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47화
잘츠는 정말로 원망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양심이 좀 찔리는데….’
하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원망하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미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으로서 미안하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당연한 거였지!
잘츠는 오히려 태현을 위로하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 *
“악마 군단이다! 오른쪽에 악마 군단이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맞서 싸워라! 천인장!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서 우측을 방어하라! 아직 여유가 있다!”
“좌측에서 괴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좌측을 맡은 성주가 배신하고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상관없다! 기사단장! 기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좌측을 방어하라!”
“앞에서 반란군들이 나타났습니다!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잘 됐다! 어느 방향으로 돌격하든 간에 적을 죽여 버릴 수 있겠다!”
고대 제국 후반기는 그야말로 사방에서 문제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 시기였다.
하나 막고 다른 거 하나 막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 막으면서 다른 거 하나 막고 또 동시에 터지는 다른 걸 또 막고….
그쯤 되자 이제 제국의 내로라하는 인물들도 배신하거나 도주하거나 잠적했다.
이쯤 되면 고대 제국이 아니라 고대 제국 할아버지도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만큼 남은 고대 제국 NPC들은 사납고 터프했다.
적이 얼마나 많이 나오든 간에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덤비라고 외치는 이들!
*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식한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으면 포위망 뚫고 나갈 생각을 해야지 거기서 그냥 싸운다니. 어떤 놈이 지휘관이길래 그딴 짓을….”
-아키서스 교단 대전사였다. 대단한 인물이었지.
“…내가 정말 미안하다.”
* * *
하여튼 제국 군대를 이끌던 아키서스 교단 대전사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포위망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며 버텼던 것이다.
하지만 적들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사방에서 몰이쳤고, 슬슬 전열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대장님! 위험합니다!”
“걱정 마라. 교황이 내게 준 비단 주머니가 있다. 위험할 때 풀어보라고 했지.”
“오오…! 그런 게!”
촤아악!
[<악신의 힘이 담긴 봉인 주머니>가 풀려납니다!]
[악신의 힘이 폭주합니다!]
[도망치십시오!]
지금은 사라진 신들이 남겨 놓은 힘의 조각들.
아키서스 교단은 그런 걸 얻으면 정화하는 대신 몰래 보관해놓았다.
나중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앞을 막고 있던 반란군 백작은 기겁해서 외쳤다.
“이런 미친놈들! 악신의 파편을 정화하지 않고 몰래 숨겨두고 있었던 거냐!? 너희가 그러고도 제국 교단이냐!?”
“하나 더 풀어라!”
“안, 안 돼! 미친놈들아! 멈춰!”
[악신의 힘이 더더욱 폭주합니다!]
[주변의 공간이 신의 힘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하하! 꼴 좋구나!”
“미친놈아!!”
아키서스 교단 대전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주변은 지금 악신의 힘으로 인해 울창하던 숲이 빠르게 사라지고 거대한 바위가 녹아내리듯이 흩어지고 있었지만….
적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이 정도야 뭐….
“적들이 흩어진다! 당당하게 빠져나가자!”
“저기 잘츠와 잘츠의 부하들이 있습니다!”
-구해줘! 구해줘! 구해달라고!
잘츠의 비명에 대전사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영웅답게 굴어라, 잘츠! 당당하게 외치란 말이다!”
-구… 구해줘라!
“잘 말했다!”
-그럼 구해주는 건가??
“아니! 미안하지만 그쪽으로 들어갔다가는 아군이 죽을 수 있다. 잘츠.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라!”
하필이면 잘츠와 부하들은 악신의 영역 속에서도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구하러 들어왔다가는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아키서스 교단 대전사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후퇴했다.
“잘츠. 너라면 극복할 수 있다!”
-야 이 개…!
* * *
“…어. 끝인가?”
다 들은 태현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냥 잘츠가 아키서스 교단을 싫어해야 되는 이야기 같은데?
-이 이후 악신의 영역이 붕괴하면서 마계로 튕겨나갔지.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와 나의 부하들은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지.
“아키서스 교단이 원흉이라고?”
-아니다. 대전사가 했던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는 거다. 대전사는 딱히 나를 미워해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었다.
‘…스톡홀름 신드롬 아니야 저거?’
무슨 사랑의 매 같은 소리도 아니고….
-그걸 깨달았기에 나는 더욱더 강해질 수 있었다. 마계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진정 영웅이 되어 있었지.
-개소리! 네놈이 무슨 영웅이냐!
“!”
저 멀리서 둠 나이트, 본할라드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잘츠는 본할라드를 보자 깜짝 놀랐다.
-네놈은 그저 비겁한 겁쟁이에 불과하다. 소집에 응하지도 않은 주제에!
본할라드의 외침에도 잘츠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나는 패배할 싸움에 굳이 내 부하들을 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 다 대전사에게 배운 것이다.
-어디서 교단의 이름을 팔아! 지금 교황 성하께서도 네놈을 벌하기 위해 벼르고 계신다.
-헛소리! 교황 성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그건 네놈을 벌하기 위해서 네놈을 속이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까지 널 부른 것도 널 벌하기 위해서겠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교황 성하께서 널 여기에 왜 불렀겠냐!
잘츠와 본할라드는 씩씩대며 서로 욕했다.
서로 제국 멸망에 관해 쌓인 게 참 많았던 것이다.
-교황 성하!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십시오!
-교황 성하! 저놈에게…????
외치던 둘은 태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태현은 사라지고 악마들만 있었던 것이다.
* * *
[악마들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납니다!]
“!?”
태현은 정말로 놀랐다.
둠 나이트 본할라드에, 나름 영웅이 된 잘츠까지 있는 상황.
그런데 그런 경계를 모두 다 뚫고 악마가 나타나다니?
휘리릭-
악마들은 사방에서 태현을 덮치더니 그림자 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악마들도 여기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잘츠에 둠 나이트, 거기에 부하들까지 있었으니 오래 싸울수록 불리했다.
무조건 끌고 나가야 한다!
[<영원한 지옥의 사슬>이 스킬을 방해합니다!]
‘뭐야 이 자식들?’
태현은 상대 악마가 사용하는 아이템에 깜짝 놀랐다.
태현의 행운 스탯을 뚫고 묶은 것도 대단한데 그 상태에서 권능 스킬들까지 방해한다고?
이 정도쯤 되면 굶주린 혼돈도 쉽게 할 수 없는 개사기 아이템인데?
-네놈을 잡기 위해 주인님께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잘라내셨다!
-그 희생을 네놈이 아느냐!
“…….”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정말?
악마 공작 정도 되는 존재가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잘라서 아이템을 만들었다는 말에 태현은 경악했다.
-교황 성하!!
다행히 둘은 태현이 완전히 끌려가기 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
둘은 기겁하며 달려왔다.
-잘츠 이 비겁한 겁쟁이 놈아! 네놈 때문에 교황 성하께서 기습을 당하신 거다! 네놈이 얼마나 성가셨으면 교황 성하께서 저런 기습을 당했겠느냐!
-헛소리하지 마라 본할라드! 네놈과 네놈의 부하가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 때문에 악마들을 눈치 못 채신 게 분명하다!
“…아 닥치고 구하기나 해라 멍청한 케인 같은 놈들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교황 성하!
둘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잘츠는 바로 화살을 뽑아서 쏘았다.
-오리하르콘의 축복!
쐐애액!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태현은 경악했다.
‘저, 저거 오리하르콘 아닌가!?’
짧은 순간에 날아오는 화살촉의 재질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태현은 알아볼 수 있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
파아앗!
[화살이 빛을 뿜어내며 사라집니다!]
[찬란한 정화의 빛이 악마들을 불태웁니다!]
그리고 그 오리하르콘 화살은 찬란한 빛을 뿜으며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키아아아아아악!
악마들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리고 태현도 고통스러워했다.
‘저걸… 화살로 쓰다니…!’
대장장이가 보기에는 범죄 수준의 짓!
물론 태현도 오리하르콘 화살을 몇 번 쓴 적 있긴 했지만…!
-내가 시간을 끌었다!
-잘난 척 하지 마라, 잘츠! 네놈이 조금만 더 멍청하게 굴지 않았어도 훨씬 더 나았을 일이다!
잘츠가 화살을 쏘자 본할라드는 이를 갈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꽈과과과과광!
[<제국의 멸망>을 시전합니다!]
물리 특화 둠 나이트답게 본할라드는 대검을 휘둘러 주변의 지형을 아예 쪼개버렸다.
그 서슬에 끌고 들어가려던 악마들이 사정없이 튕겨나가고 날아갔다.
[<영원한 지옥의 사슬>이 풀립니다!]
-아키서스의 돌격!
태현은 바로 거리를 벌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섬뜩하기 그지 없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끌려갔으면 마계에서도 아주 끔찍한 곳으로 끌려갔을 게 분명!
악마들은 억울함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도 놓치다니! 그럴 순 없다! 무슨 희생을 써서라도!
-아키서스 교단 놈들아! 제발 네놈들의 피를 한 번만 맛보게 해다오!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 양심이 없는 것이냐!
“…미안하지만 그건 전임자한테 따져라!”
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던 악마가 그대로 맞고 날아갔다.
태현은 폭탄을 꺼내서 상대의 움직임을 만든 다음 거리를 벌렸다.
아까 한 번 당한 만큼 가까이 붙었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악마들은 평소와 달리 무슨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이기적인 악마들한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경.
-꺼져라! 어디서 악마 주제에!
-네놈들 가지고는 교황 성하의 망토 끝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네놈들은 그냥 얌전히 당하고 있으면 되는 거야!
잘츠와 본할라드는 사납게 외치며 악마들을 두들겨 팼다.
잠입한 악마들은 서러움과 분함에 더욱 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주인님! 도와주십시오!
-주인님! 제발 아키서스 교단 놈들에게 한 방만 먹이게 도와주십시오!
[악마 공작, 로프로지에가 악마들의 외침을 깊게 받아들입니다.]
[로프로지에가 자신의 남은 육신을 바칩니다!]
[거대한 마계의 문이 생깁니다.]
[끌려갑니다!]
-!
-!!
잘츠와 본할라드,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부하들 모두 마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본할라드가 분노해서 외쳤다.
-악마 공작 놈아! 정신이 나간 것인가! 악마 주제에 자신을 희생하다니!?
-시끄럽다! 언데드 놈아! 아키서스를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주인님의 숭고한 뜻을….
-어디서 악마 주제에 지껄이고 있어!
-맞아!
잘츠와 본할라드는 이동하면서도 남은 악마들을 싹 두들겨 팼다.
‘여기가 어디지?’
태현은 말릴 시간도 없었다. 주변 파악이 훨씬 더 급했던 것이다.
마계는 몇 번 와봤지만, 태현이 아는 곳보다는 모르는 곳들이 훨씬 많았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계 폐허의 황야>에 도착합니다!]
-만세! 만세!
-아키서스 놈이 왔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악마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신나서 달려들려던 악마들이 멈칫했다.
…생각보다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 어?
-뭐 이렇게 많이 데리고 왔…?
데리고 올 거면 교황만 날름 데리고 와야지, 그 부하들을 잔뜩 데리고 오면 어쩌잔 말인가?
당황하던 악마들에게, 잘츠와 본할라드가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죽어라!
-죽어라!!
촤아아아악!
-쓸어버려라! 전부 쓸어버려! 악마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아라!
-저 활잡이 놈들한테 지는 놈들은 모두 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언데드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놈들이다!
사납게 돌진하는 두 영웅들.
그 모습에 카르바노그가 물었다.
[카르바노그가 둘이 싸운 게 맞냐고 의아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