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80화
길드 동맹 랭커, 샤이드는 이를 악물었다.
‘실수했다.’
경험 많은 랭커들은 적들의 모습만 봐도 퀘스트의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절벽 위에서 나타나서 활을 겨누는 잘츠 왕국 근위대들.
그걸 본 순간 ‘망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재촉해도 무시했어야 했는데……!’
-발각됐다고? 무시하고 시작해! 빠르게 올라가면 된다!
-뭐? 위험할 텐데….
-샤이드. 너라면 할 수 있다! 해내면 약속했던 보상의 2배를 줄 테니까! 영주 자리를 원하지 않았나!
-…….
길드 동맹은 활약한 랭커들에게 오스턴 왕국 내 도시와 성들을 하나씩 내주곤 했다.
예전에는 길드 차원에서 관리했었지만….
길드 동맹도 깨닫게 된 것이다.
랭커들한테 먹이를 주지 않으면 이들이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덕분에 샤이드 같은 랭커도 아까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잘츠 왕국 근위대가 위에서 나타나자 그런 욕심은 쏙 사라지고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잘츠 왕국 근위대가 차고 있는 장비들만 봐도 수준이 얼마나 높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마수들의 가죽들을 정제해서 만든 근위대 복장에, 용의 뼈로 만든 활.
하나하나가 무슨 보스 몬스터 수준의 장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 정도 장비라면 레벨도 어마어마할 게 분명한 상황.
“샤이드 님?? 샤이드 님, 어떻게 하죠?”
다른 길드원들이 다급히 물었지만 샤이드라고 방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절벽 기어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조준당하기 시작하면 방법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몇 번 정도는 스킬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스킬들 다 빠지고 쿨타임 돌 때 위험에 처하면 더 막막했다.
자칫하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을 수도….
“침착해라!”
“????”
갑자기 옆에서 뛰어 내려오는 그림자에, 샤이드를 포함한 길드원들은 깜짝 놀랐다.
뭐야??
“누구냐?!”
“나다. 김태현.”
“…?!?!”
김태현이 갑자기 나타나자 샤이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깜박였다.
뭐지?
죽이려고 왔나?
“날 죽여봤자 별로 나오는 아이템도 없을 거다! 난 PK도 별로 안 했고 악명도 안 높아서….”
“시끄럽고. 도와주러 왔다. 집중해!”
“…도, 도와주러 왔다고??”
죽이러 왔다고 해도 이것보단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샤이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무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샤이드 님. 함정 아닙니까??
-김태현이 우리를 왜 도와주는 거지?
-퀘스트 같이 깨고 있어서?
-같이 깨고 있다고 해서 도와준다는 게 말이 되냐? 지금 미다스 길드나 화이트 나이트 봐라. 서로 방해하려고 치열하잖냐.
-근데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잖아.
-…….
“내 말 안 듣고 있나?”
“듣, 듣고 있다.”
“그래. 집중해라. 안 듣다가 죽는 놈들까지 내가 구해줄 수는 없으니까. 먼저 잘츠 왕국 근위대는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는 쏘지 않을 거다. 괜히 쏴서 절벽 밑으로 떨어지면 숨통을 끊을 수 없으니까, 사정거리 안에서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는 생각이지.”
“그… 그렇군.”
소름 돋는 이야기긴 했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듣고 있던 샤이드는 문득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잠깐.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
“아. 집중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미, 미안하다.”
샤이드는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샤이드의 얼을 빠지게 하고 태현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놈들의 사정거리에 접근하기 전에 최대한 힘을 모으고, 들어가는 순간 멈추지 말고 빠르게 달려야 한다. 지금 흩어져 있는데 그냥 차라리 모여라.”
“뭐? 모이면 공격에 취약해질 텐데….”
“어차피 숫자 차이 많이 나서 별 의미 없어. 차라리 모여서 스킬 합치는 게 더 낫다. 커버할 때도 그게 더 간편하고.”
길드원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태현의 명령에 따랐다.
가슴 속에 한 줄기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다.
…김태현 이 자식 설마 우리 전부 죽이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다 됐냐?”
“그, 그래.”
“그러면 내 신호에 따라 움직여라. 가자!”
태현은 위에서 내려오기 전에 백작한테 물어보고 유지수한테도 물어보면서 공격 패턴을 대충 파악한 상태였다.
근위대 사정거리 알아뒀고, 쓰는 스킬들 몇 개 알아둔 이상 그 허점을 노리는 건 매우 쉬운 일.
퍼퍼퍼퍼퍼퍼펑!
-연막이다!
-이런 고블린이나 쓸 하찮은 수법을….
태현이 장치해 놓고 내려 온 폭탄들이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공격용이 아니었다.
근위대원들의 시야를 뺏기 위한 연막용!
-<회오리바람의 화살>!
-연기가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빠르게 날려 버려!
태현이 작정하고 만든 아이템답게 한 번 연기를 날린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몇십 개를 깔아 놓고 나왔으니….
‘대단하다!’
샤이드는 감탄했다.
진짜 그대로 올라가도 될까 싶었는데, 김태현은 정말로 준비를 해서 내려온 것이다.
처음부터 저렇게 상대를 제압하고 움직이는 걸 보니 벌써부터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적이었을 때는 그렇게 무시무시했는데….
아군으로 있으니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놈도 드물었다.
“포착됐다! 갖고 있는 회피 스킬 사용해!”
“알, 알겠다!”
태현의 지시에 따라 샤이드와 길드원들은 갖고 있는 회피 스킬들을 닥치는 대로 퍼부었다.
[<내리찍는 굉음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영혼 파괴의 화살>이….]
[…….]
[…….]
메시지창과 함께 시작된 화살 폭격.
레벨 높은 궁수가 퍼붓는 공격은 마법사들의 광역기 폭격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더 빠르게, 더 많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 궁수의 원거리 공격!
그걸 회피로 막아내는 길드원들 입장에서는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크으으윽……!’
‘아니, 김태현 저 자식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편하게 피하는 거지?’
힘겹게 맞아가고 피해가면서 버티는 이들 눈에, 태현은 이상할 정도로 손쉽게 돌파하고 있었다.
대체 비결이 뭐야?
“견뎌냈다!”
“이제 시작인데?”
“…어….”
[집중 사격이 시작됩니다!]
[사격의 폭풍우가….]
[화살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사격의 환영이….]
[…….]
[…….]
메시지창들과 함께 다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공격의 소나기!
길드원들의 스킬들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수가 없거나 실수 한 번 한 길드원들은 이미 화살을 맞고 저 바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김태현!! 우린 이제 더 이상 스킬이 없어!”
“알고 있다. <아키서스의 축복>!”
태현은 망설이지 않고 전체에게 버프를 걸었다.
이런 화살비를 뚫고 올라가려면 이 정도 버프는 필요했던 것이다.
‘남은 건 <아키서스의 신성 영역>하고 <아키서스의 주사위>, <아키서스의 제물> 정도인가… 제물 바치자고 하면 난리 좀 치겠지?’
태현은 남은 권능 스킬들로 여기 있는 길드원들을 데리고 올라갈 수 있기를 빌었다.
툭-
“으아아악!”
허겁지겁 올라가던 길드원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허공에서 빙글 돌다가 간신히 스킬을 써서 절벽에 매달렸지만, 일행과 거리가 확 떨어져 버렸다.
“저, 저거….”
“…날 두고 그냥 가! 어쩔 수 없지.”
길드원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탓!
“!!!”
그러나 태현은 그 길드원을 구하기 위해 밧줄을 걸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김… 김태현?!”
“빨리 붙잡아!”
자리에 있던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걸 느꼈다.
세상에 김태현이 그들을 이렇게 도와주는 날이 올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치열하게 싸웠고, 서로 길드도 달랐지만….
지금 그들은 무엇보다도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우린 지금… 같이 해내고 있는 거다!’
‘그래! 우리는 하나야!’
‘이 자식들 더 죽으면 안 되는데.’
* * *
“헉헉헉….”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아슬아슬한 위기가 찾아왔지만 태현은 직업 스킬과 컨트롤, 그리고 길드원들의 헌신으로 뚫고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해냈어……!”
“진짜 대단했다!”
길드원들은 서로 끌어안고 칭찬했다.
[어마어마한 위험 속에서 절벽을 기어오르는 데에 성공….]
[민첩이 영구적으로….]
[…….]
[…….]
따로 칭호가 뜰 정도로 대단했던 암벽 등반.
길드원들이 서로 칭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태현을 보며 말했다.
“김태현. 고맙다.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올라오지 못했을 거다!”
감동 가득한 눈빛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잘됐군. 그러면 혹시 내 부탁을 좀 들어주겠나?”
“뭐지?”
“포로가 좀 되어줬으면 좋겠군.”
“…???”
철컥!
[포로 상태로 변합니다!]
[현재 상태에서 로그아웃 될 경우….]
[…….]
[…….]
[…….]
기다리고 있던 아키서스 포병대 NPC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길드원들에게 하나둘씩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그리고 얼이 빠진 그들을 솜씨 좋게 남은 우리로 밀어 넣었다.
쾅!
“…….”
“이, 이게 대체…?”
감옥 문이 닫히고 나서야 충격에서 벗어난 길드원들은 말을 더듬으며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태현은 이미 바쁘게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근위대와 다른 귀족들에게 말을 걸러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 뒷모습에, 샤이드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다.”
“뭡니까?”
“김태현은 우릴 도와주려고 여기 안에 가둔 거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바로 포위당해서 공격 받았을 테니까. 이렇게 가두면 포로 상태가 되니까, 저기 근위대원들도 굳이 공격하지는 않지.”
“과연……!”
길드원들은 샤이드의 말에 감탄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했는데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 풀어주는 겁니까?”
“김태현이 곧 돌아와서 풀어주겠지? 일단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길드원들은 그렇게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김태현이 돌아와서 적절한 때에 그들을 풀어주리라!
-이봐. 샤이드! 잘 되어가고 있는 거 맞지?
-걱정 안 해도 된다. 절벽은 뚫었고, 계획대로 진행 중이니까.
-역시 대단하군! 그래! 믿고 있겠다! 다른 놈들에게 지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
길드 동맹 간부는 샤이드의 호언장담을 듣고 안심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성공적으로 잠입한 게 분명했던 것이다.
* * *
“으으음.”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판온 월드컵 4강전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상대가 그렇게 두려운 상대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들이 이러는 건 상대 때문이 아니었다.
“심각한 문제에요.”
“그렇지. 직접 가야 한다니.”
“…둘 다 여행 가는 걸 너무 비장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이세연은 이다비와 태현의 대화에 어이없어했다.
지금 이들이 이러는 건 4강전 때문이 아니라, 4강전 행사 때문이었다.
판온 월드컵 4강전부터는 선수들이 직접 경기장에 모여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화려하고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선수들이야 기뻐서 달려가겠지만,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그럴 시간도 아까워하는 선수들.
하물며 4강전 행사가 진행되는 곳은 해외였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중국인데.”
“…예선 탈락했는데 거기서 행사 열어도 되나?”
“시작하기 전에 잡은 일정인데 어떡하겠어….”
중국도 설마 자기네 나라 대표팀이 예선 탈락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