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83화
“다음 분?”
“중국 선수들이 졸렬하게 뒤에 숨어 있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
기자들이 단체로 짰나?
태현은 순간 그런 의심을 했다. 보통 원래 이렇게 단합이 잘 되진 않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인 만큼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태현도 그걸 쏠쏠하게 이용했었고….
-영국 방송사 XXX에서 온 기자입니다. 김태현 선수. 게임단 대표의 지위를 악용해서 동료 선수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는데….
-저 기자 분 밖에 나가기 전에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잠, 잠깐! 이봐! 뭐하는 거야! 같은 기자로서 이래도 되는 건가! 으아악!
-꺼져! 이 도움 안 되는 놈 같으니.
서로 사이가 안 좋다 보니 태현이 말 한 번 하면 다들 신나게 서로 물어뜯었다.
하지만 오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계획된 건 아니었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기자들이 안 물을 수가 없는 거였지만….
태현 입장에서는 좀 수상쩍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 * *
“저걸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됩니까?”
다른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국 선수들은 해외 기자들의 무례한 질문에 분노했다.
멀리서 와가지고 할 질문이 그것밖에 없나??
내일 신성한 경기를 앞에 두고 하라는 경기 질문은 안 하고 저런 질문만 하고 있으니….
“쉿. 조용히 입 닥치고 있어.”
“닥쳐야 할 건 저놈들 아닙니까?”
“이런 눈치 없는 자식 같으니… 지금 분위기도 모르나?”
중국 선수들을 케어하기 위해 따라온 게임단 팀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낮게 말했다.
“여론이 장난 아니라고.”
“언제부터 해외 여론을 그렇게 신경 썼다고….”
“해외 여론을 말하는 게 아니야, 멍청이들아. 국내 여론을 말하는 거야!”
“!!”
보통 해외에서 중국 선수 욕을 하면 중국 사람들은 선수 편을 들어줬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협회를 포함해서 선수들까지 같이 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래서 핸드폰 쓰지 말라고 했던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입 닥치고, 죄인처럼 고개 푹 숙인 채로 가만히 있어. 반성하는 모습 보여야 하니까. 낄낄대는 모습 카메라에 잡히면 선수 인생 그대로 끝난다고 생각해라.”
팀장의 말에 선수들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니 새삼 이번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 느낌이 온 것이다.
같은 편을 들어줘야 할 사람들도 분노해서 뒤집어진 상황이라니.
-이번에 중국 선수들에 대한 비난이 좀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저, 저…!”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저격하는 기자의 질문에 중국 선수들은 화들짝 놀랐다.
게다가 상대가 김태현 아닌가.
‘큰일났다…!’
‘저 새끼가 절대 좋은 말을 해주지는 않을 텐데.’
김태현이 중국 선수들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악연만 가득했으니까.
김태현과 중국 선수들 사이에 있는 인연이라고는, 판온 경기에서 두들겨 패거나 혹은 중국 신인 선수가 ‘김태현 게섯거라….’ ‘김태현을 뛰어 넘겠다’ 같은 식으로 어그로 끌 때 정도?
“아까 말했지만, 중국 쪽 선수들도 다른 게임단 선수들처럼 뒤에 있어서 나설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앞에 있었고요.”
“…!!”
그렇기에 태현이 저런 말을 해주자 중국 선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 파이터즈 소속 선수, 펭귄팬더는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였다.
태현이 저런 말을 해줄 줄이야.
‘김태현… 대체 뭐냐?’
상황이 반대라면 펭귄팬더는 절대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서서 욕을 하진 않더라도 굳이 편까지 들어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펭귄팬더는 순간 정체 모를 감정이 안에서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바로 감동이었다.
‘이… 이게 스포츠맨십인가…!’
예전에 스포츠는 화합의 상징이고 선수들은 서로 겨루면서 이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바로 이런 상황 아니겠는가.
옆을 보니 다른 게임단의 중국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크윽… 김태현.”
“이번은 내가 졌다.”
“언젠 네가 이겼었냐?”
“닥쳐….”
“솔직히 고맙군.”
“팬이 될 것 같습니다.”
“선 넘지 마라. 그건 아니야.”
* * *
“…그래서 어… 경기는요?”
“이겼다니까?”
유지수의 질문에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미 이겼다고 말했고, 그 전에 경기 결과는 생중계로 발표까지 나지 않았던가.
왜 자꾸 묻는 거지?
“아니, 당연히 과정을 묻는 거죠!”
유지수도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 4강 경기에 대한 태현의 소감을 듣고 싶었던 거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공항부터 시작하는 장황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솔직히 흥미롭긴 했다.
뉴스 나왔을 때는 유지수도 깜짝 놀라서 봤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이겨서 딱히 할 말이….”
태현의 말에 유지수는 한숨을 쉬더니 더 이상 묻는 걸 포기했다.
“어쨌든 이겼다니까 잘됐네요?”
“응. 길드 동맹 말고 다른 놈들은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나?”
“그렇죠 뭐. 소란 때문에 겁먹었을걸요?”
절벽을 기어오른 길드 동맹 길드원들이 곧바로 포로가 된 것 때문인지, 원래라면 바로 수도로 들어올 랭커들도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올 계획을 짜고 있던 스미스와 화이트 나이트들도 잠잠한 상태였으니….
‘그 자식은 조용하니까 이상하게 무섭네.’
“더 잡고 바치려고 했는데, 그냥 바쳐야겠군.”
태현은 붙잡은 길드 동맹 사람들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좀 더 잡고 바치려고 했었는데….
‘이 정도면 잘츠 국왕도 믿겠지.’
숫자가 좀 적어서 공적치 포인트가 아쉬울 것 같긴 했지만, 남은 건 태현의 화술과 친밀도로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했다.
다행히 지금 잘츠 국왕은 팔론 백작이었으니….
[카르바노그가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된다고 말합니다.]
* * *
“이동하잖아?”
“…왕궁 쪽인데?”
샤이드와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감옥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다.
“샤이드 님. 제가 생각해 본 건데… 김태현이 안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김태현이 그냥 우리를 속인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길드 동맹에는 중국 플레이어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해외 플레이어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접속한 길드원이 그렇게 말하자 샤이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김태현에게는 너 같은 서양인은 알지 못하는 의리가 있다.”
“…뭔 개소리….”
길드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가 아시아인이 아니긴 했지만, 김태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릴 능력은 있었다.
길드 동맹에게 몇 번이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게 김태현 아닌가.
이번 전설 퀘스트에서 어쩌다가 길드 동맹을 좀 도와줬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네가 이해해라.”
“맞아. 샤이드 님이 원래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하고 친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번에 김태현이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 편들어준 거 봤지? 놈에게도 그런 의리가 있었던 거야.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서로 싸웠지만 기회만 되면 이렇게 협력할 수도 있었던 거지.”
“맞아. 맞아.”
다른 길드원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것 같은데….’
절벽에서 구출+다른 중국 선수들 칭찬 때문에 여기 길드원들이 이상하게 환각에 빠져 있는 기분이었다.
“저기 잘츠 국왕이다!”
[잘츠 왕국의 왕, 팔론 1세가 나타납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
[……]
[……]
귀한 신분의 NPC가 나타나면 메시지창부터 차이가 났다.
수십 개는 기본으로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것이다.
길드원들은 갇혀 있는 신세도 잊고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뭘 그렇게까지 해서 보려고 하냐? 팔론 백작 나오는 영상 있잖아.”
“에이, 옛날 영상이잖아.”
“바뀌면 얼마나 바뀐다고… 그게 그거겠지.”
물론 시큰둥한 길드원도 있었다.
초보자도 아니고 이 레벨에 와서 국왕 NPC 하나 보려고 호들갑 떠는 건 좀….
“어?”
“어어어???”
“야. 호들갑 떨지 말라니까. 그렇게 해도 안 속아.”
“아, 아니. 진짜… 진짜 이상한데?”
“…?”
결국 다른 길드원들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저게 대체…?
* * *
“웨어울프인가?”
[카르바노그가 그것보다 좀 더 많이 섞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웨어울프? 웨어베어? 웨어래빗?”
[그쯤 되면 그냥 키메라 아니냐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백작은 키메라가 되어 있었다.
정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짐승들이 섞여 있는 겉모습!
마치 늑대인간 같은 털가죽 위에 곰 같은 머리를 달고, 뒤에는 독수리 비슷한 날개에….
“백작 맞지?”
“맞을… 걸요.”
유지수도 살짝 확신이 사라진 듯 목소리에 힘이 약해졌다.
-이 모험가들은 누구인가?
팔론 1세는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은 일단 친한 척부터 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제가 기억 안 나십니까!”
-어… 미안하군. 야수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기억을 좀 잃어버렸지.
“…….”
[…….]
생각지도 못한 기억상실에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 타이럼에서 해수들을 해치운 모험가 기억 안 나십니까? 도끼도 주셨고….”
팔론 1세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부하들이 소곤거렸다.
그러자 팔론 1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외쳤다.
-기억은 안 나지만 들어보니 대단한 모험가 같군!
[팔론 1세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친밀도가 유지됩니다!]
[공적치 포인트가…]
[……]
기억을 잃은 게 오히려 잘 된 걸 수도 있었다.
태현은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자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잘츠 왕국의 수도를 노리는 도둑놈 같은 모험가들이 있다!
“…저기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 중 하나입니다.”
-뭐 이런 도둑놈에 쥐새끼들이 있나! 너무하는군! 명예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놈들! 하여간 잘츠 왕국 출신이 아닌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팔론 1세는 친절하게 결정을 내렸다.
-절벽 밖으로 던져버려라!
“잠깐. 제가 잡아온 포로인데 제게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자네가 던지려구? 그래도 되지.
“어… 천천히, 좋은 날에 던지겠습니다.”
[포로들의 권리를 허가받습니다!]
[팔론 1세의 친밀도가 조금 오릅니다!]
[……]
오가는 대화를 들은 샤이드가 안도하며 말했다.
“봤지? 내 말이 맞았잖냐. 김태현이 이번에는 배신할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을 말했지?”
‘…근데 이미 이득 볼 건 다 본 거 아닌가?’
길드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샤이드가 워낙 행복해 보여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자 태현은 슬쩍 왕관의 행방을 물었다.
“그런데 폐하. 자랑스러운 왕국의 왕관은 어디 있습니까?”
-싸우는데 왕관을 쓰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안에 있지. 내게 왕관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폐하. 그렇다면 만약 대륙의 위기를 막기 위해 왕관이 필요할 경우에는…?”
-그런 일이 있다면 왕관을 내줄 수 있겠지.
“!”
생각보다 너무 쉬운 반응에 태현은 깜짝 놀랐다.
‘뭐야, 길드 동맹 놈들 가둘 필요가 없었나??’
공적치 포인트 최대한 빠르게 쌓아서 왕궁으로 접근하려고 했는데….
-나와 1:1로 겨뤄서 이긴다면 말이야.
“…예?”
-미안하군. 이건 전통이잖나. 내가 멋대로 바꿀 수 없는 전통이지.
[카르바노그가 저 전통 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거냐고 화를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