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58화
-사디크의 신앙이 대륙에서 약해졌다는 말을 다른 정령들에게서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으핫핫!
타프리오트는 껄껄대며 웃었다.
이세연은 자신도 모르게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현은 시선을 피했다.
‘딱히 내 잘못은 아니지.’
[카르바노그가 동의합니다. 사디크 놈들의 자업자득쯤….]
‘그보다 화염의 정령왕은 사디크 놈하고 왜 친한 거지?’
태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방금은 둘이 친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거였지만, 잘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카르바노그가 사디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사디크가 대륙에서는 힘을 못 쓴다지만 그래도 화염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쯤 되면 화염의 정령왕과 친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긴 그런가?’
태현은 살짝 억울해졌다.
사디크도 화염의 정령왕 같은 우군이 있는데 아키서스는….
행운의 정령왕 없나?
[카르바노그가 그런 우군들을 전부 다 아키서스가 써먹….]
“이렇게 무사하셔서 기쁩니다.”
카르바노그의 말은 잘라버리고, 태현은 일단 해야 할 말을 진행했다.
“사악한 드워프 놈들이 타프리오트 님을 가둬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역시! 사디크의 화신답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군 그래! 크하하!
“……?”
[……?]
좀 황당하긴 했지만 태현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일단 타프리오트를 잘 구슬려서 보상만 받아낼 수 있으면 별 상관없었으니까.
뭐든 간에 내놓기만 하면….
정령왕은 다행히 태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령왕으로서 명예와 긍지를 지키기 위해, 날 구해준 사디크의 화신이 원하는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
[정령들은 종족들 중 가장 은혜를 잘 지키는 종족들입니다.]
[화염의 정령왕, 타프리오트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지나치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가는 정령의 분노를 살 수도 있습니다.]
‘역시 소원 100개는 안 되는 거였군.’
[카르바노그가 그 짧은 사이에 그걸 떠올린 화신의 양심에 감탄합니다.]
‘뭐 크게 기대도 안 했다.’
그게 되면 정령왕이 아니라 호구왕이었을 것이다.
태현은 지금 가장 급한 걸 말했다.
“여기 있는 사악한 드워프들과 다크 엘프들이 대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타프리오트 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태현을 도와 적들을 날려 버리는 것.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타프리오트는 난색을 표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다! 저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것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다. 곧 정령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저들의 강함은 만만치 않다!
기습을 당하고 얻어맞긴 했지만 아직 다크 엘프들과 드워프들의 전력은 많이 남아 있었다.
봉인된 제단에서 풀려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정령계로 돌아가야 하는 타프리오트가 이들과 전부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음… 그렇습니까?”
태현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저러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민하던 태현은 생각을 바꿨다.
“아키서스의 골짜기가 있는데, 그 땅에 깃드시는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정령이 깃든 땅.
정령 관련 퀘스트를 깨고, 친밀도와 공적치 포인트를 크게 쌓으면 가끔 정령이 땅에 내려와 깃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경우 그 땅은 정령 관련된 보너스와 각종 퀘스트들이 추가되는 정령이 깃든 땅이 됐다.
게다가 드문 확률로 정령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도 있었으니, 나름 대단한 축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령이 자신을 쪼개서 그 땅에 깃들어야 했다.
정령도 나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단에서 구출해 줬는데 이 정도는….
-…아키서스의 골짜기?
“예.”
-음. 드워프들이랑 다크 엘프들 숫자 몇 명이라고 했지? 그냥 쓸어버리는 걸 도와주겠다!
“…….”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보다 못한 이세연이 태현의 등을 토닥여줄 정도였다.
* * *
후우우우웁!
타프리오트는 마치 거인처럼 몸을 부풀렸다. 허공에 떠오른 화염의 정령왕은 타오르는 눈길로 드워프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이 나를 가두다니!
쾅! 쾅! 쾅! 쾅!
[타프리오트가 정령왕의 파염권을 사용합니다!]
[지독한 열기가 피어오릅니다! 주의하십시오!]
타프리오트가 연달아 주먹을 날릴 때마다 태현이 폭탄 수십 개를 터뜨린 것처럼 요란한 효과음이 터져 나왔다.
위로 솟구치는 불기둥에 태현 일행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정령왕인가!
‘저렇게 보니까 더 아까워지는데.’
저걸 영지에 잘 가뒀으면….
[카르바노그가 그냥 포기하자고 말합니다.]
-캬오오?
[<아키서스의 성장>으로 인해 불불이가 <정령왕의 파염권>을 배웁니다!]
[불불이가 희박한 확률로 <정령왕의 파염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오…!”
태현은 감탄했다.
이런 보너스가 있을 줄이야.
“그래. 불불아. 저런 걸 배우는 건 좋지. 사디크의 화염 같은 이상한 스킬 말고.”
-캬오오오!
[불불이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불불이가 <사디크의 화염탄>을 사용합니다!]
펑!
어느새 덩치가 커진 불불이는 자기가 싸움에 나서고 싶어했다.
흑흑이 등 위에 타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사디크의 화염탄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묵직한 화염 덩어리들이 날아가 드워프 전사들 위로 작렬!
흑흑이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 빨간 드래곤 놈아! 쏘기 전에 말을 해야지!
-캬오?
-캬오는 무슨! 이제 슬슬 말 알아들을 때 됐으면서!
-너무 그러지 마라. 흑흑이여. 어린 드래곤을 돌보는 건 우리 종족의 의무….
-아니! 네가 업던가! 이 자식이 어딜 봐서 어린 드래곤이야!
흑흑이는 억울해서 씩씩댔다.
최근 불불이의 덩치가 커진 탓에 업고 날아야 하는 흑흑이가 더 힘들어진 것이다.
“불불아. 사디크의 화염 같은 스킬 쓰지 말고 저 정령왕의 스킬 같은 거 쓰라니까!”
-캬오오?
그러나 태현이 아무리 말해봤자 랜덤으로 나가는 스킬을 불불이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애꿎은 화살은 흑흑이에게로 날아갔다.
“흑흑이가 자꾸 사디크 관련 스킬 써서 불불이가 그거 보고 배우는 거 아닌가?”
태현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흑흑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제가 사디크 관련 스킬을 쓰면 얼마나 썼다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덩치도 산만 한 레드 드래곤 업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알겠어. 알겠어. 울지 마.”
태현은 흑흑이를 달랬다. 블랙 드래곤이 우는 모습 같은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옆에서 언데드 부리고 있던 이세연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펫이랑 사이가 좋네?”
“이게 잘 노는 걸로 보여?”
“그 정도면 좋은 편이지….”
태현의 펫들처럼 레벨 높고 잘 싸우는 펫들은 보기 드문 편이었다.
오죽하면 게시판에서 펫 관련 직업들이 ‘김태현 펫 뭐임? 어디서 구할 수 있음? 아키서스 믿으면 주나??’ 같은 질문들을 하고 있을까.
그 밑에 보면 ‘네! 아키서스 교단 가입해서 다이아 등급을 찍으면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있긴 했지만, 이다비한테 물어보니 틀린 정보인 모양이었다.
“내 언데드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싸우거든.”
이세연은 언데드 군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그때 필요한 언데드들만 소환해서 자폭으로 꼬라박는 태현과 달리, 이세연은 정석적인 네크로맨서였다.
필요에 따라 잡몹 숫자를 확 늘릴 때도 있긴 했지만 보통은 한 번 강한 언데드를 소환하면 그 언데드를 꾸준히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세연의 언데드 군단을 보면 그 강하다는 데스 나이트에서 더 진화한 둠 나이트나 어비스 나이트들이 여럿 있었다.
거기에 본 드래곤이나 좀비 드래곤 같은 탈것들까지 치면 강한 언데드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언데드들은 힘이 강해지면 그만큼 자아도 강해지는 이들.
즉….
-주인님! 제가 더 강한데 왜 저놈에게만 선봉을 맡기십니까!
-넌 궁수잖…?
-궁수여도 선봉을 맡을 수 있습니다! 궁수라고 차별하시는 겁니까!?
-아니….
-하하! 어디서 패배자 놈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꼬우면 활이 아니라 창을 들었어야지!
-이 자식이 감히!
…같은 식으로 서로 미친 듯이 싸우는 것이다.
이세연이 언데드들한테 폭탄 안 달려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싸우는 언데드들은 자폭시킨다고 하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그리고 언데드 자폭시키면 손해가 얼마나 심한데.”
“여러분!! 앞에 좀 봐주십시오! 앞에!”
둘의 한가한 대화에 류태수가 기겁하며 앞을 가리켰다.
분노한 드워프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어떤 미친놈들이 감히 정령왕이 봉인된 제단을 망가뜨려!?
-사디크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뭐!!? 그놈들 멸망한 게 아니었나??
타락한 드워프 전사들은 허겁지겁 진형을 갖추고 달려들었다.
정령왕을 봉인시킨 제단은 타락한 드워프들한테 매우 중요한 제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제단이 기습당하다니!
-다크 엘프 놈들의 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우리를 방패로 쓰고 있어! 우리의 피만 흘리고 있지 않나!
드워프 전사들이 씩씩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크 엘프들과 연합을 맺었으면 서로 같이 싸워야 하는 법.
그런데 다크 엘프들은 지금 자기네들 일에 집중하느라 지원을 전혀 와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다크 엘프들이 지금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가 기습을 당해서 그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드워프들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정령왕 놈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마법 대포를 갖고 와라!
타락한 드워프들은 이를 갈며 포위망을 준비했다.
드워프 전사들이 여럿 쓰러졌지만 아직도 많은 전사들이 남아 있었다.
건방진 네크로맨서들 정도는 충분히….
[타프리오트가 정령왕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대단하군.”
태현은 감탄하며 정령왕의 뒤를 쫓았다.
정령왕이 한 번 숨결을 내뿜자 주변이 전부 녹아내리면서 길이 열렸다.
그렇게 단단하던 드워프 전사들도 ‘앗’하는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저 화력이 탐이 날 정도!
-으윽… 역시! 여기 있는 적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다. 정령계로 돌아가기 전에 저들을 전부….
“아닙니다! 힘내십시오!”
-아니… 힘을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잘 들어봐라!
“할 수 있습니다!”
[최고급 전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영혼 착취>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정령왕이 대륙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고맙다!
정령왕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거칠어진 기분이었지만,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정령왕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공격 방어 모두 혼자 맡고서 탱크처럼 드워프 진영을 돌파하고 있는 정령왕.
덕분에 지금 태현 일행은 거의 날로 먹듯이 드워프들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 버텨야 한다!
* * *
-감히 우리에게 사악한 기습을 해!? 명예가 뭔지도 모르느냐?
-행운의 힘에 따르면 너희들한테는 비열한 기습을 해도 된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놈들의 말에 휘말리지 마라! 넘어가지 말란 말이다!
-예!
사원에 들어간 다크 엘프들은 놀랍게도 기습을 버텨내고 어떻게든 탈출로를 뚫었다.
대마법사들이 닥치는 대로 마법을 갈겨대고, 밖에 있던 다크 엘프들도 지원을 와준 덕분이었다.
바스토스와 길드원들도 정말 운이 좋았다. 간신히 사이에 끼어서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달려! 저쪽으로 달려!!”
“그런데 저기 왜 불타고 있습니까??”
“몰라! 드워프들이 뭐 만들고 있나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