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38화
한국대표팀 선수들이 모인 자리.
이세연은 태현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요즘 하고 있는 퀘스트가 좀… 빡세서….”
“??”
태현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이세연은 속으로 놀랐다.
‘대체 무슨 퀘스트를 하고 있는 거지?’
“저도 요즘 하는 퀘스트가 좀 힘든 편입니다.”
류태수도 공감이 간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판온 랭커들끼리 모이면 이런 식의 경쟁이 살짝 있곤 했다.
‘누가 누가 더 난이도 높은 퀘스트 하고 있나’ 시합!
그런 점에서 류태수는 이번에 아주 자신만만했다.
“어떤 퀘스트길래?”
“무려 마계 퀘스트입니다.”
“오….”
태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 미지근한 반응에 류태수는 불이 붙었다.
꼭 놀라게 하고 싶다!
“그냥 평범한 마계 퀘스트가 아닙니다! 악마 공작이 다스리는 마을에 잠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퀘스트입니다.”
“그렇군.”
“…그런 다음에 악마들이 꾸미는 음모를 알아내고….”
“그런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미지근하자 류태수는 결국 거짓말을 했다.
“…악마 공작을 직접 만나서 속이기도 해야 하는 퀘스트입니다.”
“그건 아니잖아.”
옆에 있던 류다영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잘 말하다가 갑자기 퀘스트가 산으로 간단 말인가.
류다영의 냉정한 지적에 류태수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사실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뭐야. 그랬나?”
“당연히 거짓말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이세연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지적했다.
마지막 말은 누가 들어도 허풍이었던 것이다.
그 말에 태현과 이다비는 시선을 교환했다.
‘…….’
‘저거 비슷한 거 이미 깨지 않으셨어요?’
‘그러게….’
“그래서 넌 무슨 퀘스트 하고 있는데? 나도 지금 꽤 어려운 퀘스트 하고 있어.”
이세연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류태수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세연도 아주 조금은 자기가 어려운 퀘스트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하고 싶었다.
“무슨 퀘스트인데?”
“흑마법사 집단이 하나 있는데, 고대 제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본 있는 곳이거든? 단서를 하나하나 추적해서 잠입한 다음 구성을 파악하는….”
“그렇군.”
“뭐야. 반응이 너무 미지근하잖아. 넌 뭐 하고 있어?”
“난… 지금 과거로 끌려가서 내 목숨 노리는 고대 제국 시절 악마 군단들한테 도망치고 있어.”
“…….”
“…….”
충격받아서 할 말을 잃은 한국대표팀 선수들.
그들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다음 경기 이야기하죠?”
“그럴까?”
전 세계 사람들의 축제, 판온 월드컵도 이제 결승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반대쪽에서 올라온 상대는 미국대표팀.
판온 월드컵 시작 전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한국대표팀이 김태현과 이세연 같은 괴물 둘이서 이끄는 일류 랭커들의 팀이라면 미국대표팀은 전원이 쟁쟁한 초일류 랭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형 게임단들이 미국에 여럿 위치해 있는 만큼 선수 풀도 한국보다 몇 배는 넓었다.
뉴욕 라이온즈나 보스턴 타이거즈, 로스앤젤레스 파이어 등 이런 게임단들에서 선수들을 모으니 다른 대표팀 주전으로 뛰어도 손색이 없는 선수들이 후보로 대기하고 있을 정도.
덕분에 미국대표팀을 상대해야 하는 나라들은 죽을 맛이었다.
-치사한 새끼들! 정정당당하게 해라! 뭔 놈의 후보들이 저렇게 강해!?
-돈으로 팀 구성하면 누가 우승 못 해!
특유의 밴픽 규칙으로 잘하는 선수를 날려도 더 잘하는 선수가 후보군에서 튀어나왔다.
게다가 저렇게 선수 풀이 넓다는 건 쓸 수 있는 전술도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나름 여러 전술을 구사하는 대표팀도 미국대표팀 앞에서는 추풍낙엽일 뿐.
상대가 스피디한 근접 딜러 위주의 공격 전략을 선택하면 묵직하게 탱커 위주로.
상대가 탱커 위주로 느린 장기 운영을 선택하면 원거리 딜러 위주로.
한마디로….
“정석 중의 정석이지.”
“원래 정석이 가장 힘들어.”
태현과 이세연은 푸념하듯이 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대표팀 경기하는 걸 몇 번 봤지만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사기가 떨어지겠지.’
이세연까지는 괜찮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솔직히 미국대표팀 선수들과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류태수나 류다영도 괜찮은 선수였지만 상대들 실력이 워낙 뛰어났던 것이다.
거기에 미국대표팀에는 스미스까지 있었다.
‘스미스 보면 아이템 제한이 걸린 게 차라리 나은 거 같기도 하단 말이지.’
투기장 전용 장비로 싸워야 한다는 규칙이 차라리 낫게 느껴질 정도로 스미스는 더럽게 단단했다.
전성기 성기사들을 뛰어넘는 끈질긴 능력!
막대한 HP, 높은 방어력, 각종 회복 스킬들….
저런 탱커를 상대하다 보면 무슨 숟가락으로 몬스터를 때려잡아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와서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것도 맞는 말이군.”
“그리고 준우승도 잘한 거잖아.”
“우리 팀은 저번에 리그 우승했는데.”
“…꼭 그걸 지금 상황에 말해야 해? 응?”
* * *
결승전도 결승전이었지만, 그전에 치러야 할 행사가 더 많았다.
4강전도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는데 결승전은 더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결승전 경기가 열리는 곳은 바로 서울!
저번 리그 우승자에 대한 판온 측의 존중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 열리는데 한국 선수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출전도 못 하는데 왜…?”
“그래서 하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하하.”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한국 선수들도 나와서 행사에 참가했다.
뽑히지 못한 건 뽑히지 못한 거고, 이건 별개였다.
팬들에게 자기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 평생에 한 번 있을 법한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아쉽지 않겠는가.
“엇. 저기 중국대표팀 아니야? 쟤네도 왔네?”
“결승이니까 탈락했다고 그냥 안 올 수는 없지.”
“표정 썩어들어 가는 거 같은데… 주최 측이 너무한 거 아니야?”
딱히 중국 쪽 선수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국 선수들은 그들을 동정했다.
예선 탈락한 국가대표팀 선수들까지 불러와서 박수 치게 하는 건 좀 너무 잔인하지 않나?
판온 주최 측이 생각보다 정말….
“매일 이러면 좋겠습니다.”
“야. 그건 그거대로 힘들지. 매주 야근하란 소리냐?”
평소에는 판온 관련 촬영을 하더라도 한두 팀만 동원해서 나오는 방송국들도,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우르르 나와 있었다.
방송 카메라만 수십 대에 지미집과 드론까지 날아다니는 상황.
평소에는 게임 관련 방송에 별 관심이 없는 방송국들까지 나와 있었다.
“저 사람들은 9시 뉴스면서 왜 나온 겁니까?”
“워낙 큰 행사니까 인터뷰 좀 따가려고 나온 거겠지. 정신 차리고 따라와. 해외 선수들 섭외해야 해.”
벌써 방송국 관계자들이 여러 국가 선수들에게 접근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한국에 이렇게 해외 선수들이 오는 일이 많지 않으니,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방송에 내보내려는 것이다.
“오우! 펭귄팬더 선수! 평소부터 참 팬이었습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 정말 많이 활약하셨죠!”
“…….”
‘야 이 멍청한 자식아! 예선 탈락한 나라 선수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냐!’
상대 선수가 삐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그제야 직원은 아차 싶었다.
‘예선 탈락한 걸 잊고 있었습니다!’
‘그걸 잊으면 어떡해!’
‘저 정도쯤 되면 당연히 예선은 통과했을 줄 알았죠! 그렇게 못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
중국 선수는 더 큰 상처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용서하지 않겠다 한국 방송국…!
이런 식으로 마찰을 일으키는 곳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잘 굴러가는 곳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한국 여러분. 예. 저는 김태현 선수를 압니다.”
“네?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요?”
기자들은 당황했다.
아직 두유 노우 김태현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대답하는 스미스!
“어차피 물으실 것 다 압니다.”
“아니… 물을 생각 없었는데….”
“그걸 왜 물어봐요? 이미 둘이 아는 사이일 텐데.”
기자들이 아무리 말해봤자 스미스는 웃으면서 듣지 않았다.
“저한테 들키셔서 그런 모양이군요. 한국에 오는 사람들한테 다 김태현 아시냐고 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아, 아니. 안 그러는데….”
“때와 상황을 보고 그래야지 들어오는 외국인들한테 다 그러면 그게 미친놈 아닌가?”
“저는 부대찌개를 좋아합….”
“야. 누가 스미스 좀 말려라.”
“이리 오세요, 좀.”
결국 다른 미국 선수들이 스미스를 끌어냈다.
저놈 인터뷰하라고 앞에 세웠더니 헛소리만 하고 있어!
* * *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이번 경기 때문에 고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김태현 선수.”
이제는 MBS의 간판 PD나 마찬가지인, 배장욱 PD가 입을 열었다.
판온 게임 방송의 살아 있는 신화.
다른 방송국들이 개인 방송에도 밀리고 휘청거릴 때 배장욱 PD는 내놓는 것마다 연신 히트를 치는 거물이었다.
그런 배장욱 PD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눈앞의 선수 덕분이었다.
“표정이 안 좋은 건 행사 돌아다니느라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그, 그렇군요. 체력에 문제가 있으시다니 걱정입니다. 보양식이라도….”
“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케인이 자꾸 헛소리를 해서 그거 감시하느라….”
“…….”
배장욱은 처음으로 이 천재를 동정했다.
예전에는 그냥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혈기 넘치는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볼수록 참 짊어지고 있는 게 많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임단 하나를 직접 이끌고 나가면서 동료 선수들을 책임지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직접 광고 따오고 투자자 불러오고 그런 와중에 성적은 유지해야 하고….
‘정말 케인 선수는 감사한 줄을 모르는 거 같군. 나중에 만나게 되면 넌지시 충고를 해야겠어!’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배장욱은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원래 특별 프로그램을 제안하려고 왔었는데 태현을 보니 제안하기가 미안해졌다.
“해외 선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이번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담아보고 싶었는데, 김태현 선수가 힘드시다면….”
“그 정도는 상관없죠. 경기 시작까지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
생각보다 너무 흔쾌한 수락에 배장욱은 더더욱 놀랐다.
“제,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걸 귀찮아하시는 걸로 아는데….”
“귀찮긴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나오는 일인데 안 할 수는 없죠.”
태현 혼자만의 일이라면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은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까지 나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거라면, 태현은 한 번쯤 양보해 줄 수 있었다.
게임단을 운영하면서 선수가 되거나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절실한지 새삼 느꼈던 것이다.
‘정말 달라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달라진 태현의 모습에 배장욱은 감탄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선수들을 위해서 나와 주겠다고 하다니.
솔직히 감동스러웠다.
“안 그래도 저번에 이세연하고 같이 뭐라도 하나 하자고 했었는데 잘됐네요. 이번에 같이 하면 되겠네. 저희 둘이 따로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씀하시고….”
말하던 배장욱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태현과 이세연이 둘이 뭘 따로 준비하려는 거지?
‘에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