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08화
“습격 받아서 불 난 거 아닌가?”
“그런가? 하긴….”
플레이어들은 알아서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습격이나 공격을 받으면 불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습격하면서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몰려온 모양이군.”
“그렇습니까?”
“그래. 원래 이렇게 주변까지 불이 번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몇몇 랭커들은 아는 척을 했다.
던전을 질릴 만큼 많이 돌았기에 바로 보는 순간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전투사제 랭커, 주디스도 동의했다.
“이 정도 불꽃이면 거의 전면전 수준…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아마 괴수들도 끌고 왔겠어.”
“괴수까지!?”
다른 랭커들은 주디스를 노려봤다.
지금 한창 폼을 잡고 있는데 잘난 척을 할 기회를 뺏다니.
“내 생각에는 아마 파이어 드레이크를 길들여서 데리고 온 거 같군.”
“오오!”
“하. 이래서 전사들은… 그렇게밖에 추측을 못하나? 파이어 드레이크가 왔으면 주변에 발자국부터 시작해서 나무들이 다 뒤집어져 있어야지. 내 생각에는 에랑스 왕국 마탑의 화염 쪽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 게 분명해.”
“뭔 개소리야? 그게 어떻게 된다고?”
“넌 모르겠지만 요즘에 에랑스 왕국 마탑 마법사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굶주린 혼돈이 데리고 갔겠지.”
랭커들의 치열한 잘난척 싸움에 플레이어들은 감탄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원래 레벨 높은 사람은 밥먹다가 한숨만 쉬어도 ‘와 뭔가 대단한 고민을 하나 보다’ 같은 착각을 받기 쉬운 것!
옆에서 보고 있던 이다비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여러분. 지금 악마 유인하고 있거든요. 개소리 그만하시고 빨리 움직이기나 하세요.”
“앗. 네.”
“죄송합니다….”
파워 워리어 길마의 따끔한 일침에 랭커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지금 뒤에서 악마들이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야! 악마 놈들아! 어디 한번 덤벼봐라!
-!
-악마 놈들은 겁이 많아서 여기 전사들 뒤에 숨어만 있대요!
-감히…!
-악마 놈들은 아키서스 교단한테 당하기만 하고 대체 악마 맞냐? 대륙에 와서 한 게 있기나 해?
-너 이 아키서스 교단 새끼! 너 딱 봐놨어! 넌 내가 무조건 잡아서 죽여 버리겠어!
-?!?!
-야, 넌 대체 뭔 이야기를 했길래 악마가 저러냐??
-아, 아니. 그냥 평범한 도발이었는데… 아키서스 교단 가입했다고 이러나?
-그거 때문에 저런다고? 나도 데메르 교단 가입했는데 저러진 않던데.
플레이어들은 태현이 말한 대로 악마들을 끌어내서 이데르고 교단이 있는 쪽으로 데리고 왔다.
이제 곧 악마들이 이쪽에 나타날 시간.
“준비!”
“이쪽에 축복 좀 더 걸어주세요!”
“마법진 밖으로 나가지 마! 악마들 상대로 위험하다!”
“성수 다 썼나? 이쪽에도 좀 던져줘!”
플레이어들이 준비를 마치는 사이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아키서스 교단 놈부터 죽여 버려라, 얼음 전사들이여! 감히 아키서스 교단 놈이!!
“…….”
아니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다 같이 도발했는데 혼자 유난히 노려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키서스 교단에 가입한 플레이어는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온다! 준비!”
-쳐라!
[이데르고의 은신처가 폭발합니다!]
* * *
[화염의 기운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열기가 통로의 벽을 녹여 버립니다!]
“적 발견!”
“김, 김태현. 온도 좀 내리면 안 되냐??”
“더우면 갑옷을 벗으면 되지 않나?”
“그게 뭔 미친 개소리….”
꽝!
태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화염을 폭발시켰다.
이데르고 교단의 은신처 안에 화염의 기운이 퍼질수록 더욱더 힘이 강해지는 선순환!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쓰러집니다!]
어쨌든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다.
태현은 아까의 전투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적을 제압한 것이다.
랭커들도 감탄할 정도의 속도!
“괜찮나! 구해주러 왔다!”
-고… 고마운데 주, 주변의 불을 좀 꺼야 하지 않나??
“계속 움직이자! 다른 이데르고 교단의 인물들은 어디 있나!”
-아, 아니. 불 끄라고! 불 꺼!!
이데르고 교단의 NPC들을 구해줄 때마다 그들은 태현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동시에 ‘불 좀 꺼!’라고 외쳤다.
그야 오면서 주변 통로를 다 불태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는 불태우는 수준도 아니었다.
열기로 그냥 녹여 버리는 수준!
태현도 느끼고는 있었다.
‘음. 확실히 위험하군.’
계속 이렇게 화염의 기운을 늘리다가는 이데르고 교단은 둘째 치고 같이 온 랭커 파티들이 녹아내리는 경우가 생겼다.
“야. 너희들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 도와주는 게 낫겠다.”
“그래!”
“고마워!”
“역시 김태현이야!!”
“…….”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가라고 해도 랭커라면 ‘뭔 개소리냐!’, ‘우리를 뭘로 보고?’, ‘지금 우리가 이런 위험도 극복 못 할 거 같냐?’라는 반응이 나와야 했다.
근데 이놈들은 ‘와! 고마워!’이러고 있었으니….
‘이런 한심한 케인 같은 놈들.’
“왜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빨리 나가라고.”
랭커들을 내보낸 태현은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길 안내해라. 이데르고 교단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다고?”
-…그,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
이데르고 교단 사제들은 처음으로 사디크 교단에 위압감을 느꼈다.
이놈들이 이렇게 강한 놈들이었나??
* * *
이데르고 교단에도 여러 네임드 NPC들이 있었다.
지금은 아키서스 교단에 갇혀 있긴 하지만 교단의 대주교 자리를 이을 후계자, 천재 페르스메스가 있었고….
옛 대함대를 이끄는 선장 출신으로 지금은 역병 함대를 이끄는 폴로뮤스도 있었다.
폴로뮤스는 태현도 ‘와 저 NPC 놈은 진짜 위험하군’ 하면서 상대를 피했던 네임드 NPC!
그런 폴로뮤스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마법을 시전합니다!]
-크윽…!
-선장님을 지켜라!
역병 선원들이 달려들었지만,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바다 위에서 있을 것이지, 땅 위로 올라오다니. 어리석은 놈!
-닥쳐라! 휘몰아치는 역병의 파도!
콰르르르릉!
은신처 심층부에서는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폴로뮤스와 그를 호위하는 부하들.
그리고 그 안으로 침입한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
-모험가 놈들아!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라!
‘아. 젠장.’
그리고 여기에는 몇 명이 더 있었다.
도동수와 제카스를 필두로 한 이데르고 교단 소속 플레이어들!
보통 악신 교단에 가입하는 플레이어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김태현한테 잘못 걸리는 바람에 이제 개나 소나 다 노리는 처지가 되었거나, 길드 동맹의 뒤통수를 친 바람에 척살령이 내려졌거나, 남 PK 잘못 하다가 현상금이 너무 높게 붙었거나, 아니면 그냥 악신 교단에 가입해서 남들보다 편하고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싶었거나….
그런 플레이어들 덕분에 이데르고 교단에도 꾸준히 가입자들이 나타났지만, 당연히 오래 버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악신 교단은 대우가 좋지 않은 것이다.
불합리한 퀘스트, 불합리한 보상, 위험천만한 난이도!
헛된 희망을 품고 들어온 플레이어들도 이런 걸 겪다 보면 빠르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여기 남아 있는 플레이어들은 정말 독한 플레이어들밖에 없었다.
이데르고 교단에 쏟아부은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그냥 갈 수는 없다!
-도동수 님.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그냥 손절하고 나가야 하는 거 같은데….
그런 플레이어들도 지금 상황은 좀 예상 밖이었다.
역병 선장을 도와서 하라는 심부름만 깨면 공적치 포인트를 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굶주린 혼돈이 은신처로 쳐들어오더니 심층부까지 들어오는 것 아닌가.
무슨 수를 썼는지 심층부 밖에 있는 성기사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못 나간다.
-예?
-내가 나가보려고 했는데 안 나가진다고.
‘아니 이 양반이.’
‘지 혼자 튀려고 했단 말이야?’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도동수를 쳐다보았다.
김태현을 포함해서 인성 안 좋다고 욕하는 이유가 있었군!
-뭘 그렇게 쳐다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흠흠.
-어쨌든 지금 이대로 있으면 우리까지 같이 죽는 거 아닌가? 차라리 숨을 곳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넓은 돔 형태의 심층부는 안락하게 쉬기는 좋았지만 적이 나타났을 때 숨을 만한 곳은 마땅치 않았다.
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던가 해야 하는데 지금 주변 자체가 아예 봉쇄된 상태고….
-네놈의 두려움을 읽었다. 내 환상을 두려워해라!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가 악몽 강림을 시전합니다!]
“!”
“조심해라!”
상대가 또 스킬을 사용하자 모두 극도로 긴장했다.
방금까지 사기 스킬들로 주변을 압도하고 있던 환술사.
이번에는 또 무슨 사기 스킬을 사용할까??
“…???”
“뭐야???”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저기에….
김태현이 있었던 것이다!
“뭐야 XX?!”
“저 새끼 왜 저기 있어!?”
꼭 도동수뿐만이 아니더라도 판온 1에서 태현한테 맞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반응은 격렬했다.
그 반응을 굶주린 혼돈의 환술사는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내 환상을 두려워해라! 하하하하!
“아니….”
“뭔….”
“미친…?”
플레이어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폴로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역병 함대의 선장이 김태현을 두려워해서 저 모습을 소환한 거란 말인가?
폴로뮤스는 불쾌하다는 듯이 외쳤다.
-감히 이 폴로뮤스를 얕보다니!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라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
-과연 그럴까? 아키서스의 저주!
-크악!
-아키서스의 검술, 아키서스의 벼락, 아키서스의 화염 회오리!
-크아아아악!
놀랍게도 그 환상은 태현이 쓰던 스킬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아니. 이상한데? 김태현은 저런 거 못 쓰지 않았나??’
보던 도동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김태현을 싫어하는 만큼 김태현이 쓰던 스킬들은 다 확인해서 대비하고 있는 도동수였다.
근데 아무리 봐도 김태현이 쓰는 스킬보다 뭔가 좀 더 강해 보였다.
“환술사 놈이 쓴 스킬 때문이다.”
“그게 뭔 소리냐?”
“아마 저기 선장 놈이 갖고 있는 두려움 속에서 뽑아낸 환상이겠지! 실제 스킬이 아니라! 김태현 놈도 아닌데 똑같은 스킬을 어떻게 쓰겠나!”
“그러면 저 환상은 별로 안 위험한…?”
“아니. 말이 환상이지 데미지는 그대로 들어오고 있다!”
탐험가 랭커인 만큼 제카스는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폴로뮤스가 냉정하게 두려움을 떨치고 정신을 차려야 환술의 위력이 줄어드는데, 폴로뮤스는 누가 봐도 당한 게 분명했다.
저놈이 두려워하는 만큼 더욱더 환상도 강해지고 있다!
-크하하하! 크하하하! 아키서스 님의 힘이 차오른다!! 아키서스 님! 제게 힘을! 아키서스의 이름으로 네놈의 심장을 뽑아 마시고 역병을 태워버리겠다!
-아… 안 돼…! 안 돼!!
폴로뮤스는 강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점점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모인 플레이어들은 질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몽이군….”
“여기서도 김태현 놈 얼굴을 봐야 해?”
실제보다 몇 배는 더 강해 보이는 김태현이 날뛰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불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을 먹고 환상이 더욱더 강해집…]
“겁 먹지 말라고 했잖아! 뭐하는 거냐!”
“안… 안 먹었다고! 진짜 안 먹었….”
꽈르르르릉!
그 순간 주변이 녹아내리고 화염이 안으로 휩쓸듯이 들어왔다.
거대한 화염 파도에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직격당했다.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구하러 왔다, 이데르고 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