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31화
어지간한 협박에는 굴하지 않는 태현이었지만, 다 큰 남자가 눈물 그렁거리면서 말하는 건 솔직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시판에 안 올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휴… 다행이야. 안 그래도 새로 오는 사람 적은데 게시판에 올라갔다가는 더 적어질 거야.”
“앗. 올리면 안 되나요?”
이다비는 아쉬운 표정으로 메모하던 종이를 집어넣었다.
파워 워리어 길드 계정이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판온의 온갖 정보와 소문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 때문이었다.
이 마을은 꽤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는데….
“차라리 이런 걸 특색 삼아서 홍보하면 어때?”
파워 워리어를 옆에서 보고, 또 직접 골짜기를 운영해 본 적 있는 태현이었기에 알고 있었다.
뭔가 경영할 때 일반적인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특히 일반적인 방법으로 안 될 때에는 온갖 변칙적인 방법을 다 써봐야 했다.
당장 골짜기만 해도 골드 부족하고 입지도 안 좋고 시설도 없고 사디크 교단 반란 때문에 주민들도 부족한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신기하군. 진짜 어떻게 운영했지?’
…어떻게든 변칙적인 방법으로 꾸역꾸역 성장해서 지금 어엿한 영지가 되지 않았던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떤 미친놈이 이런 꼴을 보고 여기 오겠어!”
‘반박하기 힘들긴 하군.’
길드원의 절절한 외침에 태현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차갑게 식은 수프를 길드원들이 한 숟갈씩 나눠 먹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냥 포기하고 중앙 대륙으로 돌아가서 맛있는 거 먹고 편하게 살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원래 사람은 이성적인 생물이 아니었다.
여기 남부 대륙 개척지 마을에 쏟아부은 노력과 골드가 있었기에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같은 처참한 상황이었다.
배낭에 골드는 많은데 정작 먹을 아이템은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상황!
“여기 <갓 구운 상급 흰 빵>, <달콤한 딸기 잼>, <부드러운 버터>, <괴수가 낳은 신선한 무정란>, <바다 괴수의 갈빗살>… 아이템들 많으니까 원하는 만큼 사가세요.”
‘이름이 뒤로 갈수록 좀 이상한데…?’
듣고 있던 류다영은 이다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군침 도는 아이템들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어? 저걸 먹어도 되나?’ 싶은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길드원들은 괴식 요리도 맛있게 먹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먹겠습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요리 좀 해서 먹지?”
태현은 안쓰러워서 말했다.
“읍읍읍읍?”
“!”
놀랍게도 그사이에 음식이 싹 사라져 있었다.
굶주린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집어삼킨 것!
“너무 많이 먹으면 포만감으로 페널티 붙을 텐데?”
“읍읍읍읍.”
[아직 멀었다고 카르바노그가 전해줍니다.]
‘이걸 굳이 해석해 줄 필요는 없는데.’
대체 얼마나 굶었는지 산더미 같은 음식 재료들을 그대로 뱃속에 집어넣고서도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찾을 정도로!
“혹시 더 안 파십니까??”
“저희는 음식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든지 그냥 팔아만 주십시오! 상한 음식이어도 잘 먹습니다! 끓여 먹으면 맛 괜찮습니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길드 간부들이 나와서 길드원들을 밀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남들한테는 ‘어? 우리 뭐하냐고? 후후 남부 대륙에서 영지 경영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걸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거지 길드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죄송해요. 이제 아이템이 없어요.”
이다비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왕이는 각종 버프 스킬에, 상인이라면 탐을 낼 만한 어마어마한 공간을 제공하는 가방이었지만….
그 안에 채워 넣는 건 이다비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각종 장비부터 시작해서 포션, 주문서, 재료 등 정확하게 정리해서 넣어야 하는 것이다.
요리 재료 같은 경우에는 이다비는 파티가 쓸 부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골짜기 쪽 창고에 넣어 놓곤 했다.
워낙 골짜기에 사람이 많아진 탓에 요리 재료를 많이 수급해도 모자랐으니까.
그런 만큼 음식 아이템들이 빠르게 소진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안 돼…!!”
“신이시여!!”
“으헝헝헝!”
‘…그냥 게임을 끄고 밖에 나가서 국밥 한 그릇 먹으면 안 되나?’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같이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 그런 말은 일종의 반칙 같은 것!
“기다려봐라. 내가 뭐라도 좀 만들어주마.”
“…?”
태현이 길가에 있는 흙과 돌멩이를 주물주물거리며 뭔가 만들기 시작하자, 길드원들은 화를 내는 대신 ‘우리도 알아’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흙은 가끔 맛있어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맛이 별로 없어.”
“그리고 돌멩이는 소화가 안 된다고. 마음은 이해하지만 안 먹는 게 나아.”
“제발 너희들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냐??”
길드 간부가 화를 냈지만 길드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지 같은 개척 마을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쌓인 노하우!
[아키서스의 권능 요리를 사용합니다!]
[<달콤한 흙빵>이 만들어집니다.]
[<부드러운 돌판구이>가 만들어집니다.]
남들이 들으면 매번 놀라는 사실이지만, 태현은 요리 스킬도 최고급을 찍은 사람이었다.
물론 <아키서스의 권능 요리>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맛… 맛있잖아?”
“대체 어떻게!? 흙에 뭘 탄 거지??!”
길드원들은 놀라서 웅성거렸다.
분명 흙과 돌만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온단 말인가.
“너희 지금 나 놀리려고 이러는 거지?”
“아니. 파티장님! 믿고 한 번 먹어 보십시오!”
“싫어, 이것들아! 내가 굶어 죽으면 굶어 죽었지 흙 퍼먹진 않을… 읍읍읍!”
옆에 있던 간부도 억지로 먹더니 눈을 번쩍 떴다.
맛… 맛있다!
털썩-
“제발 요리 스킬을 가르쳐주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우겠습니다!!”
“이거 직업 스킬이라 힘들 것 같은데. 음… 아닌가? 교단에서 배울 수 있나?”
“교단이라면…?”
“아키서스 교단 쪽 직업 스킬이다.”
“아키서스 교단!! …아니 아키서스 교단이 왜?”
요리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단 이름이 나오자 길드원들은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딱히 요리 스킬이 있을 거 같은 교단은 아닌데?
“행운의 교단이니까, 운이 좋으면 흙이 먹을 걸로 바뀌는 거 아닐까?”
“하늘에서 음식을 소환할 수 있을지도….”
태현은 남부 대륙에서 퀘스트를 깨면서 나름 아키서스 교단 신앙을 많이 퍼뜨려 놓았지만, 남부 대륙에서 개척 생활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보통 탐험과 개척의 신인 지르메드를 믿었다.
워낙 버프가 좋아서 오지에서 새 마을 개척할 때는 거의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저런 스킬을 얻을 수 있다면 아키서스 교단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몇 명 아키서스 교단으로 갈아타볼까?”
“평소에 상자 까는 거 좋아하는데 갈아타볼까요?”
“그런 걸로 되나??”
그렇게 떠드는 사이, 마을에 뒤이어 손님들이 우르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
오랑카 마을의 주인인 오랑카 길드원들은 그 외침에 깜짝 놀랐다.
“하… 하루에 손님이 두 팀이나?!”
“세상이 망할 징조인가???”
“그, 퀘스트 뜬 거 못 보셨어요? 꽤 유명한데?”
이다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게시판에 가트프리드 관련 퀘스트로 벌써 정보가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명하지 않을 수 없는 퀘스트 이름인 만큼 다들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저희 중앙 대륙 퀘스트 잘 안 봐요.”
“왜죠?”
“보면 배 아파서요.”
“…….”
이다비는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 사람들… 남부 대륙의 파워 워리어 같아요!
-파워 워리어가 그 정도였나…?
오랑카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새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NPC들한테 가서 물건 사지 마세요! NPC 놈들이 아주 맛이 갔어!”
어떻게든 고객을 유치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
태현은 손님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아키서스 교단이었으니까!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교단 가입 플레이어들까지.
교단에 공적 포인트 내고 NPC들을 빌려서 같이 온 게 분명했다.
“뭐야. 가트프리드 퀘스트 깨려고 온 건가?”
태현은 변장을 풀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러자 교단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라 외쳤다.
“교황님!!”
“그래. 가트프리드 퀘스트 깨러 온 건가?”
“그보다는 교황님 도우러 온 거죠. 교단에서 퀘스트가 나와서.”
“오….”
이세연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교단 갖고 있으면 이런 것도 되는구나. 도움 많이 되겠는데.”
“아니. 딱히 도움 안 돼.”
태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도움 좀 되지 않아?”
“안 된다니까.”
100% 단호함으로 말하는 태현의 태도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도움 될 것 같은데….’
이세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꽤 멀쩡해 보이는 파티였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쪽으로 플레이어들 꽤 많이 오고 있겠네?”
“그렇죠. 골짜기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파티 짜서 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냥 가트프리드 퀘스트 참가하려는 놈들도 오고 있고… 그런데 교황님.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교단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리면서 마을의 길드원들을 쳐다보았다.
꺼이꺼이 울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이지. 혹시 음식 남는 거 있니?”
* * *
태현은 난이도 있는 퀘스트의 경우 가장 빨리 가는 것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보통 가장 빨리 가봤자 별 볼 일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깨야지 빨리 간다고 깨지는 게 아닌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런 퀘스트가 나오면 가장 빨리 깨려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공만 하면 남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보상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김태현보다 먼저 왔다. 맞지? 김태현보다 먼저 온 거 같은데??”
“맞는 거 같습니다!”
나인테일 길드의 랭커, 바스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먼저 탈것을 타고 쉬지도 않고 미친 듯이 내달려서 남쪽으로 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고대 제국 전사들의 사원을 발견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
거대한 정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폐허 비슷한 사원.
이 사원이 바로 퀘스트의 목적지였다.
“들어가자!”
쿵-
“?”
들어가려던 이들은 갑자기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누…구십니까?”
-이름은 알려줄 수 없다.
“고대 제국 쪽 전사 후예인가?”
“문 관리하는 NPC 같은데….”
길드원들은 수군거렸다. 딱 봐도 겉모습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갑옷 하나 입지 않고 근육질의 맨몸을 드러내고 있는 전사.
보통 장비 안 입고 있는 놈들은 NPC나 플레이어나 위험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로 들어오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나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
“…패스하죠?”
길드원들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물러섰다.
왠지 모르게 붙었다가는 박살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든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인정할 만한 업적을 내놓는 것이다.
“업적이면…?”
바스토스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스칼로 성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일원입니다!”
-지금 그걸 인정할 만한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냐!!!!
박력 있는 함성이 플레이어들을 쓸어버리듯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