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86화
[<옛 파멸의 골짜기>에 입장했습니다!]
[현재 골짜기 안에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다시 한번 고민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정체불명의 울음소리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이다비!”
“네!”
태현은 이다비가 넘긴 <옛 파멸의 골짜기> 정보를 빠르게 확인했다.
대괴수 오르기돈을 상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보를 외워 둘 생각이었다.
‘지하 협곡. 상당히 넓고… 나오는 몬스터들은 도적, 언데드, 오염된 나무 괴물….’
나름 레벨 높은 지역이긴 했지만 여기 들어온 랭커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150에서 200 정도.
보스 몬스터도 따로 나오지 않는 지역이었으니 당연했다.
“지금 더 위험한 적은 여기 지역 몬스터들이 아니라 밖의 플레이어들 아니야?”
“그렇긴 해. 가능한 우리까지 휘말리지 않게 중립 딱 박자.”
태현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오스턴 왕국에 있는 세 초대형 길드는 서로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다.
오죽하면 길드 동맹이 태현에 대한 원한을 잊고 친한 척을 할까.
지금 <옛 파멸의 골짜기>에 가장 먼저 입장한 건 태현 일행.
뒤로 도착하는 게 누구든 간에 서로 안 싸울 거 같지는 않았다.
‘최대한 안 휘말리고 오르기돈 사냥에만 집중해야지.’
태현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태현 일행 다음으로 온 스미스와 친위대.
그리고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길드 동맹이 도착했다.
“막아!”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있냐?!”
길드 동맹 랭커들은 대놓고 길을 막는 화이트 나이트 랭커들을 보고 경악했다.
지금 같이 대괴수 오르기돈 사냥하는 입장에 이렇게 길을 막다니?
“뭐하는 거냐? 미쳤냐? 비켜!”
“자리다!”
“…뭐??”
“여기 <옛 파멸의 골짜기>는 우리 화이트 나이트가 먼저 들어왔다. 우리가 사냥하는 동안 우리 자리다!”
“미친놈아! 지금 그딴 개소리가 통할 거 같냐?!”
길드 동맹 랭커들은 격분했다.
물론 판온에서 대형 길드들은 저런 식으로 사냥터 통제를 하는 게 사실이었다.
질 좋은 사냥터의 경우 다른 플레이어들을 막고 길드가 독식해야 효율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암묵적인 규칙은 대형 길드들도 서로 존중해 줬다.
이런 걸 존중하지 않으면 서로 싸움이 끊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하하 그렇군! 너희가 먼저 왔으니 너희 자리인 걸 인정하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길드 동맹 랭커들은 호구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오르기돈 사냥을 독점하려고 이러는 것 아닌가.
“비켜!”
“지금 우리 자리를 무시하는 건가??”
“그래. 무시한다. 지금 연합이라 잊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너희와 싸우는 걸 두려워할 것 같나? 비키거나 전투다!”
퍽!
그리고 공격은 화이트 나이트 랭커가 먼저 시작했다.
누가 스미스 부하 아니랄까 봐 선빵부터 날리고 보는 화끈함!
[윈데로 검술 스킬로 인해 방어를 뚫고 추가 데미지가…]
[윈데로의 세 번째 일격 스킬이 광역 데미지를 입힙니다!]
[윈데로 검술의 두 번째 비기가…]
“공격!!”
하지만 이번에는 길드 동맹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판온 길드들 중에서 길드 동맹만큼 시련을 겪은 길드도 드물었다.
그런 만큼 길드 동맹 랭커들은 이런 상황에서 쉽게 방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방어 스킬 올리고 반격 개시!
“저 건방진 놈부터 끝장내라! 구멍 뚫고 안으로 들어가서 합류해야 하니까!”
콰콰콰쾅!
여러 스킬들의 이펙트가 펼쳐지고, 화이트 나이트의 랭커 상대로 공격이 집중되었다.
다른 화이트 나이트 랭커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짜여 있는 합동 공격이었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두 개의 스킬이 서로 증폭시키며 추가 데미지를…]
[……]
[……]
‘아니!?’
화이트 나이트 랭커들은 놀랐다.
합동 공격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판온에 올라운드 플레이어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서로 약점을 보완하거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일들은 종종 있었으니까.
문제는 랭커쯤 되면 이런 일들이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랭커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것!
남들과 협력하면서 합동 공격을 하다 보면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길드 동맹 랭커들은 놀랍게도 이런 합동 공격을 능숙하게 펼쳤다.
서로의 스킬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몇십 번은 연습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빠르게, 바로 나오지는 못했다.
“물러서!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다. 어차피 우리 목적은 시간을 끄는 거다.”
“한 놈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지원 불러! 오스턴 왕국에 있는 플레이어들한테도 공지를 올려라. 길을 막는 걸 도와주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
화이트 나이트 랭커들의 외침에 길드 동맹 랭커들은 경악했다.
누굴 부른다고??
“뭐… 지금 누굴 부르는 거야, 미친놈들아! 외부인 불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지금 이렇게 다투고 있는 건 서로 경험치를 조금이라도 더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말이 ‘조금’이었지, 대괴수 오르기돈 레이드 정도면 그 경험치 양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런데 외부 플레이어들을 부른다니. 만약 일이 틀어져서 그놈들이 레이드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경험치가 줄어들 것 아닌가.
“그러면 너희들이 우리 자리를 인정하고 양보하던가!”
“…그래. 끝장을 보자. 개자식들아. 야! 이쪽도 공지 올려! 길 뚫는 거 도와주는 놈들에게 포상금이다!!”
두 길드는 태현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싸움의 규모를 대거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 단순히 입구를 막냐 뚫느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길드의 자존심 대결!
* * *
오스턴 왕국 남부 지역.
한때는 역병지대였던 곳에 지금은 평화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역병 정화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아, 빨리 지어달라니까요!”
“어허!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 번만 더 방망이 깎던 노인 인용하면 진짜 계약금이고 뭐고 그냥 끝내버릴 겁니다!”
“헉. 어떻게 알았지?”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수군거렸다. 상대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던 것이다.
지금 여기 남부 지대는 건설의 열기로 뜨거웠다.
역병이 사라지고 폐허만 남아 있는 새 땅이 되었으니, 길드 동맹 길드원들 중 건물 좀 갖고 싶은 사람들은 전부 다 달려들어서 복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단물을 쪽쪽 빨고 있는 게 바로 파워 워리어였다.
가까운 아탈리 왕국에서 놀다가 소식 듣고 쪼르르 달려와서 퀘스트들을 닥치는 대로 받아낸 것이다.
길드 동맹 입장에서는 태현과 가까운 파워 워리어가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파워 워리어는 그냥 거부하기에는 이제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전투력을 떠나서 게임 외적으로 귀찮게 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쫓아냈다가는 게시판을 돌면서 길드 동맹의 욕을 퍼뜨리고 다른 플레이어들을 선동해서 건설 퀘스트를 방해하겠어!
-처신 잘하라고. 이 근처 재료들 누가 모아오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아니!? 정해진 시간 외에 추가 노동을?! 이거 노동법으로 불법인 거 아나? 중국에는 그런 게 없나?
-미친놈들아 게임에 그런 걸 왜 들고 와!
그리고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의 솜씨가 좋긴 했다.
워낙 잡퀘들만 깨면서 놀던 사람들인 만큼….
“하도 방망이 깎던 노인 많이 써서 이제 눈치를 채나 보다.”
“어쩐지 중국 쪽 사이트에 ‘방망이 깎던 노인 번역’ 같은 글들이 올라와 있더니….”
호통치면서 시간 끌려고 했던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아쉬워했다.
이렇게 된 이상 열심히 해야 하나?
[<옛 파멸의 골짜기>에서 긴급 퀘스트 모집…]
[……]
[……]
“!!”
“오오…?”
갑자기 뜬 새로운 퀘스트.
보수도 보수지만 ‘골짜기’가 이름에 들어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왠지 그 골짜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괜찮아 보이는데?”
* * *
“아니. <악마가 빙의된 대포>는 이쪽에 놓고… <신성력이 부여된 거대 대포>는 이쪽이 낫겠군.”
밖에서 혈투가 벌어지는 사이 태현은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갖고 있는 전력들을 곳곳에 배치한 것이다.
지하 협곡이긴 했지만 안은 넓어서 아키서스 포병대를 쓰기 적절했다.
“공략은 간단해. 탱커들이 중심인 1 공격대가 발을 묶고, 근접 딜러들이 중심인 2 공격대가 딜을 넣고, 원거리 딜러들이 멀리서 계속 딜을 넣는 거지.”
대괴수 오르기돈 상대로 몇 번이고 써왔고, 다른 레이드에서도 쓰여 왔던 정석적인 전술.
능력만 되면 이것만큼 좋은 전술도 없었다.
“문제는 놈의 발을 묶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그보다 더 어려운 게 딜을 쑤셔 넣는 일이라는 거지.”
세 길드가 공략에 실패하는 건 이세연도 봐서 알고 있었다.
오르기돈의 무식한 체력도 체력이었지만, 발을 묶는 탱커들이 얼마나 힘들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실수 한 번에 로그아웃될 수 있다는 압박감.
탱커들도 사람인만큼 이걸 덜어줘야 했다.
“내 골렘들과 언데드 군단들이 발을 묶긴 할 거야.”
케인은 감동 받은 표정으로 이세연을 쳐다보았다.
김태현과 같이 다니는 걸 보고 김태현만큼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탱커들을 배려해 주는 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세연의 정예 언데드들과 골렘들은 유명했다. 이들이 도와주면 탱커들 입장에서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네크로맨서 입장에서는 잘 키운 언데드들과 골렘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해야 했지만….
“그렇군. 나도 언데드들을 소환할까?”
“아니. 너는 MP 아껴서 딜에 집중하는 게 나을 거 같아.”
“맞는 말이야.”
옆에서 케인이 거들었다. 솔직히 태현의 언데드들은 너무 기괴한 놈들이 많아서 괜히 걱정됐던 것이다.
케인까지 같이 자폭시키면 어떡하지?
“화이트 나이트에서 동원한 용병들과 기사 NPC들도 발을 묶을 겁니다. 물론 저희 랭커들도 함께 말입니다.”
스미스의 영향으로 중장갑 기사 랭커들이 여럿 있는 화이트 나이트답게, 탱커는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NPC들까지 잔뜩 고용한 이상 발을 묶을 준비는 얼추 끝난 셈이었다.
그 모습에 케인은 국밥처럼 든든함을 느꼈다.
이게 정석적인 레이드인가?
‘생각해 보니 나는 너무 이상한 레이드만 해왔던 거 같아…!’
보통 이렇게 탱커들이 여럿 모여서 서로의 부담을 나눠 가지고, 각종 도움도 받아가면서 레이드를 하는 게 정상이지!
“뭔 생각하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태현의 질문에 케인은 표정을 관리했다. 괜한 소리 했다가 괜히 난이도가 올라가는 수가 있었다. 케인도 많이 성장했던 것이다.
“스미스. 네 랭커들 전력을 못 믿는 건 아닌데… 지금 입구에서 싸움 일어나고 있지 않나?”
“싸움이라니. 사소한 다툼입니다.”
“…그, 그래. 어쨌든 이 사소한 다툼 때문에 레이드에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차라리 타협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태현도 경험치 독식하는 건 불만이 없었다.
숫자가 적을수록 얻는 경험치는 늘어났으니까.
지금 길을 막고 있는 건 화이트 나이트 쪽이었으니 태현이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보통은 태현이 욕을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특이한 일!
하지만 그러다가 레이드가 실패하면 본말전도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태현 씨. 제 이름을 걸고 레이드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 드립니다.”
스미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강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 든든한 모습에 케인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스미스가 대단하긴 해. 그렇지? 레이드 시작하면 다른 기사 랭커들하고 최전선에 서서 탱킹한다더라. 스미스를 보면 본받고 싶어진….”
“케인. 내가 신호하면 스미스 공격해라.”
“…으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