.
골짜기에 있는 NPC들은 정말 종족부터 직업까지 제각각이었다.
거인, 고블린, 뱀파이어, 오크, 악마, 천사 등등.
정말 일부러 모으려고 해도 이렇게 모을 수 없는 라인업!
그중 가장 격이 높은 존재는 바로 여기 태현 앞에 있는 아키서스의 상급천사, 아흐다엘이었다.
아흐다엘은 검을 슥슥 갈더니 옆으로 내려놓고 살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실 줄 알았어요.
굶주린 혼돈이 깨어나서 활동하는데 대륙의 교단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여러 교단의 천사들이 돕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천사들은 사실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대륙으로 내려오면서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에게 기습을 받아 다들 크게 다쳤기 때문이었다.
아흐다엘도 골짜기로 온 다음부터는 대신전 안에서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니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겠군요. 드디어 굶주린 혼돈의 군세가 대륙을 불태우고 왕들의 목을 베어가며 이 골짜기 앞까지 쳐들어온 거겠죠?
“저번처럼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맞아.”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나눴던 대화와는 상황이 달랐다.
간신히 골짜기 앞에 있는 놈은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태현이 가진 밑천이 다 털리는 게 먼저일 테니까.
‘아. 다른 길드 놈들이 좀 잘 싸워야 하는데. 이 자식들 일부러 시간 끄는 거 아니야?’
다른 길드 사람들이 들었다면 매우 억울해했을 소리였다.
다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태현처럼 그렇게 밑천을 꼬박꼬박 쌓아 놓지 않았을 뿐!
흔히들 대형 길드쯤 되면 길드 하우스 지하에 비장의 수단 같은 걸 숨겨 놨을 거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사실 그런 길드는 의외로 적었다.
지금 당장 써서 이겨야지 그걸 언제 쓰려고 쌓아 놓는단 말인가.
도토리 심는 다람쥐처럼 계속 그걸 쌓아 놓는 건 태현 정도밖에 없었다.
온갖 종류의 적을 끌고 다녔던 판온 1 때부터 만들어졌던 습관이라 남들은 따라 하려고 해도 쉽게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아흐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굶주린 혼돈 놈들을 좀 더 단호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저희 같은 천사들의 실수군요.
“…?”
[카르바노그가 거기서 더 단호하게 죽이면 대체 어떻게 죽이는 거냐고 겁에 질립니다.]
아키서스 상급천사쯤 되면 이제 카르바노그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광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
태현은 살짝 기대하면서 물었다.
“그 말은 상처가 회복되었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싸울 수는 있어요. 참전하겠습니다.
“아니, 상처 회복 안 됐는데 억지로 싸우다가 쓰러지면….”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죠? 싸우는 거잖아요.
아흐다엘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상급천사 정도쯤 되면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정도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게 천사 종족인가?’
[…카르바노그가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거립…?]
“그래. 미안하지만 나도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라. 막을 수는 없지… 대신 필요한 상황에서만 싸워.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당연히 화신님의 명령을 따라야죠.
“혹시 다른 상급천사들은 더 올 수 없나?”
-이런 상황에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아흐다엘은 냉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굶주린 혼돈이 대륙 곳곳에 기운을 펼치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천사들이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것이다.
-화신님.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자면 지금 가장 급한 건 다른 교단들과의 연계에요.
“그렇군. 아무리 사이가 안 좋더라도 굶주린 혼돈 앞에서는 믿을 수 있으니까….”
-예? 아뇨. 못 믿죠. 배신자들은 언제든 나오는데. 제가 말한 건 화살받이로 쓸 놈들이 필요하단 거였는데요.
“…….”
태현은 못 들은 척을 했다.
<교단들의 단결-굶주린 혼돈 토벌 퀘스트>
대륙의 교단들은 예전부터 치열하게 싸우고 다퉈왔지만, 언제나 대륙의 위기가 닥쳐오면 서로 일치단결해서 맞서 싸웠다.
‘최근에는 나 혼자 싸운 기억밖에 없는데?’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적들이 신전 앞까지 몰려온 지금이야말로 교단끼리 서로 힘을 모아서 싸워야 할 때다.
각 교단 사이의 연락을 회복해라!
교단끼리의 연락이 회복된다면 앞으로 새로운 계획도 세울 수 있으리라.
보상: ?, ???, ???
-화신님. 다른 교단 놈들 믿지 마시고 그냥 걸어다니는 허수아비라고 생각하시고 적당히….
“그래 그래. 아흐다엘. 자. 상처가 덧난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라고. 펠마른! 좀 도와줘라!”
* * *
“큭큭큭.”
케인은 심호흡을 하며 준비를 했다.
뒤에는 케인의 몸집보다 몇 배는 커다란 짐수레가 놓여 있었다.
노드란체 섬에서 갖고 나온 각종 물자들!
교통이 완전히 차단되어서 물자가 부족한 지금, 이 물자는 골짜기에서 싸울 때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그러게. 나는 다른 놈들이랑 다르잖아?’
케인은 눈을 감고 이제까지의 세월을 되짚어봤다.
<아키서스의 노예>라는 직업 이름을 얼마나 놀렸던가!
하지만 이제 그 직업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가 왔다.
-주인님, 어디 계십니까!!
[스킬을 사용합니다!]
[이동합니다!]
‘큭큭큭.’
다른 팀원들이 열심히 개고생하면서 골짜기까지 가는 걸 생각하자 케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 신나!
[굶주린 혼돈의 힘이 대륙에 깔려 있습니다.]
[스킬이 방해받습니다!]
[위치가 틀어집니다!]
부우우우우웅!
갑자기 앞이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시야가 뒤흔들렸다.
쾅!!
“…….”
착지한 케인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여기 어디냐??’
분명 아탈리 왕국 같기는 한데, 주변은 굶주린 혼돈의 기운 때문에 온통 시커멓고, 곳곳에서 살벌한 울음 소리 들려오고….
-여기 모험가 놈이 있다!
-모험가 놈이 날아왔다! 평범한 놈이 아니야!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착지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방에서 달려왔다.
케인은 기겁해서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지?!’
서당개는 삼 년이면 풍월을 읊었다.
케인도 비슷했다.
태현 밑에서 이것저것 보고 배운 케인의 두뇌는 극한의 긴장상황에서 각성했다.
“굶… 굶주린 혼돈 님을 섬기러 왔습니다!!”
[화술 스킬이 낮습니다!]
[페널티가…]
[악명이 높습니다!]
[종족이 키메라입니다!]
[……]
[보너스를 받습…]
[설득에 성공합니다!]
-!
-오호라. 그래? 굳이 이렇게 찾아올 것까지도 없을 텐데. 미련하고 무식한 놈이로군.
-무슨 하찮은 교단 가입인 줄 아나! 크핫핫!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교단 가입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그 뒤에 있는 건?
“여, 여러분들께 바칠 공물입니다!”
-뭘 좀 아는 놈이로군. 좋다. 따라와라! 굶주린 혼돈님의 힘을 직접 받아들이게 해줄 테니까.
“…….”
직면한 위기는 피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이거 어떻게 도중에 탈출하지?’
이러다가 진짜 굶주린 혼돈 세력에 가입하면 현실에서 김태현한테 죽을 수도 있었다.
살아남아야 해!
* * *
‘갈 길이 멀군. 갈 길이 멀어.’
태현은 골짜기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도 정말 골짜기 앞까지만 회복한 상태였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태현 님. 저희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태현의 멘탈이 걱정됐는지, 이다비가 주먹을 굳게 쥐고 말했다.
물론 태현은 딱히 이런 걸로 멘탈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구….”
“걱정 마. 이다비. 아키서스 직업으로 전직하고 나서부터 멘탈은 계속 단단해지고 있거든?”
“…….”
그게 좋은 건가?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아키서스가 문제인 건지….
파앗!
“!”
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달려 나오자, 태현은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설마 새로운 적들이 또 나타난 것인가?
-교황님!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님이십니까!?
“그래! 근데 다가오지는 마라!”
[카르바노그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아니야. 카르바노그. 굶주린 혼돈도 많이 학습했다고. 뭔 개짓거리를 할 지 몰라.’
이제까지 온갖 개짓거리를 시험해 온 태현 입장에서, 굶주린 혼돈이 그걸 따라하는 건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교단에서 온 것 같은 전령이 갑자기 변신해서 암살자가 되어도 놀랍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겠습니다! 저는 교단의 명령을 받고 교황님과 손을 잡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아무리 태현이라도 이 말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래야지!
‘이게 맞지. 솔직히 내가 다 교단 찾아가서 연합 맺는 게 말이 되냐?’
양심적인 조원이라면 자기 할 일을 각자 끝내서 조장한테 보내야지, 조장한테 다 시키면 안 되는 것이다.
태현은 감동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그래, 어디 교단이냐?”
-이데르고 교단에서 찾아왔습니다. 교황님!
“그래. 이데르고… …뭐?”
태현은 멈칫했다.
이다비도 멈칫했다.
어라?
이데르고 교단은….
‘악신 교단 아니야??’
“굶주린 혼돈 때문에 미쳐버린 게 아닐까요?”
이다비는 설득력 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태현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둘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전령이 다급하게 외쳤다.
-교황님! 두 교단 사이에 있었던 악연을 잊어버렸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덤벼라!”
-…아니! 끝까지 좀 들어주십쇼! 하지만 저번에 교황님께서 도와주신 것도 있고, 역병 선장이신 폴로뮤스 님께서는 교황님이라면 같이 힘을 합해서 싸울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아.’
태현은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저번에 왕국 등급 세 개 A급을 찍기 위해서 외교력을 올리려고 교단들 퀘스트를 깨준 적이 있었다.
그때 파이토스 교단의 실종 퀘스트를 깨면서 우연찮게 폴로뮤스의 목숨도 같이 구해주게 됐었는데….
쓸데없이 이데르고 교단의 친밀도도 같이 올라간 것이다.
‘정말로 뜬금없는데?’
[카르바노그도 정말로 당황스럽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긴 하네요.”
“?”
이다비의 말에 태현은 시선을 돌렸다.
“그야 악신 교단은 친구가 없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누구한테 동맹을 요청하겠어요.”
“그건… 그럴듯하군 확실히.”
파워 워리어의 길마답게, 이다비는 아싸의 마음에 능숙했다.
갑자기 대륙이 뒤집혀지고 적이 쳐들어와도 친구 없는 교단은 어디에 도움 요청할 곳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도움 요청할 곳이 아키서스 교단밖에 없다니.
“…….”
태현은 불쌍하단 눈빛으로 전령을 쳐다보았다.
이데르고 교단의 전령은 왠지 모르게 매우 불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