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64화
가능한 버프란 버프는 다 받았지만, 태현은 사실 좀 불안했다.
‘이걸로 될까?’
아무리 태현이라고 하더라도 검술 스킬이 봉인된 상태로 싸우는 건 또 처음이었던 것이다.
한쪽 팔을 묶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
“슬슬 움직입니까?”
“음.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준비했던 다른 레시피들도 꺼내야겠군.”
“…그, 그건 부족할 경우 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태현의 말에 반박한 적 없는 류태수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반박하는 말이 나왔다.
솔직히 배가 너무 불렀던 것이다.
버프를 받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자 그냥 싸우고 싶었다.
‘지금도 버프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야. 상대를 얕보면 안 되지.”
“끄으윽.”
* * *
-한국 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괜찮을까요? 이미 상대 팀은 위치를 다 잡았는데, 너무 불리한 것 아닌지….
-아닙니다. 사실, 독일 선수들은 황당하고 불안할 겁니다. 한국 선수들이 보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예. 원래 일이 너무 잘 풀려도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한국 선수들은 변칙적인 플레이에 능한 선수들 아닙니까. 그에 비해 독일 선수들은 정석 그 자체고….
캐스터, 육병완의 말은 사실이었다.
독일 선수들은 먼저 와서 차근차근 진지를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했다.
“대체 뭐지?”
“우리가 잘못 온 것 아닌가?”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은 하지 말라고.”
원래라면 한국 선수들이 보여야 하는데,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자 독일 선수들은 오히려 초조해졌다.
안 그래도 변칙적인 플레이로 악명 높은 한국 선수들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꾸미는 거지?’
“매티아스.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 정말로?”
“지금이라도 한 명 나가서 정찰을 해보는 게 어때?”
“아니야.”
주장을 맡은 매티아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걸 노리는 걸 수도 있다. 그런 거에 넘어갈 수는 없어.”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면 곤란하잖아.”
“이세연을 내세워서 언데드 군대를 만들어 오려는 건가?”
“투기장에서 언데드 소환해 봤자 한계가 명확하다고 이미 분석했잖나. 쓸 만한 언데드 군대가 만들어 질 정도면 경기 끝날 거다.”
“그렇긴 한데….”
웅성거리는 독일 선수들.
차라리 한국 선수들이 나와서 싸워주기라도 하면 불안감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들은 뛰어난 감독과 훌륭한 분석 시스템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경기를 대비한 이들.
파트별로 나눠진 코치들이 각자 맡은 분야를 전문적으로 분석해서 스킬 콤보, 공격 패턴, 전략 전술 등을 추천해 주고 상대 팀의 약점을 하나하나 알려줬다.
아직도 한국의 많은 게임단들이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는 걸 생각해 봤을 때, 이런 첨단 시스템은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이었다.
그런 시스템 아래에서 몇백 번이고 넘게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연습을 해온 독일 선수들!
선수 한 명 한 명의 피지컬은 다른 나라의 선수들에 비해 밀릴 수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건 1:1이 아니라 5:5.
선수 한 명 한 명은 밀리더라도 팀으로서의 완성도만 높다면 이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왔다!!!”
“!”
저 멀리서 나타난 한국 선수들의 모습에, 독일 선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냥 늦게 나타난 건가?”
“내분이 일어난 걸 수도 있어. 한국 선수들도 사람이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보냐? 저 정도 되는 선수들이 내분을 일으키는 게?”
“스타 선수들만 있으니까 오히려 내분을 일으킬 수 있지!”
이름값이 어마어마한 선수들은 오히려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쉽게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한국대표팀은 서로 문제가 생길 이유가 충분했다.
“다들 집중해라! 온다!”
“…언, 언데드 군대다!”
예상 외로 많은 언데드들 숫자에 독일 선수들은 당황했다.
레벨도 제한 걸리고 장비도 제한 걸리고 시간도 제한 걸릴 텐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언데드들을 동원했지?
마법사가 두 명인가?
“버프 걸어. 연습한 대로만 한다.”
“알겠다!”
눈부신 빛과 함께 독일 선수들도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선 탱커 둘은 옆으로 방패를 길게 치며 태현을 우선적으로 견제!
태현 같은 플레이어가 안쪽으로 한 번 파고들기 시작하면 이제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독일대표팀은 그래서 태현의 발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을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태현이 파고드는 순간,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탱커부터 시작해서 뒤에 다른 선수들까지 스킬을 연계시켜 카운터를 칠 계획이었던 것이다.
“저번처럼 안 들어오진 않겠지?”
“그건 특이한 케이스였다. 영국 놈들처럼 그러진 않을 거다.”
독일 선수들은 다짐하듯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김태현!
얼마든지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키서스의 냉기 폭풍!
[아키서스의 냉기 폭풍이 시전됩니다!]
[행운으로 인해 위력이 증가합니다!]
[추가 효과가…]
“!?!?”
쩌저저저적!
놀랍게도 공격을 시작한 건 마법, 그것도 김태현의 마법이었다.
김태현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술 스킬을 보조하는 용도였다.
상대의 시선을 뺏거나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였지 주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당황하지 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마법은 그 위력이 높았지만 MP가 많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김태현처럼 마법사 직업이 아닌 사람이 마법을 쓰면 더더욱 불리할 것이다.
기껏해야 두세 방 쓰면 쓸 수 없을 터.
“버텨, 구스타프!”
“알고 있다!”
“안나! 위치 유지해!”
-아키서스의 냉기 폭풍! 아키서스의 냉기 폭풍!
그러나 태현은 뭐라도 잘못 먹었는지 멈추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냉기 폭풍이 치며 주변을 휩쓸고 조금씩 선수들을 좀먹어갔다.
[냉기 폭풍으로 인해 이동 속도가…]
[공격 속도가…]
그러는 사이 이세연은 언데드들을 옆으로 우회시켜서 점점 포위망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꿀꺽꿀꺽-
태현은 옆에 만들어 놓은 정령수를 빠르게 마셨다.
요리 스킬로 만든 아이템으로, 마시면 MP를 회복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달콤한 고원의 쿠키>로 인해 마법을 시전할 때마다 일정 확률로 MP가 회복…]
[<팔팔 끓는 바윗돌 수프>로 인해 마법의 위력이…]
[……]
[……]
‘오. 나쁘지 않군.’
태현은 안심했다.
몇 번이고 확인해 본 버프들이었지만, 실제로 그 위력을 알려면 상대 선수들한테 써봐야 알 수 있었다.
지금 독일 선수들한테 들어가는 마법들을 보면 버프들의 위력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한 방 한 방 들어갈 때마다 움찔하는 게 보일 정도!
독일대표팀이 소극적으로 버티는 탓에 일방적으로 경기가 흘러가자, 보고 있던 팬들은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냐?!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앞으로 달려들어서 붙어야지!
-멍청한 놈들 같으니. 한국대표팀은 근접전에 능해. 차라리 이렇게 버티면서 MP를 낭비시키는 게 좋은 전략이지.
-좋은 전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언데드들이 주변 포위하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안 싸우면 그대로 무너진다!
-아무리 이세연 선수라 하더라도 급하게 소환한 언데드 레벨은 얼마 안 돼. 버티는 게 맞다니까.
-지금 저 마법 위력 안 보이나? 저게 버틸 수 있다고 보여?
-김태현 마법이라고 해봤자 그리 강하지 않을 거야. 버티는 게 맞지.
-아, 다른 건 모르겠고!! 독일 놈들은 대체 왜 맞고만 있는 건데!! 움직이라고!! 너희한테 돈 걸었다고!!
-방금 말한 놈 한국인 아닌가? 한국인인데 독일한테 돈을 걸었다고?
-한국인들은 좀 미친 것 같아.
-그러게. 나는 독일인이어도 한국 팀에 돈을 걸었는데 말이지.
팬들과 달리 해설자들은 눈치가 좀 더 빨랐다.
그들은 지금 경기가 팽팽하지 않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놀랍게도 경기가 이미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 초반이고 싸움 한 번 없었는데도!
-지금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원래 저렇게 마법을 연타할 수도 없을뿐더러, 저렇게 심하게 흔들리면 안 되는 겁니다. 위험합니다! 이거!
그렇게 평소에 팽팽한 경기 해설을 주장하며 무슨 상황이든 5:5를 외치던 육병완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옆에 있던 다른 해설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음의 버프 차이가 생각보다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 팀이 허점을 정확히 찔렀어요. 독일 선수들이 먼저 달려들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 겁니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활용한 거죠!
워낙 한국 팀의 이미지가 무시무시한 탓에, 상대하는 선수들은 소극적으로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었다.
하물며 독일 선수들은 그런 점에서 좀 더 보수적인 이들.
그걸 이용해서 한국 대표팀은 닥치는 대로 버프를 준비했다.
물론 이건 시간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었다.
각자 갖고 있는 버프 스킬들은 몇 개 안 됐고, 그거 거는 것도 다 MP 소모였으니까.
이건 오로지….
-제작 직업! 제작 직업만이 가능한 전략입니다. 김태현 선수가 갖고 있는 제작 스킬들이 여기서 빛을 보고 있군요! 요리사 플레이어 분들, 보고 계십니까?? 이게 요리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경기는 뒤집기 힘들어 보입니다!
동료의 말에 정신을 차린 육병완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물론 지금 독일 선수들이 많이 몰리고 있긴 합니다! 일방적으로 맞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대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기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언데드들이 포위하고 있는데도요?
-이세연 선수의 언데드들은 투기장에서 아무래도 좀 불리하잖습니까.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냉기 폭풍 때문에 장비가 얼어붙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도요?
-남아 있는 버프들이 있으니 싸움이 시작하면 그걸 극복하고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독일대표팀의 숨겨진 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독일 선수 한 명이 견디다 못해 앞으로 달려 나오다가 그대로 두들겨 맞고 있습니다. 한 명이 줄었는데 이쯤이면…?
-그래도 아직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쯤되자 감탄했다.
저 한국인 캐스터가 뭐하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뚝심 하나는 대단했던 것이다.
어떻게 지금 저 경기를 보고 ‘아직 모른다’고 할 수 있지?
한국대표팀은 슬슬 이쪽이 유리해진 것 같자 본색을 드러냈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
류태수와 류다영은 싸우면서 스펙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서 놀랐다.
‘버프 차이인가!?’
애처로울 정도로 두들겨 맞고 박살 나는 독일 선수들.
그 모습을 보며 육병완은 정말 몰랐다는 듯이 실감나게 외쳤다.
-누가 이길지 몰랐던 팽팽한 경기를 제압하는 건 한국 선수들! 한국 선수들입니다!! 정말 끝날 때까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경기였습니다!!
-…….
옆에 있던 동료 해설자는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듣고 있는 스스로의 얼굴이 좀 화끈거렸던 것이다.
* * *
“내가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잘츠 왕국은 진짜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보통 대형 연계 퀘스트를 깨다 보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훼방이 있기 마련인데, 잘츠 왕국은 놀랍게도 그런 훼방이 없었다.
-약한 모험가들은 이 잘츠 왕국에 오지 못하는 거지. 우리는 강하게 키우는….
“다들 닥쳐 좀.”
유지수는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드디어 <아키서스의 활잡이>에 관한 대형 퀘스트의 끝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