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24화
“아. 그러게 굶주린 혼돈 말고 아키서스 믿지 그랬나.”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폐하!
“…….”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둘이 정색하자 태현은 살짝 상처 받았다.
다른 교단 신도면 모를까, 굶주린 혼돈 믿는 놈들한테 ‘그래도 아키서스는 좀…’이라고 듣는 건 꽤 억울했던 것이다.
사디크 교단 신도한테 ‘아키서스는 좀…’ 하고 듣는 것과 타격이 비슷할 정도.
어쨌든 대화를 해봤자 서로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 입장에서는 성주 하나 살리자고 성을 그냥 내놓을 이유가 없었고, 태현은 그게 아니라면 타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서로가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건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하느냐.
그리고 놀랍게도 공격을 먼저 시작한 건 굶주린 혼돈의 전사였다.
-됐다. 어쩔 수 없지.
“?”
-?
태현과 성주 모두 당황하는 사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다. 미안하게 됐소. 성주! 그러니까 붙잡히지 말았어야지!
-야 이 개새….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혼돈의 힘을 불러옵니다!]
[성주의 육신이 혼돈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크아아아아아악!
성주의 피부가 짙은 보랏빛으로 변하면서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카르바노그가 조심하라고 외칩니다!]
카르바노그가 그렇게 조언하지 않아도,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태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스킬이지? 설마 이 자식도 폭발을 쓰나?’
짧은 순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수십 가지 생각들.
이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은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폭탄>!
태현은 망설임을 버리고 성주를 향해 기계공학 스킬을 사용했다.
[<살아 움직이는 폭탄>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최고급 기계공학 스킬을…]
[……]
-이놈! 뭐하는 거냐!?
굶주린 혼돈의 힘을 불러와서 성주를 죽여 버리고 꼭두각시로 만들려던 전사는 당황했다.
성주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세연! 부탁한다!”
-!
태현의 시간을 벌기 위해 이세연이 움직였다.
-죽음의 시간, 죽음의 영역, 영원한 어둠의 오오라, 마계의 뼈 군대 소환, 마계의 지옥바람 소환, 악마의 맹독 골렘 소환, 언데드 추적, 언데드 폭발!
숨 쉴 틈도 없이 미친듯이 퍼붓는 마법 난사!
태현은 스킬 쓰던 와중에 그걸 보고 부러워했다.
‘MP가 얼마나 많으면 저런 게 가능하지?’
-냄새나는 흑마법사가 감히 내 눈을 속이고 숨어 있었단 말이냐!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분노해서 외쳤다.
그러고는 류다영을 묶은 스킬을 손짓 한 번으로 풀어주고 말했다.
-일어나라, 멍청한 놈아! 저 흑마법사를 죽여라!
“…네가 죽어!”
류다영은 분노해서 무기를 휘둘렀다.
누굴 누구로 착각한 거야!
쾅!
-!?
류다영을 포함한 정예 언데드들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를 둘러싸고 닥치는 대로 패기 시작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살벌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언데드들을 소멸시켰지만 워낙 숫자가 많았다.
열 마리를 해치우면 스무 마리가 다시 나타나는 미친 속도.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흑마법사를 먼저 처리하려고 이를 갈았지만 류다영이 단단히 발을 묶었다.
-파이토스의 성스러운 강철, 떡갈나무의 일검!
-파이토스의 하수인이었나! 파이토스 교단의 하수인이 왜 아키서스의 후계자와 같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타당한 지적을 했지만 류다영은 못 들은 척했다.
파이토스 교단을 좋아서 믿는 게 아니라 직업이라서 하는 거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작업이 끝났다.
“다 됐다. 폭파시킨다! <아키서스의 축복>!”
태현은 폭탄으로 변한 성주를 앞으로 걷어 차고 파티원들에게 권능을 걸었다.
준비는 끝!
콰르르르르르르릉!
[스칼로 성주가 폭발합니다!]
[강한 충격이…]
[기계공학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최고급 기계공학 스킬 레벨이 7이 되었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여러 퀘스트를 힘겹게 깰 때보다 레벨 높은 NPC 한 명 납치해서 폭탄으로 만드는 게 더 레벨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레벨 240을 드디어 넘겼다!’
게다가 최고급 기계공학 스킬 레벨이 드디어 7을 찍은 것이다.
최고급의 경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정말 스킬 레벨 1 올리는 게 힘겹기 그지없었다.
어떤 아이템을 만들고 폭탄을 만들고 해도 정말 조금씩 오르는 수준.
그걸 간신히 극복하고 7을 찍은 만큼, 레벨 업보다 더 기뻤다.
[<고대 제국 장난감 비전> 스킬의 새로운 제작법이 해금됩니다!]
[<악마의 기계공학 비전> 스킬의 새로운 제작법이 해금됩니다!]
[기계공학 스킬의 레벨이 오른 것으로, 선대의 위대한 대장장이들이 만들어 낸 걸작 중 하나의 제작법을 얻습니다!]
그런 기쁨에 대답해 주듯이 기계공학 스킬들은 화끈한 제작법 3개를 알려왔다.
하지만 태현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부터 수습해야 했던 것이다.
“이쪽으로!”
태현과 이세연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태현이야 자기가 벌인 일이었고 몇 번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세연도 비슷했고….
그에 비해 류다영은 사방이 뒤집히고 흔들리고 위아래가 뒤집히는 모습에 당황스러워했다.
“류다영 선수. 언데드를 밟고 뛰세요!”
“밧줄 같은 거 던져서 위치 고정해!”
“네! 네!”
대체 둘은 왜 정신 멀쩡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류다영은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
“아니지! 거기서는 그냥 스킬 써서 파편 위로 뛰어야지!”
“아, 그러면 좀 느려지잖아! 균형 잡으려면 한 바퀴 돌아야 한다니까?”
“내가 언데드 새로 소환해서 받쳐주면 되는데 그걸 왜 신경 써! 괜히 그렇게 했다가 실수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처음에는 지시를 받던 류다영은 깨달았다.
아, 스스로 살아남아야겠다!
[최상층 성벽이 크게 흔들립니다!]
[최상층 결계가 크게 흔들립니다!]
[성벽이 파손됩니다!]
[결계가 파괴됩니다!]
[……]
[……]
‘안 무너진다고!?’
폭발로 인해 주변이 다 박살 나고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태현은 메시지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솔직히 내성 최상층 성벽을 통째로 날려버릴 각오를 하고 폭탄으로 바꿨던 것이다.
그런데 바닥이 무너져서 사방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내성의 겉은 버텨내는 데에 성공했다.
‘대체 결계를 얼마나 덕지덕지 깔았길래…?’
[카르바노그가 아마 화신 때문 같다고 말합니다.]
‘그럴듯하긴 하군.’
성주가 얼마나 겁을 냈는지 살짝 미안해질 정도였다.
정작 들어온 사람은 그냥 정문으로 쉽게 들어왔는데…!
* * *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위가 무너져 내리더니 어마어마한 먼지와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굉음이 다시 들리더니, 언데드 군대와 함께 태현과 이세연이 착지했다.
최정예 근위병들과 힘겹게 싸우면서 버티고 있던 랭커들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김… 김태현!!!”
“도와주러 온 거냐?!”
당황스러웠지만 상황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친듯이 몰아붙이던 근위병들 위로 떨어져서 크게 밀어내버린 기습!
게다가 이세연의 언데드 군대들이 그 위로 쏟아져서 바로 길을 막아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포위당하고 있던 랭커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수준이었다.
몇몇은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 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너희를 ㅇ….”
“도와주러 온 거 맞습니다!”
류다영이 급하게 말을 잘랐다.
괜히 여기서 싸워서 서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김태현 저 자식이 도와주러 올 줄이야….”
“그래도 양심이란 게 조금 생긴 것 같은데?”
“쟤도 이제 구단주인데 사람이 좀 변했겠지.”
“…….”
태현에 대한 평가를 들으면서, 이세연은 꽤나 복잡한 표정을 들었다.
저게 맞으면서도 틀린 게 꽤 많은데…?!
쿵!
뒤늦게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떨어졌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어디서 심하게 두들겨 맞았는지 겉모습이 상당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크아아악!!
“왜, 왜 저래 저거?”
“김태현이 이미 팼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한데?”
-전부 다 죽여서 굶주린 혼돈 님께 바치는 제물로 만들어버리겠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혼돈의 격노>를 사용합니다!]
[공격 속도가…]
[스킬 속도가…]
[……]
보스 몬스터들이 HP가 일정 이상 깎이면 쓰는 각성 스킬들.
그런 종류의 스킬을 사용하자 랭커들은 긴장했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훅 가는 것이다.
‘그래도 김태현이 있으니 괜찮겠지.’
‘그래도 김태현을 먼저 공격하겠지?’
랭커들은 살짝 그런 기대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사람은 가장 딜 많이 넣고 원한 많이 사고 명성 높은 사람인 것이다.
쾅!
그러나 그런 기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빗나갔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가장 가까이 있던 랭커를 붙잡고 미친듯이 패기 시작한 것이다.
“뭐하냐!?”
태현은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랭커란 놈들이 뭔 정신줄을 놓고 있었는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맞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니! 왜!”
“뭘 왜야 미친놈들아! 적이니까 공격하지!”
“그게 아니라!”
태현이 한심하다는 듯이 구박하자 랭커들은 억울해졌다.
“도… 도와줘!!”
다행히 랭커들과 태현이 공격을 연신 퍼붓기 시작하자 굶주린 혼돈의 전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신줄 한 번 놨다가 로그아웃 당할 뻔한 랭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 왔습니다!!!”
그때 뒤에서 길드원들이 우르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다비에게서 보급품을 사서 재정비를 끝낸 이들이 차례대로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태현과 이세연, 그리고 두 길드 랭커들이 혼돈의 전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잘 이해가….”
“위는 왜 부서져 있지? 스킬 썼나?”
길마들은 랭커들에게 급히 귓속말로 따로 물었다.
-영주 방은 어디 있어? 거기부터 들어가서 점령하고 봐야지!
-지금 그러니까 그게… 위에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걸 왜 안 찾고 있는데?
-여기 병사들이 너무 강해서….
-아니 그걸 못 뚫었다고?
-진짜 강했다고요!
-알겠다! 지원해 줄 테니까 빨리 뚫고 가라!
길마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납득하고 외쳤다.
“빨리 들어가라! 랭커들을 지원해서 길을 만들어라!”
“야! 레벨 낮은 놈들은 오지 마라! 괜히 붙잡혀서 박살 난다!”
태현의 외침에 길마 둘은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사악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냐!?”
“우리 성을 빼앗으려고 이러는 거지!?”
“…아니 이 새끼들이 진짜….”
태현이 어이없어하자 랭커들이 태현을 도와서 외쳤다.
“길마님! 진짜입니다! 여기 근위병들 장난 아니게 셉니다! 길드원들 가까이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괜히 들어왔다가 아작납니다!”
“…랭커들까지 섭외한 건가?!”
“길마님!!!”
“미, 미안. 내가 미친 소리를 했군.”
“이해는 갑니다만 믿어주십시오!”
‘뭘 이해가 가 미친놈들아.’
태현은 속으로 욕했다.
저 말의 어디가 이해가 가는 거지?
태현의 외침 덕분에 길드원들은 무의미한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됐다.
태현과 랭커들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를 둘러싸고, 그 위로 한층 더 넓게 펼쳐진 포위진!
‘괜찮은데?’
이 정도면 태현은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쾅!
“????”
…그 위로 한 명이 더 떨어져 내리기 전까지는.
바로 스칼로 성주였다.
“죽… 죽지 않았나?”
-크아아아아악!
굶주린 혼돈의 힘을 풀풀 풍겨내며, 성주는 원한에 섞인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그걸 본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반갑게 소리쳤다.
-훌륭하오, 성주! 버텨냈군! 자! 저 아키서스의 후계자를 공격하시오!
-죽어라!!!
성주는 매섭게 공격을 시작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