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93화
확실히 이다비의 말이 맞았다.
이제까지 태현이 진행했던 퀘스트들 중 손해를 본 퀘스트는 없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참가하면 무조건 이득!
게다가 한 플레이어의 인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이제 사람들은 이득을 따지고 퀘스트에 나서지 않았다.
그냥 같이 파티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것이다.
“얼마면 됩니까! 돈으로 사겠습니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 지금 교단의 신성한 역사를 돈으로 사겠다 이거야?? …얼마에 살 거지??”
“공적치 포인트 삽니다! 무조건 시세보다 두 배 이상!”
점점 더 과열되어가는 모습에 태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빨리 시작해야겠군. 공적치 포인트 높은 사람들 골라서 순서대로 이름 좀 건네줘.”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일행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퀘스트 좀 하고 있어줘. 이거 하는 동안에는 레벨 업 하기 힘들 테니까.”
“안 도와줘도 괜찮겠어?”
“어차피 일퀘 같은 거라 도움 필요할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왕국 안이니 얼마든지 NPC 동원할 수도 있고.”
태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서 태현만큼 제작 스킬들에 진심인 사람은 드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퀘에 참가한다고 해도 그다지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 것이다.
‘앗. 잠깐. 이건 기회인가?’
케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대괴수 오르기돈 때문에 노드란체 섬을 관리하느라 팀 KL 감독도 케인을 잠시 내버려 두고 있는 상태.
이 상황에서 태현마저 케인을 내버려 두면?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황금 같은 자유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뭐… 뭐부터 해야 하지?’
케인은 전력을 다해 고민했다. 경기 전 전략을 짤 때도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은 거 같았다.
‘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평생 감옥에서 살아온 죄수가 해방되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듯이, 케인도 자기가 너무 오랜만에 자유를 얻었다는 걸 깨달았다.
김태현 밑에서 맨날 ‘이거 해라’ ‘그거 다 했으면 저거 해라’ 지시받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판온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케인은 나 따라와라.”
“!??”
케인은 기겁했다.
“난 왜?!”
“넌 키메라 종족인 데다가 저번에 보니까 잡일 잘하더라. 네 생산 스킬 재능이 필요해.”
“…….”
케인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대는 동안, 류태수가 감탄했다.
“부럽습니다. 케인 선수. 저렇게 인정받을 줄이야.”
“오빠. 내가 잘은 모르지만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건 시비처럼 들릴 것 같아.”
* * *
희귀 직업 <골란소 농사꾼>을 가진 농부 플레이어, 앨리아는 골짜기에서도 나름 유명한 고참이었다.
골짜기 초기부터 자리 잡은 플레이어들에게는 일종의 전설 같은 위엄이 있었다.
골짜기에 아무것도 없던 때부터 자리 잡고서 이만큼 골짜기를 키워낸 대단한 사람들!
…물론 진실과는 좀 거리가 있긴 했다.
골짜기 초기 플레이어들은 보통 다 도박하러 온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영지에 눌러앉고 ‘할 거 없는데 기다리는 동안 제작이나 해야겠다’ ‘여기 땅 남는데 뭐라도 지어볼까? 저번에 선물 받았는데 놀리는 것도 아깝고’ 같은 식으로 점점 굴리다 보니 골짜기가 알아서 커져서 대박이 난 것이다.
그냥 먼저 와서 앉아 있다가 대박이 난 셈이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행운과 별개로, 골짜기 고참 플레이어들이 실력이 없지는 않았다.
이 주변 땅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머무른 만큼 각종 사정에 잔뼈가 굵은 것이다.
-수확할 때가 됐군. 흐음… 저기 가판대에서 책 세 권만 사와라.
-예? 대체 왜 수확을 하는데 가판대에서 책을 사시는 겁니까?
-이제 저 책을 갖고 가서 앞에서 쉬고 있는 아키서스 교단 상급 사제 NPC한테 바치면, 취향에 맞는 선물을 줬다는 보상으로 공적치 포인트 두 배를 주고 보너스로 사제 동원 이벤트를 선물해 줄 거다. 그러면 이제 사제를 동원해서 영지로 데리고 와서 수확할 때 축복을 거는 거지.
-…대,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존경을 받는 고참 플레이어들.
이들의 라이벌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앨리아. 저번 수확 영상은 아주 잘 봤다. 제법 비싼 비료를 뿌렸나본데? 나무에서 황금 사과가 열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마찬가지로 희귀 직업, <소 떼의 계승자>를 가진 농부 플레이어 김영준은 앨리아와 마주치자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둘은 골짜기에서도 치열하게 다투는 라이벌이었던 것이다.
골짜기에서 같은 제작 직업을 가진 이상 서로 경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제작 직업 중에 친하게 지내는 건 저 <악마의 대장간>에 있는 미치광이들밖에 없었다.
“후후. 황금 사과를 뽑을 줄은 몰랐나 보군. 그렇겠지.”
“흥. 기껏해야 운이겠지. 나도 그렇게 돈과 공적치 포인트를 쏟아부으면 황금 사과 정도는 뽑을 수 있어! 방송을 위해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다니! 농부로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는 왜 다 장비를 벗고서 농사를 하고 있는 건데?”
“…시청자들한테 벌칙 받고 있다.”
“…….”
골짜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개인 방송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심심할 수 있는 제작 직업들에게 랜덤성을 부여해 주는 게 컸다.
다른 왕국의 농부 플레이어는 묵묵하게 농사를 짓는 영상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힐링시켰지만, 골짜기 농부 플레이어들은 오늘은 어떤 비싼 작물을 논밭에서 뽑아낼 수 있을지 시청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오늘 제가!! 갖고 있는 공적치 포인트와 재산을 다 털어서 축복을 있는 끝까지 받았습니다. 이 밭에서 최상급 육화초를 뽑지 못하면 저는 아키서스 교단에 끌려가게 될 겁니다! 돈도 빌렸으니까요!
두 농부 플레이어는 잠시 반성하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서로를 비판하려고 해도 다 자기들이 했던 짓인 만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침착을 되찾은 김영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황금 사과가 희귀하고 강력한 아이템이지만, 두고 봐라. 나는 이번 농사에서 <아키서스를 닮은 맨드레이크>를 뽑아내고 말 테니까.”
신성력을 잔뜩 품고 있는 데다가 각종 옵션이 붙은 황금 사과는 요즘 농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핫한 아이템이었다.
교단에 바치면 공적치 포인트를 주고 요리사들한테 팔면 골드가 쏟아져 나오는 그야말로 대박 상품!
하지만 이게 확률이 정말 욕 나오는 수준으로 낮은지라, 한 번 뽑기 위해서는 정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 황금 사과보다 더 대단하다고 소문이 돌고 있는 아이템이 있었다.
바로 <아키서스를 닮은 맨드레이크>였다.
[퀘스트, <아키서스를 닮은 맨드레이크 확보>가 추가되었습니다.]
[…….]
골짜기 농부들이 퀘스트로만 받아봤지 아직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아이템!
대체 그 효과와 가치가 어느 정도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크윽…!’
앨리아는 이를 갈았다.
한 발 앞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김영준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맨드레이크 뽑는 방송 시작하면 사람들은 저쪽으로 몰려가겠지!
‘흥. 하지만 상관없다.’
앨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앨리아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더 있었던 것이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와주세요!”
“어… 일하러 왔는데 그렇게까지 대접할 건 없습니다만.”
“아니에요! 어느 분이신데 감히! 와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공적치 포인트 써서 부른 건데 너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요리 대접도 괜찮습니다. 직접 할 테니까.”
“???”
김영준은 멀리서 들리는 앨리아의 목소리에 호기심 찬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를 불렀기에 저 난리야?’
혹시 비전 스킬을 가진 농부 NPC라도 부른 걸까?
“허… 허어어억…!!!”
김영준은 눈을 크게 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람이 앨리아의 논밭에 있었던 것이다.
‘김, 김, 김태현!!!’
김영준은 경악했다.
골짜기 영주, 아탈리 왕국 국왕, 아키서스 교단 교황, 판온 리그 최고의 선수 등등 여러 수식어가 있었지만 골짜기 생산 직업 플레이어들에게 태현은 다른 별명으로 불렸다.
-현존 최고 행운 스탯 플레이어!
물론 상대의 스탯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현이 보여주는 단편적인 모습을 봤을 때, 태현의 행운 스탯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상자만 열었다 하면 대박이 나오고, 낚싯대를 던지면 희귀 물고기를 척척 건져내고, 농사를 지으면 평소에는 보기도 힘든 작물들이 자라나고…
아무리 아키서스 교단 교황이고 직업 스킬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행운 스탯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앨리아를 도와주러 오다니.
‘으아악…! 그거구나!!’
김태현이 일퀘 도와준다고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것!
경쟁자를 엿먹이려는 헛소문이거나,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한두 명 해주고 말겠지 싶어서 안 갔는데…!
그걸 앨리아가 뽑은 것이다.
‘미친 거 아냐!? 공적치 포인트를 전부 꼬라박았나?!’
하지만 김영준도 내심 알고 있었다.
일단 김태현만 부를 수 있으면 얼마를 썼든 대박이라는 것을.
실제로 지금 김영준의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미친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 났나요?
-골짜기 농부 플레이어 앨리아 방송 보세요! 김태현이 일퀘하러 옴!!
-김태현이 농사를 짓는다고??
-농사짓기 전에 요리부터 하는데요? 헉. 케인 먹을 요리 한다.
-저게 그거임? 그 팀 KL 숙소에서 선수들 밥 먹이는 그거?
-케인 저 놈은 대체 왜 가만히 앉아 있음? 양심이 없나? 퇴출시켜야 하는 거 아님?
-아니… 현실이 아니잖아요 선생님들… 요리 스킬이 없을 거 아니에요.
-아차. 그랬지. 습관이 되어서….
‘헉.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야.’
김영준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앨리아 방송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 *
“논밭에서 다 자란 거 뽑고, 과수원 돌면서 과일 수확하고… 별로 어려운 일은 없군요.”
“네! 그냥 서서 숨만 쉬셔도 됩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아니에요! 쉬엄쉬엄하세요!”
케인은 앨리아의 말에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친절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러나 태현은 냉정했다.
“케인. 빨리 보약 원샷해라. 네가 밀고 내가 수확할 테니까.”
“끄으윽…”
케인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태현이 만들어준 보약을 원샷했다.
방송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태현이 만든 멀쩡한 요리들만 봤기 때문에 그 안에 숨겨진 계략을 알지 못했다.
케인이 먹는 요리는 아예 잡일 특화로 따로 만든 것이다.
맛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오로지 성능의 요리!
“가자. 케인. 밀어!”
“간다!”
“!!!!”
보고 있던 앨리아는 둘의 미친 속도에 깜짝 놀랐다.
여섯 개의 팔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땅을 파내고 길을 만드는 케인.
그리고 그 케인을 다루면서 다 자란 작물들을 캐내는 태현.
‘농… 농사의 신이야…!’
보통 제작 스킬을 잘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농부를 무시하곤 했다.
씨앗 뿌리고 쟁기질 한 다음 뽑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농사 스킬도 절대 만만한 스킬이 아니었다.
한 개 심고 한 개 뽑는 거면 모를까, 대량으로 심고 관리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컨트롤이 필요한 것이다.
전투에서 보여주는 컨트롤처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과 반응속도가 필요한 것이다.
“헉, 헉….”
“케인. 세 번째 손이 멈췄다!”
‘아오, 개자식.’
팀 KL 감독한테 시달리면서 ‘차라리 김태현이 낫겠다’ 생각했던 케인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감독님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