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85화
그런 확신을 하는 건 스미스뿐만이 아니었다.
“스미스가 넣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확인해 보니까 지금 스미스 놈은 친위대를 이끌고 하늘을 날고 있다더군.”
스미스가 다른 길드들의 사정을 스파이 심어서 캐내고 있는 것처럼, 다른 길드들도 화이트 나이트 내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초대형 길드가 되는 순간 길드의 정보는 새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현처럼 아예 길드 하나 없이 따로 움직이는 게 특이한 케이스였고 원래는 다 그런 걸 감안하면서 작전을 짰다.
물론 상대가 그런 감시를 피해서 퀘스트를 깬 걸 수도 있었지만….
“김태현 같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들 직감으로 확신했다.
다른 놈들보다는 김태현이 손에 넣었을 거 같다!
* * *
골짜기 대장장이들이 새로 만들어줬다는 말에 긴장했지만, 다행히 에드안의 능력은 멀쩡했다.
-사루온이 마법을 새겨 주었습니다.
“다행이군.”
처음에 들었을 때는 ‘설마 팔에 폭탄 넣었나?’ 하고 긴장했지만 골짜기에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악마 대장장이 사루온만 해도 폭탄 말고 다른 제작 스킬들에 능한 것이다.
[에드안이 <속삭이는 환영>을 사용합니다.]
[친위대들의 관찰력이 하락합니다.]
[……]
[……]
“!”
태현은 에드안이 생각보다 뛰어난 마법을 사용하자 깜짝 놀랐다.
그냥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이런 능력이?
“어떻게 한 거지?”
-사루온이 장비에 새겨준 마법 덕분입니다.
태현이 없는 사이, 에드안은 악마 대장장이 사루온과 꽤나 친해진 모양이었다.
각종 보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장비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그 결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 그럴 능력이 있으면서 폭탄만 가르쳐줘?’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악마의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한테 저런 스킬을 가르쳐줘도 됐었잖아!
물론 태현도 저게 가르친다고 모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킬 하나 배우기 위해서 깨야 하는 퀘스트들이 몇 개던가.
게다가 당장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에이 그런 스킬은 필요 없어요! 폭탄 만들래요 폭탄!’이러는 놈들이었으니….
“그래. 어쨌든 잘 됐군.”
-목소리가 안 좋으십니다?
“시끄러.”
-사디크의 화염 환영 분신!
태현도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친위대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친위대원들의 상태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태현을 대신할 분신들도 필요했던 것이다.
화르륵!
마법과 함께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된 분신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에드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리 친위대원들의 판단력이 떨어져도 가까이 오면 들킬 것 같은….
“알고 있다.”
이 분신들은 애초에 친위대원들한테 보여주려고 소환한 게 아니었다.
태현은 궁전 안을 걸어 다니면서 슬쩍 슬쩍 분신들을 적당한 곳에 배치해두었다.
<사디크의 화염 환영 분신>
사디크의 화염으로 된 환영 분신을 소환합니다. MP를 소모해 이 분신들과 위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빠르게 궁전 안을 이동할 수 있지.”
-오오…! 그런데 저는…?
“넌 알아서 해야지.”
-…….
에드안은 피도 눈물도 없는 교황에게 감탄했다.
드래곤의 둥지에 들어가서 보물 훔치다 걸려도 자기 목숨 하나는 챙겨 나올 것 같은 철저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슬라임 분신 소환>!”
태현을 대신할 분신은 다른 스킬로 만들 생각이었다.
슬라임 신의 권능 스킬!
공격 받을 경우 분신이 풀리고, 움직임도 매우 느렸지만 겉모습 하나만큼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는 장점이 있었다.
‘좀 쓰레기 같은 권능 스킬들도 이렇게 쓸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감쪽 같습니다.
“그럼 이제 시선을 돌린 다음 은신해야겠군.”
-예. 어떻게 시선을 돌리시겠습니까?
“네가 해야지.”
-…….
에드안은 슬슬 여기에 온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냥 혼자 할 거 그랬나…?
[에드안이 <투명한 기척> 스킬을…]
[에드안이…]
[……]
불평을 하긴 했지만 에드안은 은신 스킬을 쓰고 친위대원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태현도 각종 스킬을 쓰고 은신을 시도했다.
-행운의 은신!
<신의 예지> 스킬을 켜고 있는데도 은신 가능한 공간이 실낱처럼 가늘었다.
이 궁전 안이 얼마나 난이도 높은 공간인지 알 수 있었다.
‘실수 한 번 하면 아작나겠는데….’
태현의 은신 스킬이 낮은 편도 아니었다.
현재 은신 스킬이….
고급 은신 9 (44%)
고급 은신 9레벨. 도적 직업도 아닌데 이 정도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퀘스트를 깰 때마다 정면 전투보다 이렇게 은신한 채로 침투한 일이 많아서 이렇게 오른 것!
‘이번에 다 깨면 최고급 찍을지도 모르겠군.’
-따라오십시오.
에드안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평소에는 한심하던 NPC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왕국 초원의 정경>을 발견했습니다!]
[영구적으로 지혜가…]
[……]
[……]
가는 길에 새로 발견한 예술품들은 덤.
태현은 에드안에게 물었다.
“저거 가지고 나갈 순 없나?”
-안 됩니다. 교황님. 제 경험으로 봤을 때 저런 예술품들은 건드리는 순간 경보 마법이 발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절절하게 진심이 묻어 나오는 말!
“마법을 풀 방법은?”
-물론 없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다른 목표가 있으니 미뤄두시는 게 좋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일이 꼬이는 수가 있으니까요. 이쪽입니다.
‘윽.’
태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점점 더 은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은신 광선 장난감>은 아껴두고 싶은데….’
태현이 가진 패는 은신 스킬들과 제국 은신 광선 장난감.
기계공학의 걸작인 이 아이템은 한 번 쓰면 강력한 은신 상태를 제공해 줬다.
하지만 내구도 제한이 있는 데다가 시간제한까지 있으니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물건.
[<왕관의 방>을 발견합니다!]
[침입이 발각될 경우 친밀도가…]
[평가가…]
[……]
-찾았습니다!
“그래. 나도 보인다.”
넓은 방 가운데에 위치한 투박한 왕관.
잘츠 왕국의 왕관은 놀랍게도 각종 금속으로 된 화살들을 녹여서 붙인 왕관이었다.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매우 높…]
[기계공학 스킬이 매우…]
[……]
[……]
[<대괴수 파멸의 화살>을 발견합니다!]
태현의 높은 제작 스킬들이 여기서 활약했다.
원래라면 왕관의 어느 화살이 필요한지 찾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해야 했겠지만,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드안. 화살을 뽑아서 갖고 와라.”
-예.
에드안은 능력을 쥐어짜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위험했지만 이 안은 더 위험했다.
태현이 괜히 에드안을 시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타악-
에드안은 조심스럽게 화살을 뽑아서 태현에게 건넸다.
[이름 모를 영웅이 대괴수의 심장을 찌를 화살을 손에 넣었습니다!]
[영웅들이여, 모두 힘을 합해 대괴수의 숨통을 끊으십시오!]
“…!!”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뭐 이런 개같은 퀘스트가 있냐?’
퀘스트 진행 상황을 전체 플레이어들에게 공유해 주는 퀘스트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이름 모를 영웅이라고 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면 다 알아챘을 것이다.
실제로 메시지창이 뜨자마자 태현한테 귓속말들이 우르르 날아오기 시작했다.
“됐다. 빠져나가자!”
[왕관의 무게가 가벼워졌습니다. 마법이 발동됩니다.]
[추적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
에드안의 머리 위에 붉은 낙인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설마 왕관의 무게로 경보 마법이 발동될 줄 몰랐던 에드안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잘츠 왕국 주제에 이런 마법을…?
“낙인 지울 방법이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마법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
에드안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키서스의 권능으로 해결해 주시려는 것일까?
“도망쳐라.”
-…….
생각보다 너무 단순무식한 방법에 에드안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금 그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그, 그거야 그렇지만.
이 낙인의 효과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추적작들이 쫓아올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이 가능했다.
도망치긴 해야 하는데….
“계속 도망치다 보면 놈들도 지치겠지. 어쨌든 내가 대괴수 잡을 때까지만 버텨. 나중에 오해를 풀어주든가 할 테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에드안은 그렇게 말하고 호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믿든 안 믿든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
태현도 은신을 풀고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친위대원들이 곳곳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침입자가 있습니다!
“감히 이 궁전에 침입하다니! 그런 사악한 놈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에게 낙인이 찍혔으니 멀리 도망치지 못할… 어디 가시는 겁니까?
“대괴수 놈이 잘츠 왕국으로 왔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해치우지 않으면 누가 해치우겠나.”
-과연!
친위대원들은 태현의 헌신적인 태도에 감동했다.
대륙의 위기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자기 일처럼 나섰다는 소문이 과연 사실이었던 것이다.
-역시 폐하께서는 영웅이십니다! 대륙을 노리는 사악한 적들은 모두 덤벼보라고 하십시오! 폐하를 넘지 못할 테니까요!
“선 넘지 마라. 지금도 충분하니까.”
-!?
* * *
태현 일행은 화살을 손에 넣자마자 대괴수가 향한 <옛 파멸의 골짜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무조건 더 빠르게 가서 버텨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태현에게 미친 듯이 귓속말을 보내던 길드들 중 가장 먼저 태현을 찾은 사람은 바로 스미스였다.
“저 미친놈은 하늘에서 뭐하는 거야!?”
빠르게 날아올라 움직이려던 태현은 하늘에서 낙하하는 스미스와 친위대를 보고 기겁했다.
위에서 올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김태현 씨! 연합해야 합니다!”
떨어지던 스미스와 친위대원들은 재빨리 탈것을 다시 불러냈다.
“지금 김태현 씨가 퀘스트 아이템을 손에 넣은 걸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길드 동맹? 미다스? 모두 속이 시커먼 자들! 김태현 씨의 퀘스트 아이템을 뺏으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겨냥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공중을 날고 있던 태현 일행들은 스미스와 친위대를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드 동맹이나 미다스 못지않게 스미스도 위험천만한 놈!
-솔직히 혼자서 독식하기는 힘들 것 같아.
이세연도 귓속말로 말했다.
대괴수 놈을 상대할 인원도 인원이지만, 혼자서 세 길드 상대로 막아낸 다음 독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동맹은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골라야 할까?
과거의 원한을 잊고 요즘 부쩍 친해진, 어마어마한 숫자와 조직력을 자랑하는 길드 동맹.
마법사의 양과 질로 따지면 판온에서 따라가기 힘든 길드인 미다스.
그리고 스미스와 미친놈들인 화이트 나이트.
‘누굴 골라도 욕 먹을 거 같은데….’
[카르바노그가 책임을 회피하자고 말합니다.]
‘좋은 생각이야.’
태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스미스. 난 내가 대괴수를 혼자 잡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고 있지도 않다.”
“…아.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이 자식 은근히 얄밉네.’
“하지만 시간을 끌면 피해만 커지고 놈이 어디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빨리 잡아야 하는 건 사실이지! 난 <옛 파멸의 골짜기>로 가서 지금 바로 레이드에 들어갈 거다! 참가하고 싶은 놈들은 알아서 참가하라고 해!”
“!”
스미스는 태현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지금 골짜기 근처에 나와 있는 길드원들은 입구 막고 김태현 일행 제외한 어떤 자도 못 들어가게 통제해라!
-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신경 안 쓰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입구를 막아버리고 김태현과 같이 레이드를 끝내버리면 그만이었다.
“…언데드로 쓸 시체 많이 나오겠네.”
혈투를 예상한 이세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