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09화
화염으로 주변을 말 그대로 녹여 버리면서 난입한 놈이 ‘구하러 왔다’고 말하자 좀 어이가 없었다.
플레이어들 중 몇몇이 욕을 하려고 하던 그때, 제카스가 다급히 말했다.
“지금이다! 빠져나가!”
“!”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깨달았다.
방금까지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봉인되어 있던 공간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못 도망칠 수도 있다!
“튀어!”
“빠르게 달려!”
후다닥 달려나가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놈들인데?’
주변이 온통 난장판인 데다가 사방에 화염이 가득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뒷모습이 낯이 익었다.
-이 배신자 모험가 놈들! 배신자 모험가 놈들이!
[역병 함대의 주인, 폴로뮤스가 분노합니다!]
[교단 내에서 평판이…]
메시지창이 날아들었지만 플레이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평판이나 공적치 포인트는 나중에 복구하면 됐지만 사망 페널티는 복구가 힘든 것이다.
일단 살고 보자!
그 모습에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지금은 태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지만) 비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핫! 자기 부하한테까지 버림을 받는 모습이라니. 나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은 절대 부하들에게 버림을 받지 않는다!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은 부하들 위에 절대 군림한다!
“????”
태현은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게 대체 뭔 미친 상황이냐?
‘뭐야?’
[카르바노그가 상대가 당신의 모습으로 변신한 거 같다고 말합니다!]
‘…아. 그렇군.’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침착해질 수 있었다.
몬스터들 중에는 변신 스킬을 갖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좀 허접한 변신 스킬들이었지만 레벨 높은 몬스터들은 놀라운 수준의 변신 스킬을 쓸 때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태현이 없는 상황에서 태현처럼 변신하는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나로 변신한 거지?’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와봤자 소용없다. 네놈들의 두려움은 곧 내 힘이 된다. 날 두려워하라! 나는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다! 나는 사악하고, 위대하고, 군림하는 존재다! 너희의 심장을 내게 바쳐….
“미친놈이 변신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쾅!
-크아아악!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남으로 변신했으면 좀 그럴듯하게 행동할 것이지 무슨 이상한 대사를 지껄이고 있었다.
이세연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영상 찍어서 한 백번은 비웃었을 테니까!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미친놈아!”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두려움이 없을 리 없으니까!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당신의 두려움을 확인합니다!]
[두려움을 흡수하고 환상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아 미친놈아 작작 하라고!”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응축된 화염의 기운이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를 타격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만들어 낸 환상이 찢어집니다!]
[……]
[……]
달려오면서 화염의 기운을 닥치는 대로 부풀린 태현은 지금 걸어 다니는 흉기였다.
방심하고 있던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는 그대로 맞고 날아갔다.
상상치도 못한 반격!
-어… 어떻게…!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는 경악했다.
[<악몽의 영역>의 힘이 약해집니다!]
[역병 함대의 주인, 폴로뮤스를 휘감는 저주가 약해집니다!]
[……]
[……]
지금 이 주변에는 환술사가 펼쳐 놓은 영역이 깔려 있었다.
적들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두려움을 만들어낸 다음 그 힘을 흡수해 손과 발을 묶어버리는 강력한 연계기!
그런데 갑자기 난입한 저놈은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네놈을 얕보았군…! 기껏해야 사디크의 놈팡이인 줄 알았는데!
“…….”
[화염의 기운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위대한 화염의 검술에 기록된 다음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격 멸염, 두 번째 공격 창염, 세 번째 공격 맹염, 네 번째 공격 혹염!
[네 번째 공격, 혹염을 사용합니다!]
[주변에 있는 화염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사디크가 만족스러워하며 사납게 웃습니다!]
-어, 어…?
-잠, 잠깐….
폴로뮤스와 그의 부하들이 당황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구해주러 온 건 고마웠는데 상황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태현 뒤에 깃든 화염의 기운이 더욱더 커져 가더니 이제는 무슨 걸어 다니는 화염지옥 같은 꼴이 되었다.
[심층부가 파괴됩니다!]
[화염이 아이템을 삼킵니다!]
[더욱더 강해집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냐!? 네놈이 여기를 전부 불태워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멈춰라!
환술사도 당황했는지 경고를 했다. 그러나 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건물 아니었으니까!
“악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
-이런 정신 나간 놈…!
환술사는 설득이 통하지 않자 더욱 경악했다.
말을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막 나가다니.
-대체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안개 속의 진실>을 사용합니다!]
[정체를 파악합니다!]
-…아키서스 교황 놈?!
“그래. 앞으로는 변신할 상대를 잘 골라라!”
태현은 말과 함께 바짝 붙었다.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는 전사들보다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상대였다.
특이한 스킬들만 뚫고 봉인시키면 나머지는 태현이 상성적으로 유리했다.
HP도, 방어력도 낮은 데다가 지금 태현의 상태는 사디크가 강림한 수준.
불타오르는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마법 방어막이 치직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고, 환술을 사용하려고 해도 주변의 열기가 그대로 태워버렸다.
-아키서스 교황 놈이 여기는 왜! 아니, 이건 혹시 환상인가!? 그렇군. 내게는 통하지 않….
[치명타가 터집니다!]
[화염이 적을 태웁니다!]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쓰러집니다!]
[……]
[……]
[……]
태현은 헛소리를 내뱉는 환술사의 숨통을 끊었다.
여기 있던 이들을 압도하던 적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
-…….
‘아차.’
태현은 자신을 쳐다보는 폴로뮤스의 시선을 느꼈다.
저번에 역병 함대에 잠입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 선장은 보통이 아니었다.
‘환술사를 쓰러뜨리기 전에 죽였어야 했나?’
환술사가 사기적인 스킬로 발을 묶고 있었지만, 이제 환술사가 죽은 이상 자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이다.
태현은 신중하게 검을 쥐었다.
일촉즉발.
태현은 상대가 어떤 스킬을 쓰든 반응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몸을 긴장시켰다.
‘올 테면 와라.’
상대가 강하다지만 지금 태현의 상태도 절대 약하지 않았다.
사디크의 힘이란 힘은 닥치는 대로 다 끌어모은 상태!
-…감사를 표하겠다. 아키서스의 교황.
[역병 함대의 선장, 폴로뮤스가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이데르고 교단 내에서 평판이 크게 오릅니다.]
[이데르고 교단 내에서 공적치 포인트가…]
“!?”
생각보다 상대의 반응이 온순하자 태현은 당황했다.
감사 인사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원래 상대가 목숨을 구해주면 감사를 하는 게 예의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악신 교단 놈들이 그런 예의를 지키는 놈들이 아니잖아.’
-이제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해야겠지.
“그렇군. 너희 교단 후계자인 페르스메스도 잘 지낸다.”
-…….
-…….
[카르바노그가 지금 왜 불에 기름을 붓냐고 어이없어합니다!]
‘아니. 좋은 말 아닌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다행히 폴로뮤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쪽이 불리한 상황인 만큼 폴로뮤스는 참았다.
-그거 다행이군. 페르스메스 님의 안전을 잘 지켜주다니… 까드득.
-감사합니다… 까득까득.
역병 함대의 정예들이 이빨 가는 소리를 내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아키서스의 교황씩이나 되시는 분이 여기는 대체 무슨 일로?
“어….”
태현은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사실 지금 밖에 악마 놈들도 있어서 너희하고 싸움 붙이려고 왔는데 굶주린 혼돈 보고서 일단 끼어들었어’라고 말했다가는 아무리 감사 인사를 하는 폴로뮤스라도 뒷목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돌려서 말해야 했다.
“굶주린 혼돈 앞에서는, 선한 신이든 악한 신이든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도우려고 한 거다.”
-…!!
-!!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폴로뮤스의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역병 함대의 선장, 폴로뮤스가 당신의 말에 크게 감명을 받습니다.]
-…이거… 부끄럽군! 아키서스의 교황에게 이런 가르침을 받게 되다니… 참으로 맞는 말이오.
폴로뮤스의 태도는 살짝 공손해졌다. 그만큼 태현의 말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굶주린 혼돈이란 적 앞에서는 힘을 합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하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폴로뮤스가 은혜에 대한 보답을 약속합니다!]
[화염의 기운이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습니다. 은신처가 완전히 무너져내립니다!]
“…….”
-…뛰어라!!!!
* * *
태현과 폴로뮤스 일행은 간신히 은신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데르고의 보물이 그대로 박살이 났지만 폴로뮤스는 탓하지 않았다.
-폴로뮤스 님. 은신처가…!
-그만둬라. 굶주린 혼돈과 싸우기 위해서 적을 돕는 교황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너무 그릇이 작게 보이지 않겠느냐!
‘오.’
태현은 그 말을 듣고 솔깃해했다.
정말 아무 탓도 안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날뛸 거 그랬나?’
-그런데 교황은 사디크의 힘을 어떻게 쓰고 있는 거요?
“아… 사디크가 좋은 일에 쓰라고 힘을 빌려주던데.”
-사디크 교단이 완전히 빌붙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사디크 성기사들이 들으면 억울해서 눈물을 흘릴 소리였지만, 사실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비슷하긴 했으니까…!
“…김태현. 너가 대기하라고 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뒤에는 아키서스 교단 NPC냐? 아키서스 교단 NPC라고 해줘. 제발.”
은신처 앞에 대기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당황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은신처가 불타고 부서진 것까진 그렇다 쳐도 빠져나온 태현 뒤에 좀 낯선 일행이 있는 것이다.
“이데르고 교단이다!!”
“여기 산맥은 진짜 미쳤나! 뭔 놈의 적들이 이렇게 많아!!”
플레이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을 준비했다.
지금 앞에 악마들보다 뒤에 이데르고 교단부터 먼저 잡아야…!
-그만둬라!
폴로뮤스는 손을 뻗으며 강하게 말했다.
-나는 아키서스 교황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무시하고 배신할 정도로 못난 자가 아니다.
“그걸 어떻게 믿….”
“쉿. 조용히 해. 듣자고 좀.”
-이번 일에 있어서는 너희들을 도와주겠다!
“…….”
“…구라 아냐?”
랭커들은 일단 의심부터 했다.
보통 악신 교단이 플레이어들 도와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아니. 도와주는 거 맞다.”
“정말? 어떻게 한 거야? 목에 칼 겨누고 협박한 건가?”
다들 태현이 무슨 수를 써서 데리고 온 건지 매우 궁금해했다.
저게 가능한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폴로뮤스는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겉모습만 보면 비쩍 마른 볼품없는 늙은이의 모습이었지만, 태현은 폴로뮤스의 레벨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역병의 함대여! 지금 내가 부르노니 이 자리에 오거라!
[역병 함대의 선장, 폴로뮤스가 함선들을 소환합니다!]
“???”
“산 위인데…?”
플레이어들은 당황했지만, 곧 어디서 배가 나오는지 알게 되었다.
허공에서 역병 함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