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22화
‘하긴 유산을 아무한테나 줄 수 없긴 하겠지만….’
고대 제국의 유산이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할 테니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행동 한 번 실패했다고 탈락한다니….
-자. 여기 앉아보시지요.
“??”
태현은 떠나려다가 멈칫했다.
‘그냥 시험 통과하면 다음 마을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어…. 여기서 더 할 게 있나? 마을로 입장했으니 다음 마을로 가고 싶은데.”
-아. 네. 다음 마을로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전에 잠시 이 조사지를 작성해 주셔야겠습니다.
“….”
마을 악마가 내미는 조사지에 태현은 황당해했다.
“이게… 뭐지?”
-모험가 분들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고대 제국의 테스트입니다.
“….”
“….”
태현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모두 황당해했다.
보통 시험을 하면 ‘저기 가서 드래곤의 심장을 뽑아와라’, ‘요정왕의 왕관을 가져와라’ 같은 시험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테스트가 뭐 이럽니까? 뭘 잡아오게 해야 하거나 하지 않아요?”
미다스 길드원의 말에 마을 악마는 피식 비웃었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그런 무식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논리로 따지면 레벨 가장 높은 살인마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겠네요?
“….”
길드원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 아니.”
“야. 악마한테 말싸움으로 지면 어떡해.”
“근데 맞는 말이잖아!”
“잠깐. 왜 나한테는 저거 안 줘?”
김연지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길드원들이 대답했다.
“김연지 님은 악명이 낮아서 악마가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아앗…. 악명 관리한 게 여기서 이렇게 발목을 잡아?”
“그러게 말입니다.”
“…잠깐만. 김태현 선수도 악명은 낮을 텐데?”
김연지의 말에 태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 악명 높다.”
“진짜로!? 왜??”
“길드 동맹과 싸우느라 그런 거겠죠.”
길드원의 말에 김연지는 탄식했다.
“길드 동맹 진짜… 너무하네! 그런 나쁜 놈들하고 싸운다고 악명 스탯 올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판온이 잘못했네!”
“그러게 말입니다.”
“….”
뒤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길드 동맹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길드 동맹 길드원들 PK한 걸로는 악명이 거의 안 올랐다.
상대도 악명이 높거나 PK 페널티가 있어서 오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악명이 오른 이유는 태현이 오스턴 왕국의 성과 도시를 폭파시키고 약탈하고 도적들 불러오고 기타 등등 다른 퀘스트들을 하면서….
앞에 있던 마을 악마는 대화를 듣더니 체크했다.
-저런. 사악한 왕국군들과 싸우느라 악명이 오르셨다니. 정황을 참작해 드리겠습니다.
“….고, 고맙군.”
[이름 없는 마을 악마가 당신의 정황을 참작해 줍니다!]
[창자 마을 내 평판이 오릅니다!]
태현은 이 시험의 목적을 깨달았다.
이건 그냥 평범한 대화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했던 퀘스트들과 칭호, 업적들을 돌이켜 보면서 약점을 찌르고 막는 대결!
‘…다행히 화술 스킬이 활약할 수 있겠군.’
그나마 다행인 건 태현의 화술 스킬이 매우 높다는 점.
-자, 모험가 님. 예전에 칭호 <성 파괴자>와 <성벽 파괴자>를 갖고 계셨군요. 지금은 <위대한 파괴자>를 갖고 계시는데…. 혹시 지나가다가 건물을 보면 폭파시키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그러십니까?
“….”
태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카르바노그가 대신 나서서 변호해 주고 싶다고 외칩니다!]
* * *
“흩어지다니….”
“귓속말도 안 됩니다.”
“여러분, 당황하실 거 없습니다.”
스미스는 허둥지둥대는 친위대 랭커들을 달랬다.
“이건 오히려 기회입니다.”
“무슨 기회 말입니까?”
“미다스 길드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기회지요. 먼저 찾아서 죽여버립시다.”
“오오…!”
친위대 랭커들은 감탄했다.
들어온 지 1초 만에 바로 미다스 길드원들을 죽이자고 하는 저 결단력!
역시 스미스였다.
“스미스님. 저기 마을이 있습니다!”
[<횡경막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마을의 이름도 특이했지만,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입장할 수 없다는 말이 랭커들을 경계하게 만들었다.
“스미스 님, 물러나십시오. 제가 열겠습니다.”
친위대 랭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마을의 입구가 당신을 평가합니다.]
[대가가 정해집니다.]
[대가는 <경험치>입니다.]
“…가져가라!”
랭커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피 같은 경험치였지만, 스미스를 돕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경험치가 크게 감소합니다!]
[레벨이 1 줄어듭니다.]
“크으윽…! 기껏 레벨 320을 찍었는데…!”
“괜찮아! 다음에 다시 올리자!”
태현이 들었다면 욕을 했을 대화를 하고 있는 랭커들.
하지만 덕분에 문이 열렸다.
-어서들. 오십시오.
이번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 골렘이었다.
딱 봐도 평범한 재질의 골렘은 아니었기에 스미스 일행은 긴장했다.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무슨 금속이지? 문양도 바로 견적이 안 나오는데….’
[현재 마법 스킬이 낮아서 문양을 바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현재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
“너는 누구냐?”
-저는. 모험가들. 시험하는. 골렘입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뭘 시험하는 거지?”
-제국. 유산. 이어받을 자격. 시험합니다.
“!”
스미스도 그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렸다.
‘마을들을 통과하는 퀘스트다!’
그렇게 되면 스피드 승부.
미다스 길드는 물론이고 태현이라고 해도 양보할 수 없었다. 무조건 먼저 가져갈 생각이었다.
방패는 물론이고 다른 유산들까지!
‘원망하지 마십시오, 김태현 선수. 하지만 이건 제가 유리합니다.’
스미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태현의 실수는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
NPC들을 아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번에는 그게 실수가 됐다. 김태현 주변에는 김태현을 도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말해보십시오. 뭘 잡아오면 됩니까? 여기에는 무슨 몬스터가 있습니까?”
-그런. 야만적인 퀘스트. 안 함.
“??”
-설문지. 조사합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아, 아니….”
스미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 *
“성과 성벽을 무너뜨린 건 그러니까 위대한 희생이었달까?”
-과연. 그렇군요. 이 <자폭하는 기계공학자> 칭호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 혹시 요즘도 자폭하는 욕망을 갖고 계십니까?
“절대로 아니지. 물론 가끔 대륙의 위기가 찾아올 때 내 한 몸을 바쳐서 헌신해야 할 순간이 있긴 해. 내가 희생한 적도 있지.”
-아하. 그런 거군요. 그 다음은 <악마를 속인 자>인데….
“….”
태현은 당황했다.
이건….
변명이 가능한가?
-이 점은 아주 좋습니다. 악마를 속일 수 있다면 세상 어지간한 종족은 다 속일 수 있겠습니다.
[창자 마을 내 평판이 오릅니다!]
“…그게 좋은 건가?”
-예? 속은 게 멍청한 거지, 속인 건 똑똑한 거잖습니까?
“그, 그렇군.”
-그다음은 <귀족 살해자> 칭호인데, 혹시 귀족을 보면 죽이고 싶은 욕망이 드시는지….
그 이후로 한 시간 정도 태현은 이제까지 해왔던 퀘스트들과 칭호, 업적들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이 성공적이었다.
[창자 마을 내 평판이 크게 오릅니다!]
[이름 없는 마을 악마가 다음 문을 열어줍니다.]
-훌륭합니다, 모험가. 이제까지 온 모험가들 중 당신이 가장 훌륭한 것 같습니다.
“진짜인가?”
-예. 보통 마을 하나도 통과하지 못하고 추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악마는 바닥을 가리켰다.
꿈틀거리는 고래의 살점으로 된 바닥.
그 바닥이 갑자기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
-여기로 탈락되는 거지요. 많은 영웅들이 유산을 찾아왔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렇군. 고맙다.”
태현은 이름 없는 악마가 보여준 호의에 감사했다.
앞으로 무슨 시련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더욱더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훌륭한 인재에게는 그만큼 쉬운 길이, 그러지 못한 인재에게는 그걸 보충하기 위해 그만큼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나는 쉬운 길인가?”
-예. 모험가여, 앞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유산을 얻어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 * *
“쉽다면서!? 쉽다면서!?!?”
“…케인이 따라온 기분이군.”
김연지의 비명에 태현은 중얼거렸다. 이다비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들을 수도 있으니까 귓속말로 말하세요.”
[<고래 살점 골렘>이 나타납니다!]
꾸드득-
기분 더러운 소리와 함께 근육질 골렘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았다.
꽝!!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물리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높습니다. 대미지가 감소합니다.]
[화염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높습니다. 대미지가 감소합니다.]
[….]
붕, 붕, 붕-
살점 골렘은 공격 스킬이 까다롭거나 패턴이 복잡하진 않았다.
태현 정도 되는 사람은 그냥 스킬 쓰지 않고 눈으로만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대신 어마어마한 방어력과 체력을 갖고 있었다.
각종 속성 저항을 얼마나 떡칠을 했는지 아무리 폭딜을 집어 넣어도 꾸역꾸역 버틴다!
[<화염 적중> 스킬이 발동됩니다!]
[치명타로 인해 사디크의 화염 기운이 점점 더 누적됩니다!]
[<위대한 화염의 검술>이 사용 가능해집니다!]
-첫 번째 공격, 멸염!
태현은 치고받으며 치명타를 누적시켰다. 그러면서 기회만을 엿봤다.
누적된 치명타로 발동 가능해진 사디크의 권능 검술!
어마어마한 화염의 힘이 솟구치면서 살점 골렘을 그대로 쓸어버릴….
[고래가 광역기를 감지합니다.]
[고래가 물을 삼킵니다.]
촤아아아아아악!
피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가 그대로 가버리는 거대한 물살.
[<위대한 화염의 검술>이 취소됩니다.]
“….”
[….]
-쓸모없는 사디크 놈!!
[쓸모없는 사디크 놈!이라고 카르바노그가 외칩니다!]
두 신과 화신은 사디크를 욕했다.
태현은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을 갈아 끼웠다. 사디크 검술과 시너지를 노리려고 한 건데 이렇게 되면 화염 속성이 의미가 없었다.
혼돈의 힘으로 간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고래 살점 골렘>이 쓰러집니다!]
“오…?”
그동안 대미지를 상당히 많이 쌓아놨던 모양이었다.
검을 바꾸고 딜 넣자마자 쓰러지는 골렘!
…물론 그전까지 딜을 누적시킬 수 있었던 건 사디크 덕분이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사디크는 정말… 재수가 없나?’
“이게 쉬운 수준이라니, 어려운 수준이었으면 대체 뭐가 나오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미다스 길드원들은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이 앞에서 살점 골렘들을 다 막고 어그로 끌어줘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그대로 뚫려서 전멸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탱커 역할 할 사람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스미스 쪽 파티원들이 없는 게 아쉽군.”
“진짜로?”
“아니. 그냥 한 말이야. 탱커 없이 싸우면 싸웠지 별로 아쉽진 않아.”
“….”
뒤에서 들려오는 훈훈한 대화에 태현은 감탄했다.
[<식도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또 행운이면 좋겠는데.’
다시 나타난 마을.
태현은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을의 입구가 당신을 평가합니다.]
[대가가 정해집니다.]
[대가는 <업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