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43화
“어? 왜 이세연을 안 뺀 거야?”
예상대로 케인은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태현은 케인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대답했다.
“쟤네가 이세연을 개무시하는 거지.”
“뭐!? 진짜 그런 미친놈이 있어!?”
케인은 경악했다.
이세연을 무시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니.
솔직히 케인은 아직도 이세연이 좀 무서웠다.
나름 친분을 쌓긴 했지만 지금도 이세연이 정색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다.
‘김태현 저놈은 용케 이세연하고 같이 퀘스트를 한단 말이지….’
케인은 새삼 신기해했다.
‘아니다. 저놈은 원래 저랬지.’
생각해 보니 악마 공작하고도 같이 퀘스트 하고 드래곤하고도 같이 퀘스트 했던 만큼 이세연 같은 사람한테도 적응한 걸지도 몰랐다.
“뭔 생각 하냐?”
“이… 이세연을 무시하다니 아주 천벌 받을 놈들이구만!”
“그래. 네가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알겠지?”
“그… 그렇지.”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온 월드컵 결승전 3라운드.
이 단판 승부로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
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거 쫄았군.’
극한의 상황에서 200, 300%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어붙어서 겁먹는 사람도 있는 법.
케인은 후자였다.
감독이 아무리 채찍질을 하고 태현이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사람 성격이란 건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저래도 괜찮겠어?”
이세연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거 없어. 보고 있으라고.”
태현은 케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어차피 나도 3라운드에서는 탱커 역할 맡을 거라서 네가 메인 탱커 안 해도 돼. 넌 서브 탱커 정도야.”
“….”
이세연은 뒤에서 경악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위로를 하고 있어!?
‘저래도 되는 걸까?’
선수들에게 자존심은 목숨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실력 없는 선수라 하더라도 그 선수한테 ‘너한테 기대하는 거 없으니까 숨만 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법.
저런 말에 오히려 자존심 상해하면 역효과가 날 텐….
“진짜!? 진짜 그래도 돼!?”
“그래. 기쁘냐?”
“진짜 기쁘지!”
케인은 울 정도로 기뻐했다.
애초에 케인의 목표는 대표팀 주전이 아니라 대표팀 후보였다.
책임은 적게 지고 명예는 같이 얻는 아름다운 자리!
“….”
이세연은 황당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저렇게 그릇이 작을 줄이야….
* * *
“아.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
“….”
압박은 한국 선수들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미국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2라운드와 달리 3라운드에는 태현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도 한몫했다.
과연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일까?
“이세연은 결국 네크로맨서. 투기장에서는 어떻게든 견제할 수 있지만, 저쪽 탱킹은 줄여 놓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건 다들 동의했잖아.”
1라운드 때 결국 뚫지 못하고 밀려난 기억은 선수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태현이 다시 한번 그런 스킬을 써서 앞을 막아버리면 또 시간만 끌다가 끝나버릴 수 있었다.
“류다영 선수보다는 케인 선수가 낫긴 하지….”
“공략법도 확실하고, 많이 연습하기도 했고.”
스미스는 선수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뚫어드리겠습니다.”
“…믿, 믿음직스럽긴 한데 네가 그런 눈빛 보이면 좀 무서운 거 알지?”
앤디는 무섭다는 듯이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판온에서 공성전 벌일 때도 눈깔이 무시무시했는데 지금도 좀….
“준비하자. 이제 아껴둘 필요도 없지.”
“이거 정말 아껴둔 스킬이었는데….”
미국 선수들은 하나씩 주섬주섬 숨겨둔 스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1라운드 끝나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패배도 패배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1라운드 초반에 관중부터 해설들까지 다 한국 선수들 보느라 그들은 잘 보지도 못했다는 말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해설이 이래도 돼!?
하지만 이번 라운드에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뭔가 보여주겠다!
-고대 정령의 각성. 아덴케의 정령 각인!
마법사 랭커 아르케가 스킬을 사용하자 눈부신 빛과 함께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볼 일 없는 강력한 정령들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자리 잡자 다른 선수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대단한데?”
“나도 질 수 없지.”
-하늘섬의 축복, 네 장 날개의 가호, 하늘창잡이의 각성!
창술사 랭커 앤디도 지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하늘섬 쪽에서 새로 직업을 얻은 앤디는 하늘섬의 종족들이 가진 종족 스킬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같은 날개!
컨트롤하기 힘들긴 했지만 남들이 걸어 다닐 때 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장점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입체적인 기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심해의 힘, 오싹한 저주의 화살촉, 자라나는 촉수….
궁수 랭커 필도스도 준비에 나섰다.
<저주받은 심해의 궁수>라는 직업답게 으스스하고 괴상한 스킬들이 몸을 감쌌다.
그 모습에 선수들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진짜 다들 이러기냐?”
“미, 미안. 근데 그 스킬 효과가 좀 징그럽다고.”
“왜 하필 촉수야?”
미국 선수들은 매우 견디기 힘든 표정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고오오오-
[굶주린 혼돈의 힘이 강림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굶주린 혼돈이 사악하게 웃습니다!]
“….”
“….”
미국 선수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딱히 작전 회의할 때 말했던 스킬도 아니었고,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스킬도 아니었다.
원래 이런 스킬을 갑자기 쓰면 뭐 하냐고 화를 내야 했지만, 선수들은 그럴 타이밍도 놓쳤다.
스미스의 모습이 너무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온몸에서 시커먼 타락의 기운을 줄줄 흩뿌리는 게 아무리 봐도 보스 몬스터 같….
“여러분. 갑시다.”
“어… 어.”
미국 선수들은 무슨 스킬이냐고 묻거나 따질 기회도 놓쳐버렸다.
‘야. 저거 괜찮은 거 맞냐??’
‘표정 관리해. 팬들이 보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은 하고 써야지 저게 대체 뭐야!? 이상한 거 먹었나!?’
‘나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스미스가 저런 스킬이 있었나!?’
‘백기사는커녕 흑기사도 저런 스킬은 없겠다!’
* * *
[고대 성기사단장이 빌려준 힘을 불러와 일시적으로 각성합니다!]
[검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고대 성기사단장으로 변합니다!]
[스탯이….]
[스킬이….]
[….]
‘밑천 다 터는군.’
태현은 스킬을 쓰면서도 입맛이 썼다.
아키서스의 영혼관도 쓰고, <고대 아키서스 성기사단장의 각성>도 쓰고.
평소에 비장의 카드로 아껴두던 밑천들을 다 털어내고 있는 셈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한동안 판온에서 원수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우… 우오오오옷!”
케인이 더 감탄했다.
아키서스 성기사단장으로 변한 태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든든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기사!
‘나는 정말 서브 탱커만 해도 되겠구나!’
케인은 감동으로 코밑을 쓱 훔쳤다.
“케인. 혹시 모르니까 이건 좀 두르고 있어.”
“뭔데?”
“즉석에서 만든 폭탄.”
“….”
달리면서 뭔가 만들길래 뭔가 했더니 그 짧은 사이에 폭탄을….
하지만 케인은 체념하고 둘렀다.
이거라도 해야지!
철컥철컥-
[굶주린 혼돈의 힘이 메아리치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당신을 비웃습니다.]
나약한 아키서스 놈!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
태현은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군 중에 어느 누구도 굶주린 혼돈 관련 스킬을 쓰지도 않았고, 아이템도 다 두고 나왔는데??
여기 내 새로운 하수인을 봐라!
“…스미스, 뭐 하냐!?”
태현은 기겁해서 외쳤다.
저 멀리서 누가 봐도 타락한 스미스가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태현 선수가 쓴 스킬을 저도 썼을 뿐입니다.”
“…아니야, 미친놈아! 나는 굶주린 혼돈의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놈의 하수인의 영혼을 갈취해서 힘을 뺏어서 쓴 거야!”
태현은 경악해서 대답했다.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제안을 받으면 그건 그냥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굶주린 혼돈이 내주는 온갖 불합리한 퀘스트를 다 할 수밖에 없는 노예 처지!
그에 비해 상대의 영혼을 가둬서 힘을 뺏어 쓰는 건 훨씬 더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방식이었다.
‘이쪽도 충분히 미친 소리 같은데….’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굶주린 혼돈 손을 잡는 것도 그렇지만 남 영혼 갈취해서 힘 뺏는 것도 좀….
“상관없습니다, 김태현 선수. 힘을 위해서라면 희생이 필요한 법. 이 희생을 딛고, 이번 라운드에서 승리를 쟁취하겠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파동!
[굶주린 혼돈의 힘이 강림합니다!]
[거대한 파동이 닥쳐옵니다!]
“뒤로 후퇴!”
태현은 팀원들에게 바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스미스가 뭘 잘못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정면 대결은 좋지 않았다.
‘일단 시간을 끌면서 약점을 찾아봐야 한다!’
3라운드의 맵은 <허물어진 신전 옛터>.
곳곳에 폐허가 된 유적지들이 있어서 시간을 끌기 비교적 좋은 곳이었다.
와르르르-
스미스는 거추장스러운 신전 건물들을 일격에 날려버렸다.
꿈틀거리는 혼돈의 힘이 나오더니 그대로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저 자식 사기 치네.’
“김태현 선수! 당당하게 붙읍시다!”
“1라운드 때 당당하게 붙자고 할 때는 무시했던 놈들이 양심이 없냐!?”
하지만 싫어도 붙어주긴 해야 했다. 상대가 거리를 점점 좁히고 있었던 것이다.
‘선공!’
꽝!
[고대 성기사단장의 검이 추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위대한 아키서스의 빛이 적을 강타합니다!]
서로 제한 걸고 싸우는 투기장인 만큼, 이렇게 맵을 갈아버릴 정도의 공격이 오고 갈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현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신성력이 스미스를 후려갈겼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HP를 회복시킵니다!]
‘그렇겠지!’
태현은 당황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애초에 한 방으로 꺾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꽝, 꽝, 꽝, 꽝-
-위대한 신성의 파도!
근접전에서 태현의 컨트롤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을 때 가장 진가를 발휘하는 컨트롤.
평소 방패를 끼고 방어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스미스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스미스도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왼쪽을 찌르는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듯이 휩쓰는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
정면에서 후려갈기는 공격을 맞받아치고 빈틈 찌르기.
[굶주린 혼돈의 힘이 HP를 회복시킵니다!]
‘…개사기 치는군.’
태현은 혀를 찼다.
지금 한 열 대 정도는 꽂아 넣은 것 같았는데 상대는 거의 다치지 않은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내구도를 약화시킵니다!]
[방어력이 하락합니다.]
[HP가….]
그에 비해 이쪽은 직격한 거 없이 그냥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방어 뚫고 들어오는 대미지.
고대 성기사단장으로 변신했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변신하지 않았다면 그냥 시작하자마자 갈려 나갔을 가능성이 컸다.
‘빈틈을 찾아내야 한다. 빈틈을….’
내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나, 아키서스? 그런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 나도 굶주린 혼돈의 손을 잡아볼까 생각하고 있었지.”
뭐? 그게 정말인가?
“그래. 스미스한테서 힘을 뺏어 가면 고민해 보겠다.”
…지금 날 바보로 아는 거냐!
‘칫. 안 통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