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15화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도 저주가 붙어 있으면 일단 고민해 봐야 했다.
좋다고 냉큼 잡았다가는 판온 인생이 내내 꼬이는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굶주린 혼돈 관련된 저주는 이미 악명이 높았다.
다른 저주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랄한 저주!
-굶주린 혼돈의 조각을 주웠는데요, ‘힘을 원하는가?’ 해서 ‘네!’라고 했다가 종족이 언데드로 변했어요. 이거 어떻게 되돌리나요?
-굶주린 혼돈이랑 계약 함부로 하지 마라! 나 한 번 했다가 아직도 코 꿰여서 퀘스트 중이다. 미친놈임 완전. 퀘스트 취소 버튼 눌렀는데 취소가 안 돼! 다른 직업으로 전직하려고 했는데 전직도 안 돼! 세상에 뭐 이런 게 있냐?? 난 다른 직업으로 못 바꾸게 하는 직업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어!
온갖 피해 사례들이 가득한 만큼 길드 동맹 간부들도 당연히 알고 있는 상황.
그런데 굶주린 혼돈의 저주를 받은 아이템을 들고 오다니.
“하지만 이건 보통 아이템이 아닙니다. 고대 제국 황실의 장비 아닙니까! 이제까지 이런 아이템 나온 적이 있었습니까??”
간부, 자쉬안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 모습에 다른 간부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저 재수 없는 새끼.’
‘네가 참아. 투자자 아드님이잖아.’
길드 동맹이 각종 투자를 받는 이상, 외부의 눈치도 봐야 했다.
자쉬안 같은 간부가 바로 그 예시 중 하나였다.
투자자의 아들!
회장님께서 하라면 해야 하는 것이다. 간부들은 뭐라고 하지 못하고 참았다.
“자쉬안 님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왕민이 나섰다.
왕민도 자쉬안과 마찬가지로 외부 투자자가 보낸 컨설턴트 출신 간부.
기존 판온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간부들 입장에서는 꼴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여러분들이 지금 한달에 사용하는 포션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절약을 하면….
-야 이 미친놈아 던전 도는데 포션을 아끼면 어떡해!?
-스킬을 적게 쓰시고 평타로 잡으세요.
-…너 돌았냐?
아무래도 판온 잘 모르는 외부인인다 보니 매우 열받는 헛소리를 하는 데에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싫은 놈들이 뭉치는군.’
‘쯧.’
“지금 길드 동맹의 상황은 고착 상황입니다. 휴전을 맺었지만, 화이트 나이트는 물론이고 미다스도 밀어버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길드 동맹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길드원들 모으고 레벨 업 시키고 있잖아.”
“병사들도 꾸준히 기르고 있고.”
살인적인 세금.
가혹한 규칙.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길드 동맹이 유지될 수 있는 건 그 전투력 때문이었다.
워낙 적이 많은 탓에 대부분의 여유를 다 전투력에 쏟아붓고 있는 상황!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이트 나이트도 때려잡고 미다스도 때려잡고 에랑스 왕국도 때려잡고 김태현도 때려잡고 싶었지만 현실은 사방에 적이라 눈치 보는 게 전부.
“그거 잡았다가 부작용이라도 생긴다면?”
“그러면 제가 잡겠습니다.”
자쉬안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 모습에 간부들은 반색했다.
“진짜?”
“이야. 자쉬안. 우린 널 믿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아!
쑤닝은 간부들을 질책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투자자께서 화내실까 봐요?
-이 돌대가리 같은 놈들이 진짜…! 만약 자쉬안이 강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란 말이다!
-!
간부들은 쑤닝의 말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쉬안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 간부들은 솔직히 완전히 믿기 힘든 상대였다.
같이 한 시간도 적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는 놈.
만약 자쉬안이 저 지팡이를 잡고 갑자기 강해진다면?
아니,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자쉬안이 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를 진행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쉬안이 쑤닝한테 ‘길마님께서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길마님에게 양보하겠습니다.’라고 나올까?
그보다는 ‘와, 이거 길드에서 절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길마님!’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컸다.
“진정해라. 자쉬안!”
“위험하다. 우리는 널 잃고 싶지 않아!”
“여러분…!”
자쉬안은 살짝 감동했다.
현실에서는 다 자기 돈만 노리는 사람들만 몰려왔는데, 여기 판온에서는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지팡이는 내가 보관하고 있겠다.”
쑤닝은 상자를 손에 넣었다.
“만약 이 저주를 감당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길마인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이 아니지.”
“길마님 멋지십니다!”
“후후. 그래.”
쑤닝은 상자를 가방에 넣고 생각했다.
…근데 이러면 진짜 내가 잡아야 하나??
‘아니… 아니지. 그냥 미뤄도 되겠지.’
하지만 쑤닝은 이상하게 불길해졌다.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은 쑤닝은 위험에 대한 감각이 많이 발달한 상태였다.
쑤닝의 직감은 왠지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이 지팡이를 잡게 되지 않을까?
* * *
[<고대 제국 황실의 녹슨 검>을 찾아내야 합니다!]
[<고대 제국 황실의 녹슨 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오오오오오옷! 오오오오오오옷!
“…….”
드워프 대상인, 쿠르록의 반응에 태현과 이다비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 없지?
‘이 퀘스트 좀 쪽팔린다.’
‘그러게요.’
-역시 폐하십니다!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우오옷! 이렇게 바로 갖고 오실 줄이야!!
<고대 제국 황실의 녹슨 검>.
원래라면 절대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태현은 이미 무덤 퀘스트를 통해 이 아이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한 번에 깰 수 있었던 건 편했지만….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고대 제국 황실의 녹슨 검:
내구력 ∞/∞. 공격력 ?
고대 제국의 후계자 퀘스트 진행 중인 모험가만이 착용 가능, 파괴되지 않음, 공격력은 고대 제국의 부활도에 영향을 받음.
고대 제국 황실에서 내려오던 검이다. 오랫동안 무덤에 묻혀 있어 녹이 슬고 알아볼 수 없게 변했지만 그 가치는 변하지 않으리라.
-예! 물론 제가 병장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고대 제국 황실의 아이템은 특별합니다. 폐하. 황실을 이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왕실의 아이템이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듯이, 고대 제국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태현은 살짝 반성했다.
‘바로 못 쓰는 무기라고 쓰레기 취급해서 미안하군.’
이렇게 퀘스트 열쇠가 되어줄 줄이야….
[지도의 일부분이 추가됩니다!]
-폐하. 고대 제국 황실의 다른 보물들도 혹시 갖고 계십니까?
“검 말고는 없는 것 같군.”
<고대 제국 황실의 보물-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
고대 제국 황실에는 여러 보물들이 존재했다.
그 보물들은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들.
고대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영웅 입장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륙을 뒤져 사라진 고대 제국 황실의 보물들을 찾아내라!
보상: ?, ???
‘양심이 없는 퀘스트군.’
[카르바노그가 진짜 양심 없다고 욕합니다.]
태현과 카르바노그가 욕한 이유가 있었다.
퀘스트가 저거 하나 달랑 나오고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하나 찾아오라는 퀘스트랑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고대 제국 관련 NPC가 있어서 다행인가….’
의외로 태현 주변에는 고대 제국 관련 NPC들이 제법 있긴 했다.
당장 우리에 갇혀 있는 언데드 황자, 페르소텔턴이 고대 제국 출신 아니었던가.
황족인 만큼 보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지도를 줘서 고맙고, 보물은 내 열심히 찾아보도록 하지.”
‘나중에 정말 할 거 없으면 말이야.’
-폐하.
“?”
-보물을 찾을 때 주의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고대 제국 황실의 보물은 워낙 귀한 물건인 만큼, 사악한 자들이 저주를 걸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
태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이 새끼가….’
그걸 알면서 퀘스트를 그냥 줘?
“그렇군. …잠깐. 이 녹슨 검은 저주 같은 게 없었는데?”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인 겁니다! 역시 폐하십니다. 아키서스의 가호를 받고 계신 만큼 행운이 아주 좋으시군요!
“…….”
행운이 좋으면 그냥 이딴 퀘스트를 시키지 마…!
“앞으로 보물 찾을 때 주의하도록 하지.”
태현은 쿠르록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다비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확인했다.
“아직도 애매하지?”
“네. 역시 가운데 위치를 뽑아야 뭐라도 할 수 있겠어요.”
“이다비. 근데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내가 가는 곳마다 이상하게 좌판이 많지 않아?”
랭커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싸움을 많이 한 태현이 위화감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아까부터 자꾸 가는 곳마다 종류별로 좌판 깔고 ‘쌉니다 싸요!’ 하고 광고하는 놈들이 보이는데…?
“두 분의 초상화를 그려드립니다! 추억을 남기세요!”
“혹시 두 분의 조각상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두 분의 노래를….”
이다비는 쪽팔려서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따라와서 장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아닌가?”
“네? 파워 워리어라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저희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아닌데요??”
“그래. 뭐… 알겠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고,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태현은 주머니에서 골드 꺼내서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한테 하나씩 쥐어주었다.
“이다비 퀘스트 깨는 거 응원하러 온 모양인데 다들 고맙다. 근데 도움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그때 와도 돼. 너희 할 일 하라고.”
“헉…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태현한테 용돈 받은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순간 감동했다.
이게 국왕 폐하의 넉넉한 씀씀이인가?
‘…아니 잠깐만.’
‘야. 우리 이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
원래는 김태현 선수 앞에서 이다비 길마가 돈 팍팍 쓰는 모습 보여주게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야. 잘 되고 있지? 잘 되고 있지??
상황을 모르는 간부들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괜히 돈 욕심 내서 상황 이상하게 만들면 너희는 나한테 죽는 거야. 알겠지? 돈 나중에 줄 테니까 괜한 개짓거리 하지 마라? …불안하게 왜 대답이 없냐??
-죄송합니다…!
-야!!
그런 대화를 모르는 태현은 이다비에게 말했다.
“길드원들한테 사랑받고 있네.”
“제가 시킨 거 아니거든요… 진짜에요….”
“나도 알아. 자발적으로 저렇게 해주는 게 더 대단한 거 아닌가?”
태현은 딱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길드 만드는 거에 별 관심 없는 태현에게 이다비처럼 길드 만들어서 챙기는 사람은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태현 님도 팀원들 잘 챙기고 계세요.”
“어… 그러네. 그건 생각 안 해봤어.”
태현은 이다비의 말을 듣고 놀랐다.
생각해 보니 자기도 팀 KL 선수들 나름 잘 챙기고 있긴 했던 것이다.
판온 1 때처럼, 스스로는 다른 사람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네.’
“왜 그러세요?”
“아니. 신기해서….”
“??”
“별 거 아니야. 내가 게임 하는 방식이 좀 달라졌다는 이야기.”
“…별 거 맞는 거 같은데요?? 궁금한데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이다비는 가만히 듣다가 멈칫했다.
그냥 넘길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태현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재밌게 들을 이다비였는데, 게임 이야기라면 더더욱 궁금했다.
“진짜 별 거 아닌데….”
“아뇨. 들을래요.”
“그래. 그러니까 판온 1 때 내가 보통.”
“와! 김태현 선수!”
“…….”
“…….”
스미스와 친위대 랭커들이 태현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다비가 무표정하게 빤히 쳐다보자, 랭커들은 살짝 당황했다.
평소 화 안 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
이다비가 무표정하게 쳐다보니 괜히 더 압박이 됐다.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거 같은데?’
‘잘 모르겠지만 정말 잘못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