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22화
다른 랭커들과 달리, 회피력에 올인한 태현은 이런 플레이가 가능했다.
밀려오는 적들을 무시하고 맨몸으로 뚫고 들어가기!
다른 방어력 높거나 HP 높은 플레이어가 똑같은 짓을 했다면 바로 공격을 두들겨 맞아서 발이 묶였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력은 이런 게 가능했다.
“김태현! 정정당당하고 명예로운 네가 도적 새끼들이나 하는 짓을 해야겠냐!”
오죽하면 뒤에 있던 랭커들이 이런 식으로 태현을 부를 정도였다.
물론 랭커들은 태현이 정정당당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태현을 묶을 수 있다면 어떤 칭찬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야. 지금 도적 새끼라고 했냐?”
“아… 아니. 너도 알지 않나. 너 욕하는 거 아니라는 거.”
랭커 중 도적 직업이 한 명이 발끈했다.
방금 도적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처럼, 도적 직업은 이런 부분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특유의 스킬들 덕분에 파티 플레이에서 남을 배신하기 쉬운 것이다.
던전 돌다가 먼저 들어가서 보상 챙기고 튀기, 안 될 거 같으면 이동력과 탈출기 써서 파티원들 버려두고 도망치기, 남들 싸우는데 혼자 은신 걸고 들어가서 아이템 먹기 등등!
…물론 그건 일부 도적 플레이어들이었고 멀쩡한 도적 플레이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김태현! 돌아오라고!!”
물론 도적 새끼든 뭐든 간에 태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법사 님! 저기 국왕 폐하께서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십니다!
-알겠다!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내성 마법사들이 나와서 태현을 노렸다.
-국왕 폐하! 체통 없게 이런 식으로 들어오시려고 하시다니요!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럼 굶주린 혼돈하고 결탁한 건 품위 넘치는 짓이냐?”
태현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래도 국왕 타이틀 있다고 마법사들이 국왕 폐하를 꼬박꼬박 붙여서 불러주는데, 그게 더 얄밉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할 말이 없었는지 마법으로 대답했다.
-타락한 환상의 사슬!
-끓어오르는 진흙의 늪!
[타락한 환상의 사슬이….]
[….]
그러나 태현은 이미 폭발 검술을 사용해 거리를 벌린 뒤였다.
안 그래도 직감이 예리한 편이었지만, <아키서스의 화신>으로 전직한 다음부터 더욱더 날카롭게 갈고 닦여진 편이었다.
HP가 턱없이 낮은 대신 회피율로 버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실수로 스킬 한 대 맞으면 위험해지니, 위협적인 스킬을 쓰는 NPC를 구분하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저 둘은 맞아도 되고, 저놈은 위험한 거 같고….’
딱 봐도 회피율 무시하고 들어올 거 같은 저주는 바로 빠르게 이동해서 조준에서 벗어났다.
콰콰콰콰콰쾅!
‘시작됐구나!’
내성 안 곳곳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오자 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세연도 잘 들어온 것이다.
-폐하! 거기 서십시오!!
-멈추면 포로로서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스칼로 성 마법사들은 내성 성문이 뚫렸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외성 성문이야 그렇다 쳐도, 내성 성문은 영주의 방까지 들어갈 수 있는 가까운 성문.
공성전에서 내성 성문이 돌파당하는 건 치명적이었다. 심장 바로 앞을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병사들은 귀환하라! 내성을 지원해라!
-내성에 마법사들이 들어왔다! 폭발을 막아라!!
플레이어였다면 어떻게든 버티면서 상황 파악을 하려고 했겠지만 NPC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스칼로 성주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병사들이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전투력이….]
밖에서 길드원들을 정신없이 밀어붙이던 병사들도 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길드원들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완전 미친놈들처럼 덤비는데?”
“HP가 8%야…. 갑옷 내구도도 지금 절반이 닳았네. 미친 거 아닌가??”
공성전을 각오한 만큼 어느 정도 조사는 해왔지만, 그걸 뛰어넘는 병사들의 전투력에 길드원들은 단단히 질려 있었다.
“그래도 우리 덕분에 내성 안으로 들어간 게 맞겠지?”
“그렇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 길드 랭커가 들어갔을 거다.”
“하. 또 시작이네. 아까 하도 힐 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힐 해줬는데 이제 여유 생겨서 그러는 거냐?”
“뭐, 뭐? 내가 탱킹 안 해줬으면 그쪽까지 가서 죽었을 놈이 무슨…!”
여유가 생기자 두 길드원들은 투닥거리며 싸웠다.
“그만 싸우고 내성으로 간다! 준비해라!”
“예!”
파티장들의 외침에 길드원들은 다시 재정비를 마치고 향하려고 했다.
랭커들이 들어갔다지만 이런 싸움에서는 길드원들의 지원 또한 필수적이었다.
무엇보다 상대 길드보다 앞서가야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모가 너무 심했다.
“포션 다 썼습니다.”
“그 많은 포션을?!”
“아까 안 썼으면 다 죽었을 상황이었다고요.”
“주문서도 모자랍니다. 대장장이들도 밖에 있어서 수리 주문서 써야 하는데 양이 부족합니다.”
“밖에서 지원을 받으면 되는데….”
간부들은 혀를 찼다.
밖에 널린 게 물자인데 이걸 갖고 올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잠깐만 나갔다 오면 되는데!
“밖에 나가실 필요 없습니다!”
“??”
“자! 원하는 게 있으면 하나씩 말해보세요.”
“…????”
성문 주변 파던 이다비가 외치자 모두들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상인 직업도 아니면서 뭘 팔겠다고?”
“상인 직업인데요?”
“…진짜십니까!?”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다비가 사제인 줄 알았던 것이다.
“사제 아니었어?”
“아니… 상인 직업인데 대회는 어떻게 나간 거지?”
“하이브리드 특수 직업인가?”
수군대던 길드원들 중에 그래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건 먼저 사야 한다!’
물량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남들보다 빠르게 사야 하는 법.
“제가 사겠습니다! 포션 있는 거 다 주십시오!!”
“어… 그건 힘들 거 같은데요.”
“예? 어째서입니까?”
“너무 많아서 혼자 다 못 사실걸요?”
“제가 레벨이 몇인데 그걸 못 사겠습니까? 다 주시기만 하시면….”
“저 자식이 새치기를 해?!”
“비켜! 레벨 순으로 줄 서!”
다른 길드원들은 물론이고 서로 같은 길드원들끼리도 다퉜다.
포션 확보는 자기 목숨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서로 양보가 없었던 것이다.
와르르르-
“….”
“….”
그러나 이다비가 앞에 쏟아낸 아이템 양을 보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다 사실 건가요 정말?”
“…조금만 주십시오!”
* * *
스칼로 성의 내성은 으리으리했다.
돌을 깎고 쌓아 올린 성 안은 수십 개가 넘는 방을 갖고 있었고 위를 쳐다보면 계단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다.
하지만 이 넓고 넓은 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였다.
영주의 방!
영주가 머무르는 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서 점령을 하면 성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랭커들이 정면전을 피하고 우회해서 들어가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수비병들이 많고 적들이 강력해도 안으로 파고들어서 영주의 방만 점령하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으니까.
쾅! 콰콰콰콰쾅!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 거지??”
뒤늦게 따라 들어온 랭커들은 안에서 계속 들리는 폭발음에 당황스러워했다.
이세연은 네크로맨서니까 이런 마법을 쓸 것 같지는 않고, 태현은 기계공학의 마에스트로긴 했지만 이건 범위가 너무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태현이 무슨 순간이동하면서 폭탄 던지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영주의 방을 찾아!”
“예!”
내성부터는 랭커들도 정보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안을 탐색하려고 해도 NPC들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갖고 있는 건 소문으로 듣거나 책에서 탐사한 정보가 전부!
나머지는 직접 부딪혀서 찾아내야 했다.
-감히 이곳에!
“근위병들이다. 처리해!”
랭커들은 당황하지 않고 나타난 근위병을 상대하려고 했다.
나타난 숫자는 다섯 명.
그에 비해 랭커들은 열 명이 넘어갔다.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던 것이다.
쾅!
“크아아아악!”
그러나 한 번 부딪혔을 때 날아간 것은 랭커 쪽이었다.
[상대의 힘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장비의 내구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잠시 동안 움직일 수 없….]
[….]
[….]
“보, 보통이 아니야! 조심해!”
아까 내성 성문 밖에서 싸웠을 때만 해도 랭커들은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근위병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했으니까.
그러나 내성 안에서 마주한 근위병들은 한 단계 더 진화해 있었다.
뭐 이런 괴물들이 있나?
“약화 마법 최대로 때려 박아! 원거리 딜 준비한 거 다 날려! 너 아까부터 MP 아끼려고 약한 스킬만 날리는 거 보이는데 그랬다가는 다 같이 죽는 거야!”
“무, 무슨 소리를?”
랭커들은 밑바닥까지 긁어모아서 근위병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아껴뒀다가 영주의 방에서 써야 할 스킬들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아껴둘 때가 아니었다.
치열하게 싸우던 랭커들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태현은 어디 갔냐?
* * *
이세연이 언데드들을 닥치는 대로 터뜨려서 내성 안을 혼란으로 만든 뒤, 셋은 다시 합류했다.
그러고 나서 태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변장이었다.
“근위병 같아 보여?”
“너는 되게 그럴듯해 보이는데…. 우리 둘은?”
태현은 기계공학 아이템, <제국 은신 광선 장난감>을 꺼냈다.
고대 제국 대학에서 배운 강력한 비전 장난감!
“지금 기계공학 장난감으로 은신을…?”
이세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의아해했지만, 장난감의 효과는 확실했다.
[내구도가 1 감소합니다!]
[제국 은신 광선 장난감이 강력한 은신 상태를….]
“!??!”
“저도 은신을 합니까?”
“아니. 내구도 아깝기도 하고, 넌 다른 핑계를 쓰려고.”
“??”
류다영은 의아해했지만, 태현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자. 돌아서.”
“???”
태현은 밧줄을 얼기설기 묶었다. 그러자 류다영은 대충 포로처럼 변했다.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포로를 성주한테 바쳐야 한다고 화술 스킬 쓸 테니까. 포로가 한 명 필요했거든.”
“…저 탱커로 데려오신 거 맞습니까…?”
류다영은 살짝 자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세연이 시선을 보냈다.
-괜히 자신감 잃게 만들지 마!
-알고 있어.
“물론이지! 네 탱커로서 능력을 높이 사서 데리고 온 거야.”
“감, 감사합니다.”
태현이 아무리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도 칭찬은 기쁘기 마련.
그러나 그 뒷말을 듣자 류다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널 케인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류다영은 못 믿겠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하도 말도 안 되는 칭찬을 하니 그 전 말도 믿기 힘들어진 것이다.
“아니… 왜?”
“…괜찮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류다영은 살짝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세연은 눈빛으로 화냈다.
‘억울하군!’
태현은 억울해졌다.
정말 진심 어린 칭찬이었는데…!
[스칼로 성 최정예 근위병이 나타났습니다!]
-정지! 무슨 일이냐!
“몰래 성안으로 들어오려던 놈을 붙잡았습니다! 성주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몰래 들어오려고 하다니. 무서운 놈들…! 듣자 하니 아탈리 국왕이 그렇게 변장의 달인이라고?
“예!”
말하던 태현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통하나?’
“헉! 성주님 주변에 있는 사람으로 변장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정말이냐?!
“이 포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