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78화
무심코 말하긴 했지만, 스미스의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먼저 들어간 다른 일행들한테서 퀘스트 정보까지 공유되자 태현과 이세연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왕관을? 과연 왕관을 내줄까?”
“그럴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고 보고, 훔칠 생각부터 해야지.”
“다른 사람들 데리고 가는 게 낫겠네….”
이런 퀘스트라면 다른 랭커들의 도움을 받는 게 차라리 나았다.
무엇보다….
“걸렸을 때 같이 나눠서 뒷감당하는 게 좋겠지?”
“바로 그거야.”
고통도 같이 나누면 좀 나아지기 마련.
만약 일이 잘못 풀려서 잘츠 왕국에게 어그로가 끌린다 하더라도, 태현 대신 책임질 이들이 셋이나 된다면 좀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퀘스트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있는 그대로.”
“…정말?”
이세연은 태현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여럿이서 대규모로 같이 깨는 퀘스트에서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물론 이 구성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깨는 건 좋지 않았다.
남들 몰래 퀘스트 깨고 있었다고 말하면….
“말이야 뭐 어떻게 포장하기에 따라 다른 거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네 말을 잘 믿어줄까?”
“음….”
이세연의 걱정도 타당했다.
여기 있는 초대형 길드들은 좋은 말도 나쁜 뜻으로 해석할 능력이 있는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태현의 전적이 너무 심하기도 했고….
“근데 이번에는 괜찮을걸.”
“??”
* * *
태현의 장담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오르기돈 이대로 못 잡을 거 같아서 다른 일행 보내서 방법 찾았다. 잘츠 왕국 쪽에 퀘스트 깨야 한다는데….
이런 태현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납득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바로 이동해서 퀘스트 깰 준비를 하겠다.”
“우리 쪽도 랭커를 보내지.”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세연은 이 반응들에 매우 놀랐다.
왜지?
“그야 길드 동맹은 지금 내 눈치를 조금 보고 있는 상태고….”
미다스나 스미스가 워낙 길드 동맹을 손잡고 구박하고 있는 상황이라, 길드 동맹은 자연스럽게 태현 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태현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트집을 잡을 리는 없는 것이다.
“다른 둘은?”
“걔네한테는 길드 동맹이 깨던 퀘스트 먼저 선수쳤다고 말했어.”
“그걸 믿었다고?”
조금만 찾아보고 이야기를 맞춰보면 거짓말인 게 금세 들통 날 수준.
그러나 태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 마. 사이 워낙 안 좋아서 확인할 생각도 안 할 테니까.”
어그로를 끌어볼 대로 끌어본 태현은 이런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알았다.
태현이 오스턴 왕국에서 날뛰던 때, 길드 동맹에 가서 ‘XX 시 물자 창고에서 도난 일어났는데 김태현이 왔다간 거 아닐까요? 물론 같은 시간에 YY 성에서 김태현이 보이긴 했지만…’ 하면 길드 동맹은 의심도 하지 않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김태현 놈!’ 하고 믿었던 것이다.
한 번 미운 놈은 쉽게 풀리지 않는 법.
“그래서, 왕관은 어떻게 구할 생각이야?”
“그게 나도 고민이긴 해. 잘못 건드렸다가는 귀찮아지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왕관을 손에 얻으려면 여러 방법이 있었다.
정공법부터 시작해서 설득까지.
문제는 한 번 실수하면 난이도가 대폭 뛴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리스크가 낮은 건 설득이었지만, 설득도 한 번 실패하면 누군가 왕관을 노리고 있다는 걸 상대한테 알려주는 셈이 됐고….
“잘츠 왕국 쪽에 친분이 있어?”
“잘츠 왕국에서 시작했지. 나온지는 좀 됐지만. 흠… 그냥 설득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왕궁에 접근할 방법이 하나 떠오르긴 했는데.”
“뭔데?”
“쟤네들이 시도하면 그거 밀고한 다음에 포상으로 왕궁에 들어가자.”
“…….”
* * *
쟁쟁한 랭커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츠 왕국에 대한 정보는 꽤 부족한 편이었다.
“잘츠 왕국에서 퀘스트 깬 놈들이 이렇게 없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 올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각 길드는 급히 정보를 모아가며 벼락치기 공부에 나섰다.
그러면 그럴수록 알게 되는 잘츠 왕국의 무서움.
…대체 왜 플레이어들이 여기서 퀘스트를 깨는 거지?
“이해가 안 갑니다. 왜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여기를?”
“차라리 세금 좀 많이 내더라도 오스턴 왕국으로 내려오는 게 낫지 않나?”
“쉿. 이 사람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야. 그렇게 크게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고.”
미다스 길드의 마법사 랭커들도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
태현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맞는 말이어서 가슴이 더 아팠다.
“저 인간들이 한번씩 잘츠 왕국에서 좀 지내면 좋겠네요.”
“음.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태현은 유지수의 말에 동의했다.
잘츠 왕국의 맛도 모르는 놈들이 어디서!
그런 불평에도 불구하고, 각 길드들은 계획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만약 오르기돈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화살이 있다면 다른 세력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다른 놈들이 가져가서 낼름 레이드를 끝내버리면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겠는가.
“봐라. 잘츠 왕국의 수도인 리베라 시는 절벽 위에 위치한 도시다. 입장 허가를 받지 않으면 외부인은 못 들어가는 형태지.”
산악 왕국인 잘츠 왕국.
그중에서도 수도인 리베라 시는 가장 험준하고 깊은 곳에 위치했다.
어떤 적들이 몰려와도 천연의 성벽 역할을 하는 자연지형을 보면 기가 죽을 수준!
그런 만큼 이 절벽도시로 들어가려면 좁고 길게 난 통로를 구불구불 올라가 입장 허가를 받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올라간 다음에는 삼엄한 잘츠 왕국 근위대의 감시를 뚫고 왕궁 안으로 들어가 왕관을 갖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딱 봐도 난이도가 매우 높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런 것에 겁먹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길드 동맹이 택한 방법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뛰어난 도적 랭커들을 필두로 야밤을 틈타 까마득한 절벽 위를 기어오르고, 미리 구해 온 지도들로 왕궁 정보를 최대한 파악한 다음 왕궁 안에 침투!
성공만 한다면 잘츠 왕국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넘어갈 것이다.
“핵심은 다른 놈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거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서 출발시키겠습니다.”
“그래. 다른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먼저 끝내야 해. 김태현 놈도 예상하지 못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김태현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길드 동맹 간부들은 김태현이 퀘스트 정보를 공유한 것을 비웃었다.
이번에는 김태현의 실수가 분명했다.
이런 퀘스트 정보를 공유하다니!
길드 동맹이었다면 자기들이 먼저 깨고 화살 얻은 다음 발표했을 것이다.
그래야 그걸 무기 삼아 다른 놈들을 휘두를 것 아닌가.
“변신 마법으로 산 입구의 검문을 통과한 다음 통로를 걸어올라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나쁘지 않군.”
미다스 길드는 마법을 통한 속임수를 선택했다.
강력한 변신 마법으로 정체를 속인 다음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도시 안으로 들어간 다음, 여기 알려진 귀족 NPC들 중 한 명을 어떻게든 포섭해서 그자로 변신합시다.”
“길드 동맹은 아마 정공법으로 갈 거 같은데, 놈들이 소란을 일으킬 때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자고.”
마지막으로 스미스와 화이트 나이트는….
“공중으로 침투하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여기 잘츠 왕국은 궁수들의 왕국인 데다가, 도시를 보면 공중 침입에 엄청나게 방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대신 왕궁으로 한 번에 떨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격을 받는 동안은 스킬로 버티고, 왕궁에 떨어진 다음 빠르게 챙기고 나오는 겁니다.”
“역시…! 스미스 님이십니다!”
태현이 있었다면 ‘이런 미친놈들’이라고 했겠지만, 화이트 나이트 친위대에서는 스미스를 막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각자의 흉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사이.
태현 일행은 도시 아래 입구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아탈리 왕국에서 왔는데… 입장 가능한가?”
[현재 명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탈리 왕국의 국왕…]
[……]
[……]
[타이럼 시에서…]
[입장 허가를 받습니다!]
-아! 예! 어서 들어오시지요!
아무리 그래도 국왕 작위가 있는데 입장 허가도 받지 못할 리는 없었다.
다른 길드도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
괜히 정체 밝히고 들어갔다가 문제 생기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잘츠 왕국 쪽에서 눈 뒤집혀서 오스턴 왕국으로 쫓아오기라도 하면….
하지만 태현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 걸리면 그만이고, 또….’
대신 누명 써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 * *
“헉헉….”
[<절벽의 통로>를 오릅니다.]
[체력이 영구적으로 1 오릅니다!]
까마득한 절벽을 올라가기 위해 가파르게 나 있는 길들.
수없이 많은 계단들을 하나씩 밟다보면 없던 체력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이요. 왼쪽은 벌 받는 사람이나 풋내기들 속이려고 일부러 길게 만들어 놓은 곳이거든요.”
유지수의 말에 일행은 경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왕국 수도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유지수는 이 정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왕국 수도가 공격 대비해서 좀 철저하게 지어진 편이니까, 이것 갖고 놀라시면 안 될 걸요.”
“그… 그래.”
일행은 놀라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올라갔다.
[잘츠 왕국의 수도, 리베라 시에 도착합니다!]
[명성이…]
[……]
[……]
산맥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한 절벽도시!
그 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화려했다.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수도인 만큼 제법 시설들이 괜찮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른 왕국에 비하면 좀 많이 없어 보이긴 한다.’
솔직히 왕국 수도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느낌이 나긴 했다.
돌아다니는 NPC들도 호화롭게 차려입은 귀족보다는, 이제 막 사냥에서 돌아온 거친 사냥꾼들이 많이 보일 정도.
잘츠 왕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거친 전사에 사냥꾼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태현은 놀라지 않았다.
“이대로 왕궁에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자.”
인사한 다음에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아앗…! 아키서스의 힘으로 미래가 보인다! 지금 이 왕궁을 노리는 도둑놈들이 있군!
[카르바노그가 정말 감탄합니다.]
아키서스식 예언.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예언한 다음 그 미래를 직접 만드는 수준!
상대는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공주 전하!!
“?”
“???”
태현 일행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웬 덩치 큰 귀족 하나가 이쪽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중에 공주 있나?”
“없죠?”
“잘츠 왕국의 공주를 찾는 건가…?”
그러나 아니었다.
잘츠 왕국의 귀족은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오더니 낭티오네를 보며 외쳤다.
-공주 전하! 대체 왜 이런 꼴을 하고 계신 겁니까!
-키잇?
귀족은 놀라서 입을 벙긋거리다가, 옆에 있는 우리에 익숙한 다른 얼굴이 있는 걸 발견했다.
-공주 전하!??! 대체 왜 거기에!?
-여기 재밌는데….
-캬오오.
같이 있던 불불이가 그걸 증명하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물론 귀족한테 별로 설득력이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짓을! 너무한 거 아니오!
“진정해라. 여기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태현은 흥분한 귀족을 일단 말렸다.
[카르바노그가 무슨 이유를 말할 거냐고 궁금해합니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