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39화
지금 눈앞의 태현이 저런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건 그거대로 실례였다.
이럴 때는 믿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PD의 본분.
“그렇다면 정말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말한 제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한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거 맞아요?”
“물론입니다. 제 능력으로 그 정도는 진행할 수 있습니다.”
배장욱은 가슴을 탕탕 치며 그렇게 외쳤다.
* * *
파이브 걸즈의 하연은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예능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반응이 좋자 단독 MC도 맡아서 성공적으로 해냈다.
게다가 하연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장점이 있었다.
나름 판온 전문가!
다른 MC들은 판온 선수들이 ‘공속이 어떻고 퀘스트가 어쩌고’ 같은 소리를 할 때 ‘아 예 그렇군요’ 정도의 반응밖에 하지 못했지만….
하연은 ‘하지만 거기서는 공속보다는 다른 옵션이 더 나은 거 아닌가요?’하면서 반박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점만 있지는 않았다. 가끔은 대화가 격해질 때도 있었다.
-케인 선수는 솔직히 거품이라고 봅니다. 김태현 선수가 없다면 바로 꼬라박을 가능성이 높지요.
-맞는 말이야.
-…거품은 무슨 거품이라는 거죠! 케인 선수가 얼마나 잘하는 선수인데! 그런 그쪽은 1부 리그에 발이나 대보셨어요!
-아… 아니! 여기서 내 성적이 왜 나옵니까!? 그, 그리고 우리 게임단이 지금 흔들려서 그렇지 잘했으면 나도 1부 리그 갔는데!
-하! 그걸 핑계라고!
-나도 김태현 선수하고 같은 팀이면 그만큼 할 수 있어! 난 집안일도 한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네! 케인하고 1:1로 해도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꼭 판온 하는 사람들끼리 모아 놓으면 싸움이 날 때가 있었다.
이른바 ‘누가 누가 더 세지?’ 싸움!
유치하지만 언제나 일어나는 싸움.
-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아주 좋아. 이대로 나가야겠는데?
-예!? 안 돼요! 안 돼요!
-아니야. 요즘은 이런 게 먹힌다니까? 진짜야.
PD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저런 대화를 더 좋아했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하연은 일단 찾아온 행운에 감사했다.
“전, 전 세계의 판온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를 제가…?”
하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라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
“아. 걱정할 건 없어요. 그리고 모든 선수들이 모이는 건 아니고, 나오고 싶다고 한 선수들만 나오는 자리니까… 선수들끼리 알아서 떠들 테니 적당히 통제만 해도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물론이죠!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요.”
하연은 주먹을 꼭 쥐고 방방 뛰었다.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앗. 지금 어디 가게?”
“대기실에 있는 선수들 만나고 대화 좀 나눠보려고.”
“과연….”
하연의 말에 매니저는 감탄했다.
역시 잘나가는 연예인은 이유가 있었다.
저런 식으로 먼저 미리 공부하려는 자세가 지금의 하연을 만든 게 아닐까?
“모두 안녕하세요. 반갑….”
“…….”
“…….”
“???”
하연은 대기실 안의 분위기가 초상집 분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우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
“…?!”
그리고 하연은 깨달았다.
‘중국 선수들이잖아!?’
“…실례했습니다.”
달칵-
하연은 뒷걸음질 친 다음 대기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스태프에게 따지듯이 외쳤다.
“왜 중국 선수들만 따로 모아놨어!?”
“아, 아니. 나도 모으려고 모아 놓은 게 아니야! 저 선수들이 방 따로 달라고 했다고!”
중국 선수들도 방송에 별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선 탈락한 다음부터 중국 선수들은 뭘 해도 욕을 먹었다.
판온에 접속을 해도….
-저 저 저 뻔뻔한 새끼들! 장강에 빠져 죽지 판온에는 왜 들어와!
-연습은 안 하고 판온만 하니까 예선을 탈락하지!
‘뭔 개소리야 그게!’
다른 방송에 나가기만 해도….
-저 저 저 뻔뻔한 새끼들! 장강에 빠져 죽지 방송에는 왜 나가!
-저러니까 예선을 탈락하지!
숨만 쉬어도….
-저 저….
-아 작작해! 숨은 쉬어야 할 거 아니야! 뒤지란 거냐!
-저 저 저 뻔뻔한 새끼들! 오히려 화를 내는 거 봐!
-저러니까 예선을 탈락하지!!
중국에서 개인 방송을 진행하는 플레이어들은 아예 뒤에 찾아가서 ‘예선 탈락자’ 같은 쪽지를 붙이고 튈 정도였다.
이쯤 되면 성인군자도 빡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들은 방송에 나가야 했다.
-저희 나가면 욕만 먹을 텐데 나가기 싫습니다.
-그건 너희 사정이고, 나가서 게임단 홍보하라는 게 위의 명령이다.
-하지만 저희 나가면 욕만 먹을 텐….
-그러게 누가 예선 탈락 하랬나? 나가서 게임단 홍보하고 와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
자본주의 사회는 냉정했다.
각 선수들이 소속된 게임단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번 방송에 출연하는 걸 요구했다.
단순히 한국에서 열리는 특집 방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전 세계 팬들이 한국 판온 방송에 자막 달아가면서 보고 있는 와중에, 결승 직전에 열리는 이런 방송에 쏟아지는 관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중국 선수들은 결국 터덜터덜 나왔고….
방송국에 요청을 했다.
-…본선 진출한 새ㄲ… 아니, 선수들하고는 다른 대기실 쓰게 해주십시오.
-아… 예….
스태프들은 차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와. 한국의 전통 건물인가? 참 아름다운데?”
“이것 봐! 연못 위에 꽃이….”
“방송국이 뭘 좀 아는데?”
몇몇 선수들은 흐뭇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송국 쪽에서 준비한 장소는 고적한 전통 정원이었다.
뒤에는 한옥이, 앞에는 정원이 위치해 있어서 눈을 감으면 상쾌한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만으로도 여기 온 보람이 있을 정도로.
…그러나 모든 선수들이 이 풍경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몇몇을 빼놓고는 풍경에 별 관심도 없었다.
“아. 그러니까 4강도 못 간 팀은 여기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이거지.”
“뭐? 지금 운 좋게 대진표 빨로 올라가놓고 입을 놀리는 거냐? 그래서 너희 팀 킬이 어떻게 되지?”
“누가 추첨 그렇게 뽑으랬나? 혓바닥이 지나치게 길군.”
“이 자식이 진짜!?”
“한번 해볼까!?”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캐나다 국가대표팀 선수인 베일리가 전 세계에서 온 판온 선수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입을 연 것이다.
-다들 반갑습니다!
-반가워. 베일리. 네 플레이는 잘 보고 있어.
-요즘 잘하던데?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다들 정말 잘하시는 분들이라 이렇게 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본선 올라간 것만으로도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겸손이 심하군. 베일리.
-맞아. 베일리. 여기 본선 못 간 선수들도 있는데 그러면 재수없다고. 하하하!
-하하하하하! 여기 설마 본선 못 간 선수들이 있을 리가… 앗.
-앗.
-…미, 미안.
-…….
-어, 어쨌든 본선 올라간 건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거잖아?
-맞아. 실력이 없다면 위로 올라갈 수 없지.
-물론 운도 어느 정도는 필요로 하지. 강적만 피하면 더 올라갈 수 있으니까.
영국대표팀 선수, 조너선은 슬쩍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걸 본 독일대표팀 주장 매티아스가 발끈했다.
-지금 우리한테 하는 소리냐?
-딱히 그쪽한테 한 소리는 아니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 자식이… 어디서 날먹 전술로 운 좋게 올라온 주제에? 네놈들은 우리를 만났으면 본선도 올라오지 못했어! 김태현한테 개패듯이 맞은 놈들이!
-누, 누가 들으면 넌 이긴 줄 알겠군!
그렇게 추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가 누가 더 잘했나!
원래 서로 붙었다면 깔끔하게 결과가 나왔겠지만, 그러지 않으니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하연은 절망했다.
‘망했어… 망했어….’
하필이면 왜 그녀가 맡은 특집에 이런 미친 상황이 벌어진단 말인가.
“아주 좋은데?”
“네???”
“얼마나 재밌어. 그냥 말리는 척만 하고 내버려 두자구.”
“…….”
순간 하연은 PD의 머리통이 멀쩡한지 의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말린다고 말려질 것도 아니고 그냥….
“여러분. 다들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됐어?! 어디서 바로 탈락한 찌끄레기들이….”
“좋아, 붙어! 붙어보자고! 캡슐 갖고 와!”
“다들 진정….”
대충대충 말리던 하연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봐! 그쪽이 심판을 내려줘!”
“맞아! 전문가의 시선이라면 누가 더 잘하는지 알겠지!”
“…….”
하연은 경악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 아니. 제가 판단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싶은데?”
“우린 당신을 믿어.”
“맞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믿어 미친놈들아.’
하연은 속으로 욕했다.
이 자식들이 어떻게든 승부를 내고 싶어서….
“한국인들은 게임에 관해서는 모두 철저하고 공명정대하잖아?”
“그거 편견….”
“자. 빨리! 여기서 순위를 정해줘!”
“우리도!”
소란이 커지자 별 관심 없이 앉아 있던 다른 나라 선수들도 솔깃해했다.
“왜 그래?”
“저 진행자가 순위를 정해준다는군.”
“어엇… 정말인가? 낮게 나오면 창피하겠는데.”
“…….”
하연은 탈주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런 하연을 구해준 건 한국 선수들이었다.
“걱정할 거 없다.”
“!”
“이야기는 들었다. 순위를 정하고 싶다고?”
“김태현!”
태현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반가워했다.
드디어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선수가 나타난 것이다!
“김태현! 내 말 좀 들어봐! 저 자식들이 글쎄….”
“저놈 말 듣지 마! 아까 너 욕한 놈이야!”
‘애새끼들이야?’
하연은 선수들의 모습에 욕했다. 선생님한테 이르는 꼬마들도 아니고!
“내가 순위를 매겨주지.”
“!”
“역시 김태현이군…!”
자신만만한 태현의 태도에 다들 기대의 눈빛을 던졌다.
김태현이 내린 평가라면 믿음직했다.
“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팀을 짜라.”
태현의 말에 다들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다음은? 뭘 하면 되지?”
“바보야. 원래 한국 방송은 이럴 때 60초 정도 기다린다고. 김태현. 광고 시간이지?”
“…그건 아니고. 자. 갖고 들어오십시오.”
스태프들이 음식 재료들을 끌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선수들이 의아해했다.
“???”
“각자 열심히 만들어봐라. 그걸로 순위를 매기겠다.”
“…뭔 말도 안 되는 논리야!? 그걸로 어떻게 매긴다고!?”
“너 어느 나라 선수였지?”
“저놈 영국 대표팀 선수야. 김태현.”
“그렇군. 하기 싫다는 영국은 꼴찌로….”
“…….”
조너선은 경악했다.
뭐 이런 치사한 새끼가!?
“다, 다들 저런 평가에 만족하는 거야?”
“뭐 영국이 꼴찌를 맡아준다면야….”
“김태현이 하겠다는데 의견을 존중해줘야지.”
조너선은 어이가 없었다.
가장 어이가 없는 건 중국대표팀 선수들이 은근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친놈들이 지금 꼴찌 피하려고…!?’
조너선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좋아. 놀아나주지! 영국 요리를 보여주겠어!”
“?”
“??”
* * *
원래 태현은 같은 팀 선수들과 함께 한 상 푸짐하게 차린 다음 즐기려고 했다.
예전부터 이세연과 이야기했던 방송 컨셉!
요즘 유행이기도 하고, 고생한 동료들 대접도 해주는 것이니만큼 목적도 좋았다.
“…아니. 선수들 너무 많은데?? 뭘 이렇게 초대를 많이 했어??”
하지만 선수들의 숫자는 태현의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심지어 예선 탈락한 선수들도 와 있었다.
왜 왔지??
“양을 늘려야 하나?”
“갑자기 귀찮아지는데. 내가 한국 선수들까지는 대접해 준다고 쳐도 다른 나라 선수들까지 밥 차려주기는 싫군. 음… 바꾸자.”
“어떻게?”
“재료 던져주고 각자 자기들 먹을 건 자기들이 만들라고 하자고. 이유야 대충 갖다 붙이면 되지. 원래 이런 게 협동해야 하는 거잖아.”
이세연은 잠깐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태현의 말이 맞았다. 뭐가 예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챙겨준단 말인가.
“그러게? 그러자.”
“그래. 재료 갖다 줘.”
“…….”
‘진짜 괜찮은 거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