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06화
설득이 대충 끝나고 뽑아먹을 것까지 다 뽑아먹자, 태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데르고 교단 놈들은 자네들을 여기에 두고 어디 숨어 있지?”
-안쪽에 은둔해 계십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사악한 놈들! 내가 뭐라고 했나. 자네들 속고 있다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태현의 말은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데르고 교단이 애초에 사디크 교단의 잔당들을 속이고 있었으니까.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진실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키서스 교단도 사디크 교단을 속이고 갈취해먹고 있긴 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들 들어라! 사디크 님의 이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디크 님의 이름을 모욕한 자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데르고 놈들이 우리를 속였으니, 우리는 사디크 님의 불로 보복할 뿐!”
‘저놈 원래 사디크 교단 소속이었냐?’
‘누가 보면 사디크 교단 교황인 줄….’
플레이어들이 황당해하는 사이, 태현은 설득을 끝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사디크 교단 성기사단장…]
[사디크 교단 성기사들이 각성합니다!]
“이데르고를 불태우자!”
-이데르고를 불태우자! 이데르고를 불태우자!
-역병을 불로 정화하자! 역병을 불로 정화하자!
‘적당히 다 됐나?’
태현은 이데르고 교단에게 최대한 어그로를 끈 다음 후퇴할 생각이었다.
악마와 싸움을 붙이려면 지금 숨어 있는 이데르고 교단을 끌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끈기 있고 참을성 강한 놈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좀 강한 자극이 필요한 법.
소굴에 사디크의 화염 같은 걸 지르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되리라.
‘이럴 때는 사디크의 권능도 쓸 만한 법이지.’
“자! 소굴로 안내해라. 불을 지르러 가자!”
-예!
[<역병의 동굴>에서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들이 도망쳐 나오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습격이다!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침입했다!!
-사디크 성기사들이여! 주의해라! 굶주린 혼돈의 공격이 온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적들을… 잠깐. 숫자가 늘지 않았나?
다급히 외치던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사디크 교단 성기사들이 좀 숫자가 늘고 강해 보였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분명 좀 주눅 들고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구슬픈 분위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디크 성기사 중 한 명이 태현에게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명령만 내리면 불을 지를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태현도 예상 밖이었다.
-굶주린 혼돈이 침임했다는데?
-어떻게 하지? 일단 빠질까? 둘이 싸우면 좋은 거잖아.
-아니. 악마 놈들도 처리해야 해. 음….
태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기다리고 있는 플레이어들한테 연락해서 악마들 유인하라고 전해! 이쪽으로 끌고 오라고 해.
-우리는?
-이데르고 교단이 전멸할 수도 있으니 일단 도와준다!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한테 전멸하면 복잡해져!
-…….
플레이어들은 경악한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미친 계획이냐?
‘괜찮은 거 맞아??’
‘너무 큰 그림 같은데…?’
물론 이데르고 교단이 굶주린 혼돈한테 전멸당하면 너무 위험해지긴 했다.
굶주린 혼돈은 다른 교단의 NPC들의 영혼을 빼앗고 자신의 하수인으로 부릴 수 있는 존재.
한바탕 싸우고 나면 막대하게 강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죽이려고 하던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돕는 건 좀 너무 막 나가는 해결방법 아닌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맞긴 한데….
-숫자가 늘어난 거 같은데?
“사디크 성기사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모이고 있다. 사디크 성기사들을 무시하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최고급 화술 스킬…]
[위압감으로…]
“자. 안내해라!”
-알, 알겠다.
이데르고 성기사들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안으로 안내했다.
지금은 굶주린 혼돈이 쳐들어온 비상 상황이었으니까!
* * *
[<역병의 동굴>에 입장합니다!]
[역병의 힘으로 인해 전체 스탯이…]
[사디크의 화염이 역병의 힘을 불태웁니다!]
[……]
[……]
“아니…?!”
입장한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급히 만든 은신처라고 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동굴에서 버티고 있는 정도를 예상했는데….
‘미로잖아? 게다가 통로도 그냥 동굴이 아니라 무슨 신전 통로 같고?’
마치 오랫동안 공사를 한 것 같은 던전이었다.
하지만 이런 산맥에 그런 식으로 공을 들일 리는 없는 법.
이건 이데르고 교단의 권능으로 만든 던전이 분명했다.
‘부럽군.’
-크윽. 부럽다!
“…….”
태현은 순간 사디크 성기사가 한 말을 옆에서 듣고 소름이 돋았다.
지금 사디크 성기사와 똑같은 생각을 한 건가?
‘아니…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디크 성기사와 비슷한 생각을 할 줄이야.’
태현은 오랜만에 자괴감을 느꼈다.
-하지만 성기사단장님. 저희에게는 이런 은신처를 만드는 권능은 없더라도 다른 게 있지 않습니까?
사디크 성기사 중 한 명이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은 그 말에 솔깃해했다.
‘뭐지? 사디크 교단의 숨겨진 권능 스킬이 있나?’
화염 천사 소환, 화염 거인 소환, 영지에 축복을 주는 화염, 돈이 나오는 화염 등등 태현은 그 짧은 사이에 여러 가지를 기대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신처를 만들 수는 없어도 태울 수는 있습니다!
“…그래…”
태현은 시무룩해졌다.
‘사디크 교단은 너무 쓸모없는 것 같군.’
-적이다!
앞에서 걷던 이데르고 교단 성기사들이 고함을 터뜨렸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크흐흐… 너희, 연약한 신을 믿는 하찮은 자들아. 진정한 위대함은 굶주린 혼돈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
태현은 긴장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를 몇 번이고 상대해 본 입장에서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아직 상대해 본 적 없는 랭커 몇몇은 별로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들 조심해라. 저놈은 상태 이상 스킬을 걸어대니까.”
“?”
“???”
랭커들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잖아?
-저놈을 조심해라. 칼을 휘두르니까.
-저놈을 조심해라. 마법을 쓰니까.
“아니. 좀 강하게 상태 이상을 건다고.”
태현도 랭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보통이라면 방어를 하거나 견딜 수 있었지만, 굶주린 혼돈은 방어 무시하고 바로 걸어버린다는 점에서 까다로웠다.
각종 신들을 위협하는 적다운 능력.
“지금 우리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닌가? 비켜봐. 내가 나선다.”
따로 행동하려다가 개처럼 두들겨 맞고 강제로 파티에 가입한 랭커, 센트맨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 들어왔어도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상대할 만한 것 같자 센트맨의 호승심에 불이 붙었다.
옆에 있던 랭커들은 수군거렸다.
“저놈 아까 추하게 도망치던 놈이 뭘 저렇게 폼을 잡냐?”
“원래 낯가죽이 두꺼워야 약탈자를 할 수 있는 거야.”
“김태현이 아무 생각 없이 저런 소리를 할 놈이 아닌데. 뭘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지?”
랭커들은 둘로 나뉘었다.
태현의 말이 황당하고 좀 이상하게 들리더라도, 김태현의 능력을 믿고 ‘김태현이니까 뭐 생각이 있겠지’ 하고 받아들이는 쪽.
그리고 ‘김태현이 우리를 무슨 케인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조심하라고 한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경험치 먹으려고 저러나?’ 하고 의심하는 쪽.
센트맨은 후자였다.
“간다! 나한테 버프나 걸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역병, 지독한 악취, 산성 숨결의 가호!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역병>이 시전됩니다! 스킬 저항이 증가…]
[장비의 내구도가 감소합니다!]
[<지독한 악취>가…]
[몸에서 악취가 뿜어져 나옵니다. 스킬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화술 스킬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NPC들이 당신을…]
[……]
이데르고 교단의 가호는 악신 교단답게 매우 짜증 나는 구석들이 있었다.
센트맨이 욕하기도 전에 다음 가호들이 날아왔다.
-불타는 사디크의 검! 끓어오르는 화염의 갑옷!
[<불타는 사디크의 검>이 내구도를 크게 감소…]
[<끓어오르는 화염의 갑옷>이 내구도를 크게 감소…]
“아오!!”
센트맨은 욕설과 함께 굶주린 혼돈의 전사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짜증 나긴 했지만 일단 싸워야 했으니까.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힘의 강림>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무적이 됩니다.]
“?????”
제대로 공격이 들어갔다는 손맛 대신, 허공을 가르는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센트맨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사기적인…?’
“정신 차려! 멍청한 놈아! 뭐하는 거냐!”
뒤에서 태현이 당황해서 외쳤다.
상대가 사기 스킬 써도 정신줄은 붙잡고 있어야지,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힘의 강림>이 끝납니다.]
흐릿한 무적 상태에서 돌아온 굶주린 혼돈의 전사.
전사는 사납게 웃으면서 반격했다.
쾅!
[치명타가 터집니다!]
[HP의 50%를 넘는 데미지를 일시적으로 받습니다! 출혈 상태에…]
[스턴 상태에…]
[시야가 뒤흔들립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당신의 몸을 지배합니다!]
-크흐흐… 내가 말했겠지! 연약한 너희들이 저항할 수는 없다고!
“이, 이거 뭐냐!? 이거 뭐냐고! 풀어!”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센트맨을 지배했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돌아서서 전사 앞에 서게 된 센트맨!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그 모습을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어떡하지?”
“뭘 어떡해. 자업자득이지. 애초에 문제 생기면 버리려고 데리고 온 놈이잖아.”
“김태현이 경고했는데 관심 좀 받으려고 자기 먼저 돌격한 거 아닙니까? 자기가 책임져야죠.”
“야. 센트맨. 5초 준다. 5초 안에 풀고 나와라.”
랭커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었다.
같은 파티였어도 같은 반응을 보여줬을 텐데, 하물며 센트맨처럼 강제로 끌고 들어온 랭커라면 더더욱.
센트맨도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를 갈며 외쳤다.
“개자식들아!! 두고 보자!”
할 수 있는 건 이런 협박뿐.
그러나 그런 협박도 랭커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네가 뭘 두고 봐? 네가 김태현이냐? 네가 길드 동맹 소속 랭커인 우리를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미친놈인가 봅니다.”
“야. 센트맨. 우리가 너한테 관심 안 가져준 건 네가 그만한 가치가 없어서지, 네가 무서워가 아니야. 앞으로도 플레이어들한테 시비 걸고 다니고 싶으면 고개 숙이고 눈치 보면서 살라고.”
‘와. 저놈 우는 거 아닌가?’
랭커들의 폭언에 태현은 감탄했다.
같은 랭커들인 만큼 아주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 하는 재주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도 당황해서 물어볼 정도였다.
-너, 너희 동료를 구하지 않을 셈이냐?
“동료는 무슨 동료.”
“야. 빨리 죽여라. 어차피 공격할 거야.”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
쾅!!!
[치명타가 터집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강한 충격을 받고 뒤로 날아갔다.
-사디크 영겁의 화염, 위대한 화염의 검술, 첫 번째 공격 멸염! 두 번째 공격 창염!
쾅, 쾅, 쾅, 쾅!
[사디크 영겁의 화염을 시전합니다! 검술 스킬의 데미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위대한 화염의 검술을 사용합니다. 모든 공격 속도가 증가하고 데미지가…]
[첫 번째 공격 멸염을 시전합니다! 사디크의 힘이 담긴 권능 검술입니다! 화염의 데미지가 폭주합니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태현의 공격은 말 그대로 굶주린 혼돈의 전사를 녹여 버렸다.
태현 본인도 놀라버린 막대한 폭딜!
아키서스의 행운과 치명타로 이어지는 폭딜도 무시무시했지만, 사디크의 화염이 누적될 때마다 늘어나는 깡딜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사디크가….
이렇게 강했나??
[사디크를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사디크 권능의 힘이 강해집니다!]
“???”
어라?
아직까지 인정한 적이 없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