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23화
“업적을… 없앤다는 게 무슨 의미지?”
“???”
자리에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레벨이나 스탯, 스킬을 가져가는 거면 상상이 갔다.
그런데 업적이라니?
‘칭호 가져가는 건가?’
칭호를 가져가는 거면 조금 애매하긴 했다.
태현의 칭호들 중에는 쓸모 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쏠쏠한 칭호들도 몇 개 있었으니까.
재수없게 그런 게 걸리면….
“칭호 아닙니까? 이번에는 제가 열어보죠.”
미다스 길드원 중 한 명이 자신 있게 나섰다.
김태현 도우러 온 이상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쓸모 없는 칭호도 많았으니….
[자격이 없습니다.]
“…….”
길드원은 상처 받은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자격 없다고 할 건 없잖아….
“왜 그냥 나와?”
“자격 없다는데요.”
“저런….”
김연지는 안타깝다는 듯이 길드원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평소에 레벨 업을 했어야지. 레벨이 낮으니까 무시를 받는 거 아니야.”
“레벨 높으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응. 좋은데? 좋은데?”
그렇게 말하며 김연지는 자신만만하게 걸어갔다.
[자격이 없습니다.]
“…….”
“뭐라고 나옵니까?”
“…이게 시간이 좀 걸리는….”
“자격 없다고 떴으면 그냥 나와라.”
태현의 말에 김연지는 고개 푹 숙이고 물러섰다. 길드원들은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험 통과해서 나한테만 자격이 있나 본데….’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일행 중 시험 통과한 건 태현밖에 없었다.
문을 열 수 있는 것도 태현뿐.
‘안 할 수는 없겠군.’
좀 불안하긴 했지만 안 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타격이 적게 걸리길 빌어야지.’
[업적이 하나 사라집니다!]
[<불의 마수를 처치>한 업적이 사라집니다.]
“…….”
“어떠세요??”
이다비는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칭호 그대로인데?”
불의 마수.
판온 초기 때부터 했던 랭커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이었다.
아탈리 왕국에서 사디크 교단이 한창 악명을 떨치고, 골짜기 토벌 퀘스트(그때만 해도 사디크 교단이 차지하고 있었었다)가 나왔을 때 그 골짜기를 지키고 있던 사디크의 보스 몬스터.
그 불의 마수를 처치하고서 받은 칭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업적이 사라졌다면서요?”
“그러게…? 경험치가 줄어든 것도 아닌데? 진짜 뭐지?”
* * *
대장장이 랭커, 해머맨은 으스대며 외쳤다.
“크핫핫핫! 내 승리다! 멍청한 놈들!”
“…….”
“아오 저 새끼 진짜 재수없네.”
“쫓아내면 안 되나?”
다른 대장장이 플레이어들은 해머맨을 노려보았다.
지금 해머맨은 골짜기 중앙 광장 근처의 <드워프 대장간>에 있었다.
<악마의 대장간>이 아니라 <드워프 대장간>이라는 게 매우 중요했다. 가끔 초보 대장장이들이 두 대장간을 헷갈려서 인생이 망하곤 했다.
그 <드워프 대장간>에서도 가장 좋은 화로를 차지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드워프 어르신들!”
-알겠으니까 그만 소리 지르고 할 거 있으면 빨리 하게.
이 <드워프 대장간>은 원래도 경쟁이 있었지만, 요즘 경쟁이 몇십 배로 치열해졌다.
대장간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가치가 최근 드러난 것이다.
[<드워프 대장간>에서 몇 배의 효율을 뽑는 공략…]
[평소에 운 없다고 서러우셨다고요? 당신도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교단 실버 등급 이상부터 할 수 있는 대장간 공략…]
아키서스 교단의 사제들을 공적치 써서 빌린 다음, 대장간의 드워프들한테 도움을 받아서 각종 버프를 추가로 받는 대장장이 루트.
이 루트는 확률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대장장이 랭커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어주었다.
성공 확률 1% 미만 아이템도 정말 제작할 수 있다!
“우우우!”
“비겁하다! 해머맨! 돈으로 승부하다니!!”
물론 해머맨한테 자리 뺏긴 대장장이들은 성난 목소리로 야유할 뿐이었다.
치사하게 돈으로 주변 NPC들을 매수하다니!
그들처럼 정정당당하게 기다려서 대장간 이용하려던 선량한 플레이어들만 손해를 보지 않는가.
“억울하면 너희들도 돈을 내! 미친놈들아! 다른 도시 대장간은 다 이용료 받아!”
“저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봐! 저 놈이 어디 신성한 아키서스 교단의 도시에서 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돈 밖에 모르는 놈! 사람의 진심은 돈보다 더 중요해!”
-…….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해머맨이란 모험가가 맞는 거 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드워프 대장장이들도 황당해했다.
물론 이 드워프 대장간이 영주 명령으로 이용료 없이 무료로 개방되어 있긴 했다.
근데 대장장이란 놈들이 저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살짝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요하면 이용료를 내 미친놈들아…!
다행히 해머맨은 야유에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 대장간을 몇만번을 이용했는데 저딴 개소리에 넘어가진 않았다.
“너희들은 짖어라. 난 돈 내고 빨리 쓸 거야.”
“크윽…! 너 이 자식. 아키서스의 심판이 내릴 거다!”
“아키서스의 심판은 돈 안 내는 너희들한테 내려야지 왜 나한테….”
[불의 마수가 부활합니다!]
[시공을 뚫고, 골짜기에 불의 마수가 나타납니다!]
“…심판이다!! 심판이다!!”
“뭔 심판이야 미친놈들아! 누가 풀어놓은거지!”
“비상!! 다들 대피해!! 누가 골짜기에 몬스터 풀었어!?”
“대신전 뚫린 거 아냐!? 마계 통로 있잖아!”
“악마들이 거기를 뚫고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
갑자기 나타난 보스 몬스터.
그 등장에 중앙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삼중 성벽을 포함해서 각종 방어 시설이 있는 골짜기에 이런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불의 마수가 약한 몬스터도 아닌 만큼 광장을 포함해서 시설들이 모두 쑥대밭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뭐?? 몬스터가 중앙 광장에??”
“공적치 포인트 얼마 주냐??”
다른 곳에서 쉬고 있다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랭커들!
골짜기도 예전과는 플레이어들 숫자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교단 공적치 포인트가 부족해서 허덕이는 만큼 이런 보스 몬스터의 등장은 오히려 좋다!
“불의 마수 남쪽으로 이동! 과수원 쪽으로 갔다!”
“오케이! …야! 없잖아!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치사하게 혼자 잡으려고 개수작 부리지 마라!!”
“북쪽으로! 북쪽 골짜기로 올라가려고 한다!”
불의 마수는 이미 한 번 나타난 적 있는 보스 몬스터인 만큼, 공략 방법도 이미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도시 한복판.
필요한 아이템은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었다.
“얼음 마법 주문서 있는 대로 전부 다!”
“냉기 인챈트 된 화살들 다 갖고 와!”
척척척척-
랭커들뿐만 아니라 나름 레벨 높은 플레이어들도 모두 다 뛰어들어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도망을 왜 친단 말인가.
이 골짜기 안에서는 악마 공작이 나타나도 잡을 자신이 있는데!
“공격 개시!”
파파파파파파팍!
[<냉기가 흐르는 상급 화살>이 치명타를…]
[……]
[……]
불의 마수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기껏 나타났는데 사디크 교단은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골짜기에는 이상한 놈들만 있고….
“놈이 북쪽 골짜기 산으로 올라가서 숨으려고 한다!”
“잡아! 놓치지 마!”
“잠깐. 저거 생포하면 공적치 포인트 더 주나?”
* * *
밖에서 그런 소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귓속말이 막혀 있는 태현 일행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으음. 아무 대가 없이 열리면 좋은 거겠지?”
“그렇겠죠?”
“일단 들어가자.”
태현은 <식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번쩍번쩍 빛을 뿜어내고 있는 빛의 정령이 다가왔다.
[이름 없는 빛의 정령이 당신을 환영합니다!]
-모험가! 여기까지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지금부터 아는 사이가 되면 그만이지!
매우 친근하고 따뜻한 성격을 가진 빛의 정령.
귀엽게 반짝이는 모습에 다른 일행들은 모두 감탄했다.
“되게 귀엽네요?”
“예전에 화염 정령 만난 적 있었는데 걔랑은 완전 정반대다.”
그러나 태현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판온에서는 귀엽게 생긴 놈들이 더 위험한 경우가 많지.’
당장 카르바노그도 귀여운 외모와 달리 살벌한 스킬세트들을 갖고 있지 않던가.
[카르바노그가 쑥스러워합니다.]
-자자! 이리 따라와! 네가 시험을 통과해야 우리들도 나갈 수 있다고!
“…?”
태현은 빛의 정령을 따라서 마을 가운데로 걸어갔다.
“전의 마을처럼 내가 해왔던 퀘스트들을 시험하는 건가?”
-그건 예전 마을에서 하는 시험이지! 이미 끝났으니까 그걸 다시 할 이유가 없어! 넌 이미 통과했잖아?
“그렇긴 한데… 그러면 무슨 시험이지?”
-무슨 시험이겠어?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
“…??”
-자. 여기 거북이, 다리, 열쇠, 문, 나를 갖고 문장을 만들어봐.
“…아니. 잠깐만.”
심리 테스트나 마찬가지인 질문에 태현은 황당해했다.
이건 답이 없잖아??
‘이건 진짜 운이잖아?’
[카르바노그도 황당해합니다!]
이제까지 해온 업적을 평가하는 것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건 그래도 기준이 있고 납득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냥 진짜 운빨 아닌가…?
-자. 시작한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
-안 해도 돼. 문장은 알아서 만들어지거든.
[이름 없는 빛의 정령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문장을 읽어냅니다!]
-나는 거북이를 데리고 주변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패서 열쇠를 뺏은 다음 다리를 점령하고 있는 적들을 모조리 패서 길을 열고 문을 막고 있는 적들도 모조리 패서 열었다. 구나?
“…….”
뒤에서 듣고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도 수군거렸다.
“김태현 선수 저런 생각하고 지냈습니까?”
“좀 당황스러운데….”
“너무 폭력적이어서 안 되는 거 아냐?”
-아주 좋아! 훌륭해!
“!?”
태현도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빛의 정령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아주 전투적이고 호전적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자격이 있지.
슬슬 태현은 이 고대 제국의 시험이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그냥 다 통과하는 거 아니야?’
무슨 대답을 해주든 다 ‘OK’해주는 것 같은데….
* * *
[이름 없는 어둠의 정령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문장을 읽어냅니다!]
-그러니까 힘을 위해서는 동료들도 버릴 수 있다?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멋진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자격이 있어.
정령의 대답에, 뒤에 있던 스미스의 친위대 랭커들도 감탄했다.
“역시 훌륭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
“그런데 스미스 님. 앞에 무슨 몬스터 나오는지 좀 물어봐주십시오.”
친위대원들은 걱정스러워했다.
방금도 살점 드레이크가 나와서 친위대가 전멸할 뻔했던 것이다.
스미스가 아껴두던 사기 스킬들까지 꺼내서 닥치는 대로 팼기에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지….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 아닌가?
-걱정하지 마! 너희들에게 걸맞은 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오…! 역시…!”
어둠의 정령은 씩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지만, 플레이어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 * *
-힘을 위해서 동료를 버릴 수 있어?
“으음… 어려운 질문이군. 혹시 어떤 동료인지 물어봐도 되나??”
-…역질문은 안 돼!
빛의 정령은 당황했다. 설마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