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56화
사실 이세연도 태현이 왜 저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다른 플레이어들의 분위기와 달리 퀘스트가 상당히 위험하긴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싸웠는데도 적들의 숫자는 아직도 까마득하게 많았고, 태현의 기습도 다음에는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 번씩 막아낼수록 적들이 오히려 강해지는 상황.
진지하게 전사들 데리고 이 사원 빠져나가는 해결방식도 고민해 볼 만했다.
…물론 절대 그냥 빠져나가진 않을 테니 태현이 설득에 나서야겠지만.
“그런데 그런 설득이 가능한… 겁니까?”
류다영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이세연에게 물었다.
고대 제국 전사들이 그런 설득이 통할 상대처럼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김태현은 할 수 있을걸.”
“…….”
류다영은 속으로 ‘너무 기대가 과한 거 아니신가’ 싶었지만 말하진 않았다.
이세연인 만큼 무슨 근거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세연도 딱히 근거는 없었다. 그냥 믿는 거였지.
“나도 후퇴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후퇴하면 안 된다니까!”
“끝까지 버텨야 해요!”
“…말 좀 끝까지 들어. 이 욕망의 항아리들아.”
이세연의 말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플레이어들 분위기 봤을 때 지금 후퇴하자고 하면 순순히 안 들을 게 분명해.”
아무리 태현이나 이세연의 이름값이 높다고 해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멍청하고 더 탐욕스러웠다.
지금도 당장 태현이나 이다비도 버티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플레이어들도 퀘스트 분위기가 좋은데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응? 그건 별 상관없지 않나? 자기들이 알아서 남겠다는데.”
“사람들한테는 우리들이 주도한 퀘스트로 인상이 남아 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빠지고 다른 사람들이 남아 있다가 피해 크게 입으면 아무래도 좋은 이미지는 아니지.”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너 빼고는 다 신경 쓰고 있어….”
이세연은 손끝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태현이 이상한 거였지 보통 다른 선수들은 다 이미지 관리를 어느 정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판온에서 랭커로 살 때는 그냥 자기 개인 방송 켜고 온갖 개짓거리를 해도 됐다.
남 PK를 하던 남의 마을에 불을 지르던, 욕은 좀 먹겠지만 어차피 욕하는 사람들이 돈을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방송은 그런 방송대로 수요가 있었고 또 게임 내에서도 짭짤했다.
그에 비해 게임단 선수로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관리가 필요했다.
자기 개인 방송 보는 소수의 팬들이 아닌, 전 세계의 거대한 팬들을 상대로 활동해야 하는 상황.
평소에 초보들 상대로 PK 즐겨 하던 놈이면 PK 자제해야 했고, 초보들 던전 데리고 가서 엿먹이는 게 취미인 놈이면 그런 짓을 멈춰야 했으며….
“그런데 그쯤이면 보통 게임단 들어가기 전에 컷되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요즘 게임단들 선수 구하기 힘들어서 실력 괜찮으면 어떻게든 넣으려고 하더라. 너 도동수 기억나?”
“누구더라?”
“…그때 우리 판온 대회 나갈 때 같은 팀에서 트롤링했던 새끼.”
이세연도 도동수에 대한 기억이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태현의 반응은 없던 불쌍함을 생기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아아! 걔!”
“그래. 걔. 다들 게임단 못 들어간다고 말했지만 중국 쪽에서 제안 들어왔잖아.”
“그러면 이미지 관리랑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니. 도동수처럼 너한테는 잊혀지고 국내 팬들한테는 욕먹는 한심한 처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미지 관리가 필수적이란 뜻이 되겠지.”
“예시가 너무 무섭잖아.”
“태현 님은 이미지 관리 잘 하고 계세요.”
이다비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팀 KL에서 이미지 관리 제일 걱정되는 건 케인이었고 그 반대가 태현이었다.
솔직히 태현은 무슨 짓을 해도….
“어쨌든, 이렇게 남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야. 방법이 문제지만.”
“다크 엘프 대마법사들이 몇 명이나 있는 건지 모르겠어. 한 스무 명은 넘나? 이제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겁을 할 텐데.”
다크 엘프 대마법사 몇 명을 자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한 번 당할 때마다 [악명 오릅니다!] [경계심 심해집니다!] [다크 엘프들이 당신만 보면 먹던 수프 그릇을 집어 던지고 달려듭니다!] 같은 메시지창이 떠오르니….
“혹시 뭐 좋은 방법 없나?”
태현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전사장에게 물었다.
나름 여기 사원을 관리하는 자였고, 여기 있는 전사들을 이끄는 리더 아닌가.
무언가 기똥찬 아이디어를 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세연은 당황한 목소리로 태현에게 말했다.
-거인 종족한테 그런 거 기대하기 힘들지 않아?
-이세연. 너 지금 거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보면 알겠지만 전사장은 보통 거인과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두고 봐.
둘의 귓속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사장은 입을 열었다.
-으음.
교양 있고 중후한 동작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잘 모르겠군.
“…….”
“…….”
-그냥 돌격할까요?
뒤에 있던 호위들은 생각하기 귀찮아졌는지 말을 꺼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적들의 심장부를 향해서 돌격한 다음 도망칠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면….
[카르바노그가 저것들은 그냥 입 다물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고대 제국 전사의 후예들은 입을 열면 속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딱히 전사장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고민하는 게….”
-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내가 뭐라고 했어. 전사장이 꽤 똑똑하다니까?”
태현은 기쁜 목소리로 이세연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꺼낸 전술은 너무 단순한 전술이다.
-그렇습니까?
-다들 들어보라. 나는 이번 시련에서 행운의 힘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오오…!
“?”
이세연은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런 게 있어?
태현은 시선을 피했다.
‘나도 행운의 힘 뭔지 모르니까 묻지 마라.’
-행운의 힘은 곧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함과 비열함에서 나오는 것.
-오오….
-어쩐지! 그냥 하면 안 나오더라!
-그렇다. 나는 그래서 항복하는 척하고 다크 엘프들을 불러서 기습하려고 한다.
-오오오오오!
고대 제국 전사들은 전사장의 유능한 계략에 감탄했다.
저런 고오급 전술이!
듣고 있던 태현은 고민에 잠겼다.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말려요??
-말려야 하지 않나?
-아니. 근데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라면 상관없을 거 같기도 하고.
-으으음….
일행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짓 했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vs 어차피 서로 끝까지 싸울 마당에 이제 와서 뭐 어쩌겠나!
그러나 일행이 고민하는 사이 전사장과 전사들은 이미 계획 준비까지 끝내 놓았다.
-자! 서신을 보내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전사장은 현명한 눈빛으로 태현을 보며 말했다.
-행운의 힘을 가르쳐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아키서스의 영웅이여.
“…다 좋은데 모험가들 앞에서 그게 행운의 힘이라고 하지 마라.”
-왜?? 어째서???
* * *
“전사장이 다크 엘프들을 불러서 기습을 하고 나면 꽤 시끄러워질 텐데. 그 틈을 타서 뭔가 할 수 없을까.”
“파고들어서 기습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김태현 선수의 폭딜이라면….”
류태수의 말에, 태현은 시무룩해졌다.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이런 멍청한 소리를!”
“궁상 그만 떨고. 그거 말고도 딜 스킬은 여러 개 있지 않아?”
“음. 화염 회오리를 소환할 수는 있겠지. 통제하기가 힘들어서 플레이어들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게 문제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자.”
사디크와 아키서스의 힘이 담긴 화염 회오리는 정말로 강력한 광역기였지만 통제 불가능하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사악한 드워프들이라면 분명 화염의 힘이 담긴 이동 제단을 갖고 다닐 거다. 그 제단들을 노려라! 잘못 건드리면 주변을 크게 파괴시키는 건 물론이고 드워프들의 사기가 꺾일 거다.
“??”
뒤에서 들려오는 조언에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아니 이놈이 비싼 피 처먹고 또 헛소리를 하네!
-야! 성수 갖고 와라!
바로 감옥 안에 갇힌 대악마, 소환공 에다게르였다.
“아니… 심심한가? 왜 조언을 하지?”
-이 인간 놈이 소환공이 조언을 해줬는데도 감히…!
에다게르는 태현의 시원찮은 반응에 화를 냈다.
드워프들은 에다게르의 건방진 반응에 화를 냈다.
촤아아악!
-크아아악!
-이놈아! 언제 철이 들래! 저기 구시온이 좀 본받아라!
-시끄럽다, 이 드워프 놈들아! 언젠가 이 감옥에서 나가는 날 네놈들을 모조리 내 노예로….
-아이고 이놈이 아직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드워프들이 곧 에다게르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저 말이 사실인가?’
[카르바노그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드워프들은 원래 자기네 종족 신을 믿었지만, 사악한 드워프들은 그 신을 버리고 타락한 이들이었다.
대신 그들은 불을 숭배했다.
-사디크를?
[불을 숭배한다고 했지 지능이 떨어졌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렇군. 그냥 불이었군.
딱히 사디크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강한 불이면 뭐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가끔 사디크 신앙에 빠지는 드워프들도 나오곤 했다.
‘아. 그래서 예전에 사디크 교단 공격할 때 드워프들도 있었던 건가….’
에다게르야 하찮은 놈들이 하찮은 이야기만 주구장창 해대니 지겨워서 던진 말이겠지만, 어쨌든 도움이 된 건 사실.
태현은 포병대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성수 세례 그만하고 에다게르를 쉬게 해줘라.”
-예!?!?
드워프들은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경악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아키서스 어르신!
악마 공작 구시렉의 아들, 구시온이 나서서 외쳤다.
-저 악마에게는 따끔한 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저 새끼와 떨어뜨려만 준다면 앞으로 내게 묻는 질문에 최대한 협조하겠다.
에다게르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구시온이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 저러는 줄 알았는데, 이쯤 되자 에다게르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구시온 저놈은 그냥….
미친 거였다.
그냥 곱게 미친 거면 모를까 옆에 두면 에다게르를 매우 괴롭게 만드는 놈!
어떻게든 치워둬야 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 나는 악마 공작이다.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저놈과 떨어뜨려만 다오.
처음에는 X새끼 X새끼 다 나왔지만 에다게르도 꽤 많이 지친 상태였다.
많이 고분고분해진 것이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처럼 이렇게 협조를 해준다면 그 공을 참작해서 쉬게 해주지. 여기 이것 좀 먹어봐라.”
-오… 제법 맛있군.
에다게르는 태현이 내민 음식에 감탄했다.
뭔진 모르겠는데 악마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태현은 <신성 요리> <구걸 요리> <괴식 요리> 뿐만 아니라 <악마 요리> 스킬도 갖고 있는 사람.
이번에 만든 요리는 <악마를 위한 원기 회복 보양식 모음>이었다.
일반 플레이어들한테 주면 ‘이게 뭔 한약 같은 맛입니까?’ 같은 소리가 나왔겠지만, 에다게르 같은 악마한테는 매우 훌륭한 음식이었다.
-힘도 좀 회복되는 거 같고. …잠깐, 설마 이러고서 마력을 흡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거면 안 먹이고 흡수하지. 피만 먹여도 마력은 잘 만들어 내는데.”
-…….
에다게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무서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