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66화
‘평소처럼 하면 위험하긴 하겠지.’
당연히 태현도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위험은 이제까지 악신 교단들보다 몇 배는 위험했다.
가입하는 것도 쉽고, 힘을 받는 것도 훨씬 쉬운 데다가, 지금 전 대륙 규모로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 중에서 ‘이거 어차피 굶주린 혼돈한테 점령되는 거면 미리 갈아타는 게 대박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길드 동맹처럼 규칙이 엄격한 길드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중국 길드원들, 간부들 위주로 모아! 중국에 있는 놈들은 배신 못 할 테니까. 배신했다가는 진짜 뒤질 줄 알라고 전해라!
-해외 길드원들은요?
-해외 길드원들은 위험하니까 정말 믿을 수 있는 놈들 빼고는 따로 구분해 놔라! 앨콧 같은 놈들 말고는 믿을 놈이 얼마 없어!
중국 내 길드원들은 정말 집 주소로 찾아가서 협박을 할 수 있는 만큼 이런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현과 골짜기 플레이어들은 서로 같은 길드도 아닌 데다가 같이 파티 플레이를 많이 한 사이도 아니었다.
배신자에 매우 취약한 상황.
…그래서 태현은 결정을 내렸다.
‘정공법으로 간다.’
[카르바노그가 무슨 방법으로 갈 거냐고 궁금해합니다.]
감시 늘리기!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들 사이 사이에 배치하고, 골짜기 병사들 배치하고, 폭탄 목걸이 갑옷 위에 채우고 등등.
정말 할 수 있는 감시 수단이란 감시 수단은 다 동원한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다른 의미로 감탄합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정공법을 갈 줄이야….
카르바노그는 살짝 황당해했지만 태현은 진지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다 쓸 수 있는 것이다.
“다들 출발하기 전에 말씀드렸던 규칙 잘 지켜주십시오!”
“쓸데없는 대화 금지! 쓸데없는 행동 금지!”
“다른 파티 쓸데없이 쳐다보지 마십시오!”
“…….”
“아니, 김태현 놈 진짜 무섭네….”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무서운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1로 싸울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식으로 파티원들 빡세게 관리하는 건 길드 동맹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김태현이 하니까 너무 잘해서 무서웠다.
‘저 자식 길드 관리에 소질 있는 거 아니야?’
‘조용히 해. 김태현이 길드 안 만들어서 그나마 이 정도지. 김태현 놈이 길드 만들면 어떨지 상상도 안 간다.’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굶주린 혼돈보다 더한 악몽이 될 것 같았다.
[굶주린 혼돈의 영역에 진입합니다!]
[전체 스탯이….]
[…….]
[…….]
태현은 오랜만에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평소에도 많이 와봤던 골짜기 정문 근처 평원.
야트막한 언덕들과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던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시커멓고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여기 어딘가에 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신의 예지.
[신의 예지 스킬을 사용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인해 페널티가….]
[…….]
[…….]
굶주린 혼돈의 힘이 강해져서 그런지 <신의 예지> 스킬이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길을 가르쳐주는 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면서 번쩍이거나, 흐릿해지면서 잠시 사라지거나, 휘어지듯이 길을 바꾸는 식으로 훼방을 놓자 상당히 성가셨다.
‘그래도 아예 봉쇄가 안 됐다는 게 다행이지.’
“저쪽에 공격!”
태현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 파악이 덜 된 상태다 보니 스킬을 아끼고 힘을 비축할 여유가 없었다.
가능한 최대한의 공격으로!
[<만월 절삭> 스킬을….]
[<뒤흔들리는 도끼 충격> 스킬을….]
[<배후 이동 공격> 스킬을….]
[…….]
[…….]
콰아아아아아앙-!
파티들이 작정하고 한 번에 공격을 퍼붓자 그 위력은 상당했다.
여러 개의 스킬들이 서로 얽히고 합쳐져서 추가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나오기 전 가능한 버프들을 최대로 땡기고 나온 상태.
‘생각보다 괜찮다!’
‘장비 바꿔서 걱정했는데 제법이야!’
플레이어들도 그걸 느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나타납니다!]
-얌전히 말라죽을 것이지 그 지옥에서 굳이 기어 나오는구나!
“…아. 골짜기 말한 거군.”
태현은 굶주린 혼돈의 전사 놈이 갑자기 지옥이라길래 무슨 소리를 하나 살짝 당황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카르바노그가 상대 입장에서는 지옥처럼 보일 거 같다고 말합니다.]
온갖 악마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적들이 발을 디디려고 할 때도 골짜기의 압도적인 방어에 녹아내렸었다.
그런 만큼 적들이 저렇게 이를 가는 것도 당연했다.
“물러서지 말고 공격 넣어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모험가들아! 굶주린 혼돈께서는 너희들을 환영하신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들이고 더 높은 존재가 되어라!
“…….”
“지금 왜 멈칫했지? 무슨 생각을 한 거냐??”
“아, 아닙니다! 뭔 스킬 쓸지 잠시 고민한 겁니다!”
파티 사이에 끼어 있던 플레이어들과 NPC들은 머뭇거리는 파티원들을 가차 없이 질책했다.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살벌한 지휘!
“공격! 공격!”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망 만들어!”
파티들이 차례로 움직이며 공격을 시작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막대한 방어력과 체력을 갖고 있었지만,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도 그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상태.
전형적인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하는 식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탱커 위주로 주변을 막아버린 다음 딜러들이 근거리, 원거리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폭딜을 넣는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입은 묵직한 중갑 위로 수십 개의 마법이 날아와서 폭발하고, 검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가 작렬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추가 대미지가….]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장비가 오염됩니다.]
[장비가 오작동을 일으킵니다!]
[적에게 추가 대미지를 입힙니다!]
“???”
몇몇 플레이어들은 이 기계공학 장비가 특이한 메시지창을 띄우는 것에 놀랐지만, 지금은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힘을 불러옵니다!]
[거대한 파동이 닥쳐옵니다!]
“!!”
[장비가 파손됩니다!]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스탯이 크게 하락합니다!]
[스턴 상태에 빠집니다!]
[저주가….]
[…….]
“…헉…!”
나름 대비를 했는데도 뼛속 깊숙이 들어오는 공격에, 파티원들 중 몇 명이 찬물을 뒤집어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든 것이다.
골짜기 안에 있을 때는 성벽 안쪽에 안전한 상태였고, 다들 ‘골짜기를 위해!’라고 소리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휩쓸려서 나오게 됐지만….
지금 이렇게 한 대 세게 맞고 나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 광역기를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라 빗겨맞았는데도 이 정도면, 한 서너 방 더 맞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는데… 그러면 개죽음 아니야?’
‘도망칠까? 어차피 지금 혼란스러워서 도망쳐도 될 거 같은데.’
골짜기의 정예들을 끌어온 만큼, 파티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공격을 퍼붓고 있어도 수십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연계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명 빠져서 도망친다고 해도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나중에 들키면 좀 창피야 하겠지만 로그아웃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슬금슬금-
탕!
“후퇴하면 죽는다! 성기사 님들! 후퇴하는 놈들은 가차 없이 쏴버리십시오!”
-알겠습니다!
“…!?”
도망칠까 고민하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곳곳에 배치된 플레이어들과 아키서스 교단 NPC들이 살벌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미친…!’
‘후퇴했다고 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뒤로 후퇴해도 죽을 테니까 어차피 앞으로 가서 죽어라!”
-아키서스를 위해 죽으십시오!
허리춤에는 은검, 등에는 새로 제작된 유탄 머스킷을 차고 주변을 돌아다니는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 NPC들.
저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태현을 돕는 저 플레이어들은 뭐하는 놈들이란 말인가.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도 아닌 것 같은데….
-하. 네놈의 주인이 대답도 없는 게 느껴지지 않나!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들여라!
굶주린 혼돈의 전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소리 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닥쳐라! 아키서스 교단 다이아 등급은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 다이아 등급을 찍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너는 조금도 모를 거다! 네깟 놈이 공적치 포인트의 소중함을 알겠냐!”
“…….”
“…….”
그제야 파티원들은 저 아키서스 교단 NPC들과 같이 움직이는 골짜기 플레이어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키서스 교단 다이아 등급 이상 플레이어들!
교단 다이아 등급 이상 찍은 거면 정말 골수까지 충성도 높은 플레이어니, 이런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었다.
“공격해! 공격!”
“으아악! 후퇴하려는 게 아니라 잠시 뒤로 피한 겁니다!”
그리고 아키서스 교단에서는 등급이 높을수록 미친놈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친놈들이 NPC들을 부려가면서 뒤에 무기를 겨누자 파티원들은 도망치고 싶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싸워야 했다.
“우리의 눈을 피해서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장착된 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으니까!”
“…네? 그런 게 있었어요?”
“집중하라니까!”
탕!
“으악! 집중하고 있어요!”
“1번 파티 앞으로. 5번 파티 뒤로!”
태현은 굶주린 혼돈의 투구 사이로 검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내구도가 크게 하락합니다.]
-화염의 폭발!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의 내구도가 0이 됩니다.]
[무기가 부서집니다!]
‘성가시군.’
태현은 바로 새 검을 꺼내서 갈아끼었다.
마음 같아서는 폭딜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워낙 인원이 대규모인지라 그럴 수는 없었다.
태현이 지휘를 해주지 않으면 바로 동작이 엉키고 무너져 내릴 테니까.
그리고 하나 더….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오포로스가 나타납니다!]
-미끼를 물었구나! 아키서스 놈들! 이번에는 너희들이 함정에 빠질 차례다! 어디 한 번 비열한 함정에 당하는 기분을 느껴봐라!
‘나왔다!’
태현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골짜기 위에 있을 때부터 봤듯이, 상대는 아키서스에 대한 원한이 상당했다.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약점 간파, 정보 흡수!
-이름 읽어내기!
파티에 있던 도적 플레이어들이 오포로스의 견적을 내기 위해 스킬을 날렸다.
파티원들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약점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
“…미… 미친.”
“왜?! 뭔데!? 어떤데! 빨리 말해!”
도적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얼어붙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망했다고!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이건….’
‘굶주린 혼돈을 너무 얕보고 나온 거 아닌가…?!’
그런 두려움을 읽었는지 오포로스가 비웃었다.
-내가 두려운가? 내가 두렵겠지. 굶주린 혼돈이 내려주신 힘! 이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 오포로스를 감히 너희 같은 필멸자들이….
태현은 안 듣고 있었다. 오포로스의 위치를 자세히 보며 스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키서스의 힘을 써볼 테면 써봐라!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강철의 유성>. <아키서스의 축복>.”
[골짜기에서 강철의 유성이 발사됩니다.]
슈우우우욱-
-?
오포로스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에서 눈 부신 빛이 그대로 작렬하고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오포로스가 영원한 안식에….]
[…….]
[…….]
[…….]
태현은 상대가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최강의 공격 수단을 꽂아 넣었다.
밑천을 다 쓸 각오를 한 태현의 진심은 살벌할 정도로 무서웠다.
[카르바노그가 처음으로 상대를 동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