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44화
태현의 수작은 굶주린 혼돈을 더욱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쳐라!
“예!”
“스미스. 정신을 차려라! 넌 원래 그런 놈이 아니었잖아!”
“…최소한 진심이라도 좀 담고 말하십시오!”
‘아니. 굶주린 혼돈의 손 잡고 지능도 올라갔나?’
잘 속던 스미스가 안 속자 태현은 살짝 아쉬워졌다.
예전에는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속는 맛이 있었는데….
스미스도 험한 세상 맛을 보더니 사람이 좀 독해진 것 같았다.
콰르르르릉!
다시 한번 펼쳐지는 광역기.
스미스의 광역기는 사납게 주변을 찢으며 폭풍우처럼 마력탄을 날렸다.
오죽하면 미국 선수들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설 정도!
태현은 그중 대부분을 피했지만, 한 개가 그대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작렬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당신을 약화시킵니다.]
[스킬이 봉인됩니다!]
‘안 돼!’
[<토끼 지배>가 봉인됩니다!]
‘…아. 뭐 이 정도야.’
[카르바노그가 굶주린 혼돈에게 화를 냅니다.]
카르바노그는 감히 자신의 권능을 봉인한 굶주린 혼돈에게 분노했다.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투기장이 아니라 공포 게임 같은데!?”
케인은 다급하게 외쳤다.
팽팽한 싸움을 생각했는데 스미스 놈이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공포 게임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잡히면 죽는 공포 게임.
“뭘 잘못 먹었나보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어디서 구해왔나 본데.”
“아니, 아쉬울 게 뭐가 있어서 그런 계약을 해!?”
외치던 케인은 문득 태현을 쳐다보았다.
앞에 범인이 있었던 것이다.
“네가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지금 1라운드 때 내가 상황 봐가면서 적당히 이겼어야 했다는 소리냐?”
“아,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니고…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지금 떠드는 건 좋은데 뒤에서 계속 쫓아오고 있다는 것만 잊지 마십시오!”
굶주린 혼돈의 힘을 켠 스미스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태현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이제까지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을 봤을 때 분명 무적은 아닌데….’
굶주린 혼돈의 힘은 사기적이긴 했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계속 공격을 받고 힘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힘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어디쯤인가!
아까 그렇게 공격을 넣었는데도 저렇게 쌩쌩한 거 보니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
케인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자폭하겠어!”
“어… 그럴 필요가 있나?”
물론 자폭하면 데미지가 꽤 높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꼭 자폭이 효과적인가 싶었다.
다른 공격 수단도 여러 개 있는데 굳이….
“밥값을 지금 안 하면 앞으로 할 기회가 없을 거 같다고.”
케인은 관중들 못 듣게 속삭였다.
여기서 자폭하면 최소한 욕은 안 먹을 것 같다는 재빠른 계산.
태현은 그 계산에 감탄했다.
‘잔머리만 늘었구나!’
“하지만 화력이 부족할 텐데.”
“그럴 줄 알고 평소에 다 계산을 해놨어. 내가 <아키서스의 노예> 직업 스킬들 중 자폭할 때 쓸 만한 스킬들을 골라놨지.”
“…….”
태현은 감동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탱킹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어떻게 하면 더 뛰어난 탱커가 될 수 있을까 연습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자폭했을 때 더 강한 데미지를 줄 수 있을까 공부했다니.
잘한 건 잘한 건데 왠지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잘함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폭탄>은 알다시피 대상의 강함에 따라 화력이 올라가잖아. 거기에 맞춰서 일시적으로 레벨을 쫙 올리는 스킬 콤보들이 있다고. 자. 지금 준비하면 되겠지!?”
“그, 그래.”
케인은 결연한 눈빛으로 스킬 콤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되게 비장해 보였지만 진상을 아는 태현 입장에서는 많이 어이없는 장면이었다.
* * *
-3라운드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미국대표팀. 한국대표팀을 압도합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겠습니까! 완전히 다윗과 골리앗 같은 상황입니다. 스미스 선수에게 이런 스킬이 있었을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한국 선수들마저 말입니다!
-밀립니다! 계속 밀리고 있어요! 맞대응에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무슨 최종 보스 몬스터처럼 각성해 버린 스미스는 관중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줬다.
저… 저게 뭐냐??
-저, 저래도 되나?
-당연히 저래도 되지! 이기면 그만인데! 너 한국 팬이지!
-나 미국 팬인데 저건 좀….
-내 스미스는 저렇지 않았다고!
-이봐! 김태현은 자기 친구 폭탄으로 써먹는데 스미스가 사악한 힘 좀 썼다고 이러기야!?
미국 팬들은 혼란 속에서 서로 다퉜다.
태현과 스미스는 둘 다 인기가 좋은 선수였지만, 둘의 이미지는 파고들면 좀 차이가 있었다.
태현은 원래 냉혹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이미지였다가 최근에 인기 좋아지면서 뒤바뀐 경우.
그에 비해 스미스는 원래 인성 좋고 선량한 이미지로 쭉 밀고 온 케이스였다.
태현은 케인을 폭탄으로 터뜨려도 팬들이 ‘뭐 김태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같은 반응을 보여줬지만, 스미스는 ‘어… 저래도 되나?’ 하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누가 이기는지가 중요하다고!
-스미스 갖고 싸울 거면 다른 데에 가서 싸워!
스미스 팬들이 옳니 틀리니로 싸우는 동안에도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미국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태현이 앞에서 맞받아치고 있다지만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시간 끌다가 후퇴, 시간 끌다가 후퇴….
-그냥 내버려 두고 굳히면 안 되나?
-아니야! 지금 끝내야 해! 한국 선수들 살려뒀다가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고.
-김태현, 항복해라! 추하게 시간 끌지 말고!
-맞아! 명예롭게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압도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팬들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추격이 너무 오래 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기고 있지만….
혹시?
그런 초조함들이 팬들을 외치게 만들었다.
-정정당당하게 붙자!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뭘 정정당당하게 붙어! 김태현! 피해! 시간 끌어!
-1라운드 때 제대로 붙지도 않고 깔짝댄 새끼들이!?
-그 때랑 지금이랑 같나?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는데 그냥 싸워야지.
-김태현도 실망이야.
공식 방송 게시판에서만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싸움이 진행됐다.
-김태현 좀 실망인데. 저렇게밖에 못하나?
-결국 저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건가….
랭커들끼리 따로 모여서 구경하는 게시판에서도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김태현한테 맞은 놈, 김태현 질투하던 놈, 그냥 구경하면서 훈수두는 걸 좋아하는 놈 등등이 신나서 떠들고 있는 상황!
그걸 본 쑤닝은 울컥해서 외쳤다.
-니들이 뭘 안다고 지껄이냐!? 스미스 저놈은 비겁하게 이상한 스킬이나 쓰고!
-비겁하진 않지… 실력인데….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야. 저거 누구냐? 한국 랭커야? 왜 저렇게 화를 내?
-한국 랭커들은 김태현 편 잘 안 들어주는데? 맞은 적 많아서.
-중국 랭커인데? 저거 아이디가 길드 동맹 쪽 랭커 아니야? 저번에 길드 동맹 쪽 옹호하던 놈인데.
-잘못 봤겠지. 길드 동맹이 김태현을 옹호할 리가 없잖아.
-…….
쑤닝은 반응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한 탓에 인터넷에서 개망신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저놈을 왜 옹호했지?’
쑤닝은 혼란스러웠다.
김태현이나 스미스 두 놈 다 생각만 하면 분노가 치솟긴 했는데, 스미스가 김태현 압도하는 꼴은 왠지 더 보기 짜증 났다.
그걸 옆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입 터는 놈들은 더더욱 그렇고….
그리고 그건 길드 동맹 간부들도 비슷했다.
-아니 김태현 저 저… 야! 우리 랭커들 자르던 솜씨는 다 어디 갔냐!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 잘라내던 솜씨로 한 명이라도 좀 잘라내봐! 아이고…! 다 죽겠다!
-지금 자리 빠졌다가는 한국 선수들 전멸이잖나! 크악! 한국 선수들 왜 다 저렇게 힘을 못 쓰냐!? 한국 선수들 저것밖에 안 돼!?
“…….”
쑤닝은 간부들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한국대표팀이 아니라 중국대표팀인 줄 알겠다!
“길, 길마님. 아니 이게….”
“생각해 보니 저희 이긴 한국팀이 우승해야 체면이 살지, 저희와 싸운 적도 없는 미국팀이 우승하면 체면이 안 살잖아요.”
“이른바 졌지만 잘 싸웠다라도 하려면….”
“미제국주의자에 항변하는 기분이랄까?”
쑤닝의 등장에 얼어붙은 간부들은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음대로 해라.”
“길마님도 같이 보시죠?”
“흥. 난 그런 애들 장난에 별 관심 없다.”
쑤닝은 매몰차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어어어어어!??!”
“저기서 자폭을!??! 경기가 뒤집히나!?! 이걸 뒤집는다고!!”
“이걸 뒤집어!?”
홱!
쑤닝은 몸을 다시 돌려서 후다닥 달려왔다.
간부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쑤닝을 쳐다보았다.
“뭐. 왜.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들 고개 돌려! 방송 보자!”
* * *
-자폭하나?
-야. 무슨 케인만 보면 자폭이냐? 케인 선수가 무슨 생체폭탄이야?
-저렇게 스킬 여러 개 쓰는 거 보니 자폭은 아닌데. 다른 거겠지.
-맞아. 케인 선수가 무조건 자폭만 하겠어?
꽈아아아아앙!
-…….
-…자, 자폭이네.
-자폭이잖아?
관중들은 황당해했다.
진짜 자폭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자폭일….
“크… 크윽….”
스미스는 폭발의 데미지에 비틀거렸다.
이제까지 봤던 자폭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
‘케인 선수를 얕봤다…! 얕봐서는 안 됐는데…!’
스미스는 이를 갈았다.
케인이라고 무시한 게 실수였다. 케인도 그사이 많이 강해졌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의 위력인 탓에 방어 스킬이 뚫리고 데미지가 들어왔다.
‘데미지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아까도 많이 쌓였는데.’
태현은 몰랐지만 스미스도 상당히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아키서스 성기사단장의 공격은 어마어마한 데미지를 누적시켰고, 몰아붙이는 스미스도 슬슬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이 걱정 말라고 말합니다.]
[다시 힘을 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제물을 바치라고 굶주린 혼돈이 말합니다.]
“…아, 아니. 잠깐….”
내가 몸을 잠시 빌리겠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스미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뒷일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스미스 선수!! 아군을 공격합니다!! 아군을 공격합니다!!!
-이게 어떻게 굴러가는 상황인가요!? 폭발이 끝나더니 아군을! 아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스미스?! 믿어도 되는 거 맞지?!”
“어이! 이거 진짜 괜찮은… 컥!”
동료들은 당황하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 일단 스미스가 생각이 있겠거니 판단한 것이다.
물론 지금 상황은 딱히 스미스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와… 스미스… 너 장난 아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태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김, 김태현 선수도 팀원을 희생시키지 않았습니까!”
“케인은 자원한 거지. 넌 그냥 허락도 안 받고 휘두른 거잖아.”
“…….”
스미스는 그 말에 찔렸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틈을 태현은 놓치지 않았다.
-위대한 신성의 벼락!
성기사단장의 검술 스킬은 차례대로 하나씩 열려나가는 구조였다.
굶주린 혼돈과 싸우면서 시간을 끈 덕분에 열린 <위대한 신성의 벼락>.
지금은 뭐든지 때려 박아서 스미스를 꺾어 놓아야 했다!
[위대한 신성의 벼락을 사용합니다!]
[고대 아키서스 성기사단장의 기술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아키서스가 남겨 놓은 힘이 강림합니다!]
꽈르릉!
하늘에서 거대한 번개 기둥이 강림했다.
그리고 그 힘 그대로 스미스에게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