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04화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
얼음 전사들의 기세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전사 계열 보스 몬스터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
“파고든다! 막아!”
아까와는 달리, 탱커 랭커들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다른 파티원들 몇 명이 하늘을 날아간 걸 직접 본 것이다.
‘힘 스탯이 대체 몇인 거지?’
‘평타에 냉기 옵션 붙어 있다고 했지? 지금 스킬 막을 수 있나? 방패에 스킬이 4개 걸려 있으니까….’
-죽어라, 하찮은 놈들아!
얼음 전사들은 포효하며 밀어붙였다. 탱커들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공격 개시!!”
-일리코의 화염! 화염의 비! 연속 화염 발생!
-사디크의 화염 화살, 사디크의 화염 창!
[치명타가 터집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냉기를 녹입니다!]
[……]
[카르바노그가 이런 스킬을 쓰는 건 오해를 더 키우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 안 쓸 수가 없잖아.’
지금 반응을 보면 얼음 전사들에게 유효한 데미지를 주는 건 화염 속성 공격이었다.
태현이 파고들어서 데미지를 미친 듯이 증폭시킨 치명타를 꽂아 넣어도 얼음 전사들은 버텨내는 것이다.
[방어력이 매우 높습니다!]
[물리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데미지를 흡수합니다!]
[……]
[……]
가끔 이런 몬스터들이 있었다.
한 속성에 취약한 대신 다른 속성의 공격들에는 강력한 내성을 가진 놈들!
덕분에 태현은 오랜만에 성기사를 때리는 감각을 맛봐야 했다.
다행히 태현이 쓰는 주무기 중 하나인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이 화염 옵션이 붙어 있어서 망정이었다.
-화염의 폭발!
[화염의 폭발이 일어납니다!]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이 화염의 힘을 모아 폭발시킵니다!]
화르륵!
화염의 파도가 터져 나오면서 얼음 전사들을 후려갈겼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냉기를 녹입니다!]
“김태현!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 후퇴하게 해줘!”
“움직이기가 힘들다 지금!”
“!”
태현은 뒤늦게 탱커들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격에 맞았습니다!]
[얼음 전사의 냉기가 당신을 휘감습니다!]
[몸이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장비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얼게 만드는 살벌한 디버프.
태현은 공격을 피하고 주변에서 덮치는 냉기는 행운으로 버텨내고 있었기에 상관없었지만, 탱커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뒤로 빠져! 다음 파티 앞으로!”
“느… 느려져서 안 움직여! 살려줘!”
“비켜!”
태현은 달려서 탱커를 한 명씩 붙잡고 뒤로 날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티들은 황급히 비켰다.
“회복부터 해! 죽기 직전이다!”
“김태현! 여기도!”
“아 뭐 이런… <아키서스의 축복>! <아키서스의 신성 영역>!”
태현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아키서스의 권능 중 가장 강력한 버프 둘!
이 버프 둘이 들어가자 숨넘어가기 직전이던 탱커들은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회피에 성공…]
하지만 이건 급한 불을 끈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되진 않았다.
태현은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사디크의 화염 룬! 사디크 치유의 화염! 사디크의 화염 부여!
[사디크의 힘이 담긴 화염 룬이 새겨집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옵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장비에 부여됩니다! 장비의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합니다!]
[사디크의 힘이 담긴 치유의 화염이 소환됩니다! 닿는 자들을 치유합니다!]
‘사디크의 권능들 이렇게 많이 쓴 건 또 처음 같군!’
원래 지금 쓴 권능 스킬들은 태현이 잘 쓰지 않는 권능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쓰는 <사디크의 화염 룬>도 정해진 곳에 설치하는 함정 계열 권능이라 잘 쓸 일이 없었다.
<사디크의 화염 부여>는 장비에 사디크 화염 하나 부여하는 것치고는 페널티가 좀 컸다.
장비의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다른 방식으로 화염 속성 공격을 넣어도 됐다. 사디크 화염 없다고 태현의 딜량이 줄어들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디크 치유의 화염>은 치유 속성이 붙은 화염을 소환하는 특이한 권능이었다.
이걸 쓸 거면 그냥 치유 마법을 쓰거나 포션을 쓰지 굳이 권능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화염에 미친 놈이 아니면 더더욱.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이 권능들이 매우 유효했다.
[사디크 치유의 화염이 냉기를 녹이기 시작합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퍼져 나갑니다! 냉기의 힘이 약해집니다!]
[사디크의 화염이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뒤에 뭐 하고 있냐! 너희 노냐!? 내가 가서 뭐 하는지 직접 봐야 하냐??”
태현은 뒤쪽에 있는 마법사들한테 성질을 냈다.
지금 각종 권능 스킬들 써가면서 간신히 진화시키고 있는데, 뒤에서는 별 도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케인 같은 자식들!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최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짜야! 김태현! 화염 마법이 잘 안 먹힌다고! 있는 거 다 쏟아붓고 있는데도 이 자식들이 계속 버텨!”
“…?!”
태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여기 있는 마법사 랭커들이 실력이 없거나 고의로 놀 놈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계속 화염 마법들이 날아들고 있었고.
‘사디크의 화염이라서 먹힌 거였나?!’
생각해 보니 여긴 악마들 구역이었고, 악마들 상대로 신성 속성이 잘 먹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얼음 전사들도 사디크의 이름을 꺼내면서 싫어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멍청했군.’
-사디크 놈들을 이 산맥에서 몰아내리라!
얼음 전사들은 사납게 외치며 냉기가 흐르는 곡도를 휘둘렀다.
칼날을 타고 냉기가 폭발하며 바닥을 휩쓸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이미 이 주변에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형 유지! 진형 유지!”
“놈들의 공격력이 약해졌다!”
계속 화염이 누적되어서 들어가자 얼음 전사들도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들어가지도 않던 데미지가 점점 늘어나고, 다른 공격도 하나씩 들어갔다.
쿵!
결국에 얼음 전사 한 명이 쓰러졌다.
[얼음 전사가 쓰러집니다!]
[명성이…]
“와아아아아아!”
파티원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고생이었던 것이다.
한 명이 사라지면 다른 적들은 더 쓰러뜨리기 쉬운 법.
모인 플레이어들은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어서 남은 얼음 전사들을 끝장냈다.
* * *
“뭔 다섯 놈 잡는데 피해가 이렇게 커?”
“장비 내구도 주문서 있는 사람?”
“대장장이 없냐?”
“대장장이가 여기를 왜 와?”
“나한테 줘봐라. 내가 수리해 줄 테니까.”
“…….”
얼음 전사와의 전투가 끝나고, 파티는 휴식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 컸던 것이다.
랭커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태현. 네가 뭘 걱정한 건지 알겠다. 이런 난이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난이도인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걱정을 한 거겠지.”
‘나도 몰랐는데.’
태현은 살짝 당황했다.
다른 랭커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김태현 이 자식 정말 퀘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믿음직스러운데?
-하긴 다른 놈들이 다 헤맬 때 혼자 산맥 찾아온 거 보니, 뭔가 정보를 제대로 갖고 있는 모양이야.
원래라면 이렇게 피해가 나오면 파티들끼리 서로 불만이 나오고 흔들려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파티를 끌고 온 랭커들은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뢰가 갔던 것이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 퀘스트를 깰 자신도 있는 게 분명하다!
“좋아. 김태현. 다음에는 뭘 하면 되지?”
“계속 안으로 들어가면 되나?”
묘하게 살갑게 구는 랭커들의 모습에, 태현은 매우 적응이 되지 않았다.
* * *
태현은 그 뒤로도 몇 번 사냥을 시도해 봤다.
얼음 전사에 대해 더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얼음 전사가 보스 몬스터 비슷한 거였고, 아까 상대한 게 전부였으면 퀘스트가 훨씬 쉬워질 것 아닌가.
그런데….
[얼음 전사가 나타납니다!]
[얼음 전사가 나타납니다!]
아니었다.
악마들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음 전사들은 평범하게 계속 나오는 몬스터였던 것이다.
파티원들은 경악에 빠졌다.
어떻게든 공략하는 방법은 배우긴 했지만 얼음 전사는 여전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실수 한번 하면 그대로 로그아웃!
“헉, 헉헉, 헉헉….”
“일단 후퇴하자! 김태현. 피해가 너무 크다!”
“장비부터 시작해서 보충해야 할 게 너무 많아!”
“그래. 일단 뒤로 빠져야겠군.”
태현은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정면승부하기에는 상대가 생각보다 너무 강했던 것이다.
다 잡기도 전에 파티원들이 아작 날 상황!
-이다비. 백야숲 산맥으로 아이템 좀 갖고 와줄 수 있어?
-물론이죠. 제작 직업들도 데리고 갈까요?
-물론이지. 고마워.
하나 말하면 셋을 알아듣는 사이였기에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셋을 말해도 하나 알아듣기 힘든 케인과는 정반대였다.
“계속 뚫어야 하지 않나? 파티원들을 더 늘려서라도?”
“그렇게 들어가다가 포위라도 당하면 절반은 로그아웃당하겠다. 끌어내야겠어.”
“어떻게?”
랭커들은 태현의 말에 의아해했다.
악마들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여기 아키서스의 화신이 있다고 말하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카르바노그가….]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한데. 좀 더 안전한 방법이 있지.’
[?]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얼음 전사들이 사디크 놈들을 이 산맥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가 뭐겠어?’
처음에는 태현이 사디크 권능을 써서 얼음 전사들이 부들부들 떠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얼음 전사들은 이미 사디크 놈들을 몇 번 만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사디크 교단으로 변장한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본 거지.’
[카르바노그가 감탄합니다!]
그랬다.
사디크 교단 장비를 입고 돌아다니는 이데르고 교단 놈들을 봤다면 오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지금 안 그래도 사디크 교단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좀 더 적극적으로 어그로를 끌어주면 우리가 싸우기 전에 둘이 싸우겠지.’
[카르바노그가 역시 화신은 남들 싸움 붙이는 능력은 대륙 최고라고 칭찬합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 * *
파티원들이 후퇴해서 안전 지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태현은 자원자를 모았다.
아무래도 도적 계열이나 암살자 계열이 좋았다.
은밀하게 돌아다녀야 할 테니….
“나하고 간단한 퀘스트 하나 깨러 움직일 사람 없나?”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꼭 가고 싶습니다!!”
“아니. 상태 이상 안 풀렸잖아.”
“안 풀렸어도 갈 수 있습니다! 넣어만 주십시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태현이 퀘스트 깨러 간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듣고 오해를 한 것이다.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진짜 대박 퀘스트인가 보다!’
‘인원 제한 거는 거 보니까 나눠 먹지도 못할 정도인가 봐!’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태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라. 이거 딱히 보상 좋은 것도 아니라, 연계 퀘스트 깨려고 하는 거야. 난이도도 높고 위험하기도 해.”
“더욱더 하고 싶습니다!!!”
“제발! 저 아키서스 교단 실버 등급이란 말입니다!”
“…….”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태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뭐 어떻게 말을 해도 답이 없지 않은가!
* * *
결국 뽑힌 건 발 빠르고 은신 스킬 좋은 랭커들이었다.
앨콧도 그중 하나였다.
“김태현. 고맙다. 이런 퀘스트에 넣어주다니.”
앨콧은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코밑을 쓱 훔치며 말했다.
둘 사이에 이런저런 악연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퀘스트에 참가시켜주는 걸 보니 김태현도 나름 앨콧을 신경 써주는 게 분명했다.
“아니. 이거 진짜 힘든 퀘스트라니까. 보상도 없어.”
“…에이. 듣는 사람 없는데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없다니까??”
“…….”
“…….”
“우… 우릴 속인 겁니까!?”
“내가 언제 너희들을 속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