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36화
-좀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태현은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이다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주실래요?
-…….
한 세 번쯤 듣고 나서야 이다비도 납득할 수 있었다.
-와… 와….
-납득 못 해도 이해할 테니까 억지로 받아들이지는 말고….
-아, 아닌데요. 받아들였는데요.
‘아직 못 받아들였군.’
이다비는 머릿속으로 정리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이해는 못 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언데드 군세 모여 있는 묘지에 갔더니 걔네가 고대 제국의 후계 비슷한 거라서 아키서스 교단 교황인 태현 님을 보고 좋아해서 오른팔에….
‘…으으응!’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얘네가 잘츠를 상당히 미워하는데, 잘츠가 뭔 짓을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돼.
-잘츠가요? 그럴 리가… 있네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태현과 이다비는 바로 동의했다.
보통 언데드 대군세 vs 건국왕 하면 후자에게 믿음이 가야 하는데, 잘츠는 믿음이 잘 가지 않았다.
뭔가 뒤통수를 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다!
-혹시 나 대신 조사해 줄 수 있어? 나는 한동안 이 언데드들하고 같이 있어야 할 테니까.
-네. 지수하고 같이 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 * *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유지수는 이다비의 설명을 듣고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다비는 잘 알고 있었기에 참을성 있게 설명해 줬다.
그 모습에 유지수는 놀랐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시다니!’
“왜 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바로 받아들이시는 게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다비는 의아해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미친 개소리냐고 할 거라구요.”
‘그 정도까진 아닌 거 같은데.’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태현과 같이 다니면서 상식의 선이 많이 무뎌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잘츠 왕의 뒷조사를 해야 해.”
“맡겨만 두세요!”
유지수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여기 잘츠 왕국 전문가가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는 과거의 잘츠 왕국이었지만, 세상에는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 든든한 모습에 이다비는 안심했다.
“좋아. 그러면 따라갈게?”
“네! 따라오세요.”
유지수는 자신 넘치는 걸음걸이로 이동했다.
이름 없는 마을이라고 해도 구조는 다 비슷했다.
밖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성벽.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중요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촌장 저택이나 내성.
‘아하.’
이다비는 유지수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건국왕 잘츠는 지금 왕국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잘츠가 없는 사이, 왕국의 귀족 NPC들을 포섭해서 정보를 얻어낸다!
상인 플레이어들이 많이 하는 퀘스트 방식이었다.
‘역시 믿음직스럽네.’
이다비는 유지수 뒤를 쫓았다. 역시 잘츠 왕국 출신 플레이어라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촌장의 대저택>에 입장합니다.]
“촌장 나와 이 자식아!”
“!??!?”
이다비는 기겁해서 고개를 돌렸다. 유지수가 활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 안 하면 너는 오늘 죽은 목숨이야! 알아!? 이 화살 보여!?”
“아, 아니 잠시만…?”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되나!?
[<활잡이의 선포>를 시전합니다!]
[<산사람의 협박>을…]
[……]
[촌장이 공포에 질립니다!]
[협박에 성공합니다!]
유지수는 바로 촌장에게 달려가 화살촉을 목덜미에 들이댔다.
촌장은 비명을 지르면서 엎드렸다.
-아이고!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이 왕국에 살면서 죄 없는 사람은 없어! 모두가 다 죄가 있다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다비는 말려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이게 유지수의 방식이라면 그저 옆에서 도울 뿐.
…이게 맞나 좀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같은 팀이니까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지!
“잘츠 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뭔가 수상쩍은 짓을 했을 거야! 뭘 했지? 황실의 보물이라도 훔쳤어? 황실의 인물이라도 감옥에 가둬서 힘을 뺏었어!?”
-아, 아닙니다.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둬서 힘을 뺏는다니, 어떤 패악한 자가 감히 그런 짓을 한답니까!?
“…….”
듣고 있던 이다비는 살짝 뜨끔했다.
-그… 그냥 전투에 참가 안 했을 뿐입니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 * *
-내 원래 이름은 본할라드. 제국의 3군단을 맡아서 이끌고 있었지.
“…….”
상대가 갑자기 자기 사연을 털어놓자 태현은 좀 당황했다.
…원래 이런 건 좀 진영 찾아서 아이템도 찾고 설득도 하고 친해져야 털어놓는 거 아닌가?
‘뭐 이리 쉽게 털어놔?’
[카르바노그가 원래 종교 앞에서 사람들은 좀 약해지고 참회하는 면모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랬다.
태현 본인은 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단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 아닌가.
그런 교황을 만나자 둠 나이트는 스스로의 잘못을 털어놓고 회개하려고 했다.
“그… 그랬군.”
-나는 폐하의 명을 받아서 최선을 다해 싸웠네. 북쪽에서는 짐승 같은 수인족 야만인 놈들을 막아냈고 동쪽에서는 거인들과 오크들이 날뛰는 걸 막아냈고 남쪽에서 괴수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걸 막아냈지. 하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러는 사이 수도에서는 악마들이 나타났고 황실에는 굶주린 혼돈의 첩자들이 찾아왔으니.
“저런.”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무슨 동서남북+정가운데에서 총공격이 들어온단 말인가.
태현이 저 정도쯤 상황에 처했으면 그냥 왕국 포기하고 ‘나를 위해 살겠다’ 하고 빠져나갔을 것이다.
-물론 제국을 지키려는 뜻 있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어. 교황 성하도 알고 있겠지만, 아키서스 교단의 도움이 컸지. 북쪽에서 싸울 때는 해일을 일으켜서 도와줬고, 동쪽에서는 산을 무너뜨리고 지진을 일으켜서 도와줬지. 남쪽에서는 또 어땠나? 그 지독한 독공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
[정보가 추가됩니다!]
[권능 스킬,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에 대한 추가 정보를 얻었습니다!]
[여러 스킬로 구성된 권능 스킬,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은 강력한 행운의 힘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스킬입니다.]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아키서스 권능 스킬 퀘스트>
예로부터 아키서스의 권능을 이어받은 교황들은 그 권능을 갈고닦아 후대에 넘겨주었다.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은 교단의 교황들이 일으킨 업적들이 모인 스킬….
‘이 권능 퀘스트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진행이 되긴 하는군.’
<아키서스의 천재지변> 퀘스트는 워낙 난이도가 높고 진행이 더뎌서 다른 직업 퀘스트를 먼저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이라는 업적을 이어받고 그 업적을 이어나가라!
(아키서스의 거대한 해일: 0/1)
(아키서스의 산맥을 무너뜨리는 지진: 0/1)
(아키서스의 근원 역병: 0/1)
(아키서스의 화염 용오름: 0/1)
보상: <아키서스의 천재지변>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퀘스트창을 읽었다.
그러니까 이런 걸 한 번 해야 얻을 수 있는 건가?
‘화염 용오름은 몇 번 쓴 적 있는데, 그걸로는 안 되나 보군.’
[카르바노그가 더 강하고 많은 적들을 태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아마 그렇겠지. 기준을 모르니 정확하게 할 수도 없고….’
태현이 퀘스트창을 읽고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둠 나이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수도에서도 그랬지. 아키서스 교단의 도움으로 수도를 불태우고 황실 궁전을 무너뜨려서 적들을 전부 죽일 수 있었으니.
“…아, 아니. 뭐? 왜?”
-그야 적들이 많고 강했으니까.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지 않나.
둠 나이트는 태현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태현은 상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옛날의 상식은 지금과는 다르니까. 음. 그래.’
[…카르바노그가 저거하고 똑같이 재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미친 개소리 하지 말라고 카르바노그.’
태현은 정색했다.
그냥 똑같이 쓰면 되지 위치와 상황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장난하나?
그러면 사실상 깨지 말라는 소리와 별 차이가 없어지는데….
“그래서 대충 멸망했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수도가 박살 났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싸우기 위해 힘을 모았다. 대륙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였지.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잘츠 놈이 비겁하게 도망친 거다!
쾅!
둠 나이트는 분노를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이름만 말해도 이가 갈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결국 패배했지만, 나는 죽어가면서 맹세했다! 황제 폐하의 이름에 대고 말이다! 내가 죽더라도 전투에서 도망친 비겁자 놈들은 모두 죽여 버리겠다!
“으음. 그건 너무….”
-너무 약하다고? 알겠다! 삼족을 멸하자!
“…심하지 않냐고 말하려고 했는데.”
태현의 말에 둠 나이트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도망자는 처형해야 한다고 추가한 게 아키서스 교단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
태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아키서스 교단이 다 잘못했다!
“음. 본할라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맹세를 지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조금 있지 않을까?”
-??
“지금 남아 있는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나 악마 놈들이 있잖나. 그런 놈들을 먼저 다 죽여 버린 다음에 잘츠를 잡으면 어떨까 싶은데.”
-하지만 그러다가 잘츠가 도망치면?
“내가 알아보니 잘츠는 왕국 차리고 잘 살고 있다더군.”
-감히!!
“그래. 그런 놈이 설마 도망을 치겠어? 그리고 그놈이 좀 멍청하잖아.”
-하긴 잘츠 놈은 예전부터 좀 멍청했지.
“…….”
그건 또 바로 동의하는 둠 나이트의 모습에, 태현은 황당해했다.
‘겉모습은 많이 달라졌는데 평가는 별로 안 달라졌나?’
“원래 복수도 냉정하게 계산 좀 해가면서 순위 매기고 차례대로 해야 하는 법이지.”
-과연… 역시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 성하. 복수 전문가다워.
[칭호, 복수 전문가를 얻었습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옛 칭호를 복구했습니다. 명성이…]
[교단의 평판이…]
‘와. 정말 공짜로 줘도 기분 더러운 칭호군.’
-알겠다. 그렇다면 일단 죽여야 할 적부터 갈아버려야겠군. 날 도와주겠지?
“물론이지.”
안 도와준다고 말하면 ‘너는 아키서스 교단이 아니야!!’ 하면서 덤벼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태현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예!
-여기 교황 성하를 지켜라. 적들이 가장 먼저 노릴 테니까!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온몸에서 죽음의 오오라를 지독하게 풍겨내는 최정예 데스 나이트들이 태현을 둘러쌌다.
태현이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이 정도로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는데.”
-교황 성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걸로도 부족한데. 기다리도록. 더 불러와야 할 테니까. 마법사들이 있으면 불러오고, 괴수들도 끌고 와라. 교황 성하를 지켜야 할 테니까.
둠 나이트는 태현을 보며 말했다.
-교황 성하. 적들은 가장 먼저 교황 성하부터 노릴 게 분명해. 자기가 죽든 살든 무조건 노리겠지. 그만큼 원한이 깊으니까.
“…총사령관은 그쪽이니까 그쪽을 먼저 노리지 않을…?”
-아니! 교황 성하부터 노릴 거야.
-교황 성하부터 노릴 겁니다.
-맞습니다. 교황 성하부터 노릴 겁니다.
“…….”
태현은 슬슬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